주간동아 456

2004.10.21

우리들의 아주 특별한 목욕여행

  • 입력2004-10-14 18: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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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의 아주 특별한 목욕여행

    한 명 자 / 충북 청원 금관보건진료소 소장. 2004년 인촌상(仁村賞) 공공봉사부문 수상자

    가을 공기가 상쾌한 아침, 온 동네가 아주 특별한 여행준비로 시끌시끌하다. 마을 어귀에는 낯익은 관광버스가 귀한 손님들을 맞을 채비를 끝내놓고 대기하고 있다.

    “여보! 수건은 챙겼나?” “영감! 속옷도 가져가야죠.”

    이날은 한 달마다 찾아오는 ‘65살 이상 노인, 목욕 가는 날’이다. 필자가 일하는 보건진료소에서 ‘특수사업’이란 이름으로 4년 전부터 거르지 않고 해온 일이다. 보건진료소 인근 대부분의 마을이 노인 인구가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가 된 지 오래이기 때문에 진료소가 보건사업만 할 수는 없었다. 보건진료소에 쌓인 기금을 주민들에게 되돌리고자 하는 복지 차원에서 구상한 일이 바로 이 특별한 ‘목욕여행’이다.

    초기에는 갖가지 우려가 제기됐다. 차량과 식사 지원, 그리고 안전문제 등. 어르신을 모셔야 하는 조바심이 앞섰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밀어붙인 결과 이제는 정착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는 오히려 어르신들이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 됐다.

    월 1회 노인들과 단체목욕 떠나 … 작은 여정 큰 기쁨



    모두들 목욕이 아닌 먼 곳으로 여행하는 들뜬 기분으로 흥분하게 마련이다. 차에 오르면 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호소하던 분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춤사위까지 선보인다. 통증이란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는 차 안의 음악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모양이다. 타령으로 시작하여 트로트, 그리고 구전노래까지 갖가지 노래 장르가 신명나게 펼쳐진다. 한 시간여의 행복한 여정을 마치면 깨끗한 물로 유명한 광천탕에 도착해 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던 할머니들도 이제는 아주 익숙한 모습으로 탕에 몸을 담근다. 어느새 나는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닦아주면서 넘어질까 조바심을 내곤 한다. 차림새가 특별하다 보니 이따금 ‘목욕 도우미’로 오인되어 곤혹스럽기도 하다.

    “어! 아줌마가 바뀌었네? 내 등도 좀 밀어줘요!”

    그러나 내가 뭐라고 변명할 새도 없이 할머니들께서 먼저 나서서 그분들을 나무라신다.

    “이분은 우리 귀한 소장님이세요.”

    이렇게 한 시간이 지난 뒤 귀가하는 차 안에 행복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어른들 모습을 바라보면, 비록 햇빛에 그을고 고생에 찌든 얼굴이지만 처녀적 피부로 돌아간 듯 훨씬 젊어진 모습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네 교회에서 정성스럽게 만들어온 김밥을 드시며, 어린 시절 소풍 갔던 아련한 추억이 생각난다면서 깔깔거리고 아이처럼 장난치신다. 이분들의 행복한 모습에서 나는 몇 배 더 행복함을 느낀다.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이런 작은 만족 가운데 있으리라. 이곳 노인들은 동네 목욕탕이란 게 없으니 1년 내내 목욕이래야 여름에나 마음놓고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계절에 상관없이 샤워하고 쉬 온천에 가는 사람들은 한 달에 한 번이라는 목욕이 시덥지 않겠지만 이분들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일이다.

    얼마 전부터는 은은한 향기가 나는 향수를 사서 목욕 뒤에 한 분 귓가에 뿌려드리니 새색시처럼 수줍어하셨지만 80살이 훨씬 넘은 할머니까지도 거절하시는 분이 없음을 보고 역시 “할머니도 여성이구나!”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23년 전 간호사로서 6개월의 교육을 마치고 부푼 꿈을 안고 찾아간 첫 근무지는 건물도 약품도 기본 서류도 없는, 허름한 마을회관 한쪽에 마련된 단칸방이었다. 비록 혼자서 일을 시작했지만 우리 보건진료원 1기생 40명은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음으로 긴 시간을 버텨왔다. 보건진료원들은 자녀교육을 위해, 때로는 좀더 나은 삶을 위해서 고향을 떠난 젊은이들을 대신해서 초고령 사회인 이곳에 남아 어르신들의 며느리나 딸처럼 일해왔다.

    그러기에 누리는 기쁨과 보람은 드리는 것 이상으로 풍성해진다. 물론 23년 전보다 물적으로 나아진 환경임이 틀림없지만 가야 할 길은 너무 멀기만 하다. 지금도 전국 방방곡곡의 오·벽지에는 사명감을 가진 1900여명의 보건진료원들의 땀 냄새가 가득하다.

    “너무나 예쁘다!”는 나의 칭찬에 어르신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행복해한다. 향수 한 방울이 그들의 일평생 드러내지 못하고 사셨던 여성성을 조금이나마 일깨웠다면 착각일까. 이 순간 주고받는 이 작은 행복이 오늘 하루 살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은 또 다른 행복이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것은 봉사가 아닌 그저 호흡하듯 자연스러운 내 삶의 일상일 뿐이다. 그러기에 드릴 수 있는 기쁨이 더 클 것이다. 성격 급하신 도토리 할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소장님! 다음에는 언제 또 올 수 있을까요?”

    꼭 오셔야죠. 다음에도 꼭 함께 오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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