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2

2004.09.16

시골 인심 덕에 情 듬뿍, 배는 빵빵

야영 허락한 폴란드 농가 주인 저녁식사에도 초대 … 천년고도 브로츠와프 중세 숨결에 매료

  • 글·사진=행창/ 승려 haengchang17@yahoo.co.kr

    입력2004-09-10 18: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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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67번 국도(E. Europe Road) 중앙에 10m 간격을 두고 설치돼 있는 체코-폴란드 국경검문소는 유럽연합(EU) 가맹국 사이의 국경이기 때문에 국경 특유의 긴장이나 살벌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나라의 관문이라기보다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같은 분위기다.

    옛 소련 제국의 붕괴와 더불어 유럽에 찾아온 봄기운에 EU 창설이라는 꽃바람이 평화의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풍경이 지금 유럽의 현주소다. 공동번영을 추구하며 펼치는 평화로운 풍경은 스쳐 지나가는 일개 여행자에게도 아름답게 비친다. 아울러 분단이란 현실을 안고 살아가는 한민족의 자손으로서는 그저 부럽기만 하다.

    여권을 한번 훑어보고는 짐 검사도 없이 통과다. 자전거 여행자에게 베푸는 배려로 어느 나라 국경에서나 주어지는 일종의 특혜다.

    폴란드에 입국하여 체코보다는 한산한 국도를 얼마간 달리자 중소도시 규모의 국경도시 쿠도바 즈드로이(Kudowa-Zdroj)가 보인다. 들러볼까 하는 마음도 있지만, 달리다 만나는 길가의 마을과 도시들을 다 들를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아침에 출발할 때 지형지도를 놓고 루트와 대충의 하루 거리를 산정해둔다. 가급적 하루 계획에 따라 달려야만 전체 일정에 큰 차질 없이 여행을 할 수 있다.

    자전거 여행은 일반적으로 상당히 자유로울 것으로 여겨진다. 여행의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하드웨어’적인 측면인 일정과 루트에 관해서 살펴보면 전혀 여유를 부릴 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버스나 기차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100km 거리를 자전거로는 10시간에서 12시간 달려야 겨우 도착할 수 있다. 타이어 펑크나 고장과 같은 돌발상황까지 감안하면 쉬고 싶고 돌아보고 싶은 내 욕심과는 절대 타협할 수가 없다.

    폴란드에서의 첫 목적지인 브로츠와프(Wroclaw)까지는 국경에서 160km 남짓 거리. 이 구간은 3분의 2 지점까지가 언덕과 구릉지대이기 때문에 운 좋으면 이틀에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여행자 숙소로 대학 기숙사 개방 … “침대 잠 얼마 만인가”

    국도변에 있는 시골 마을들의 풍경은 옆 나라 체코 마을에 비해 조금 한산하다는 것 외엔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역사를 통해 오랫동안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었고, 또 슬라브 계통이라는 동일민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임의적으로 그어진 구별선에 의해 두 나라가 전혀 다른 풍경을 펼친다면 그게 오히려 더 거북함을 느끼게 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폴란드에 접어들면서부터 체코와는 다른 뭔가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국토 면적이 넓은 나라이기 때문인지, 아기자기한 체코 사람들에 비해 조금은 투박하지만, 소박함과 온정이 많은 듯하다.

    15년 전쯤 도쿄 유학 시절,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옛 소련과 유럽을 여행하며 폴란드를 얼마간 여행한 적이 있다. 지금 기억으로는 당시엔 특별한 느낌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앞으로의 여행은 즐거울 것으로 기대된다.

    숲 속으로 이어진 국도에 그늘 터널이 드리워질 즈음, 국도에서 내려 지방도로로 접어들었다. 야영장이 없는 구간이기에 차량이 많은 국도 근처보다는 시골마을 부근에 야영할 곳을 찾는 게 안전하겠다는 생각에서다.

    여름철 긴 태양이 숲 사이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한 농가에 양해를 구하고는 정원 잔디밭에 텐트를 펼쳤다. 캠핑이 자유로운 스칸디나비아 3국(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을 제외한 나라들에서 야영할 경우에는 반드시 주변 사람들의 양해를 구하는 게 좋다. 양해를 얻은 뒤에는 경찰 문제도 없을 뿐더러, 현지의 불량배나 네오나치(극우주의자) 또는 인종차별 그룹들과 시비가 일어났을 때 신변보호를 받을 수 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은 어디서나 통한다. 양해를 구하는데 거절할 사람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거의 없다.

    텐트 치는 걸 끝내고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주인이 나와 집안으로 들어오라며 손짓한다. 하루 종일 땀에 전 육신에서 냄새가 풍기기에 사양을 하는데도, 결국 식탁으로 안내되었다. 의사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깊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간단한 러시아어를 섞어가며 따뜻한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는 텐트로 돌아왔다.

    폴란드는 지금 사회주의 획일경제체제에서 시장경제주의로 전환하고 있는 힘든 과정에 있지만, 아직 소박함과 인간미가 많이 남아 있다. 목숨 줄을 이어가기 위해 겨우겨우 만드는 내 음식과 달리, 누군가를 위해 만든 정성이 담긴 음식을 먹고 나니 마음까지 훈훈해지는 느낌이다.

    다음날 오전, 산맥 자락에 펼쳐진 숲 속을 빠져나와 끝도 없는 대평원의 황금물결 한가운데로 뻗어 있는 국도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분명 색상이 있는데도 단색만이 존재하는 듯한 단순 속의 극치를 만끽하면서 저녁노을 품에서 조용히 중세풍의 숨결을 띠고 있는 천년고도 브로츠와프에 입성했다.

    야영생활로 일주일을 이어온 탓인지 심신이 많이 피로해 대학 기숙사를 물어 찾았다. 유럽 대학의 경우, 방학기간 동안 학생 기숙사를 일반 숙소로 제공하는 곳이 많다. 일반 여행자 숙소에 비해 값이 쌀 뿐 아니라, 귀향하지 않고 공부하고 있는 현지 대학생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기에 여행 중에 자주 애용한다.

    오래간만에 이슬을 맞지 않는 지붕 아래서 매트리스가 아닌 침대에 육신을 누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피로가 저절로 풀리는 느낌이다. 문명의 혜택을 절감하는 동시에, 얼마나 내가 문명 속에 파묻힌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거리 곳곳엔 역사의 흔적 … 건축물 전시장 ‘방불’

    브로츠와프는 유명 도시만을 찍고 지나가는 한국 배낭족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중세 유럽풍의 도시 풍경이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돌아보는 여행 마니아 유럽 배낭족들은 이곳을 놓치지 않는다.

    지팡이를 짚고 옛 시가지 산책에 나섰다. 한 주 만에 플라스틱 깁스를 착용하지 않고서 나들이를 했다. 부러진 다리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한 지 반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기에, 자전거 주행을 할 때는 깁스를 반드시 부착하고 있다. 아물지 않은 뼈에 조금의 타격이라도 가해질 경우 재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새 단장을 한 서유럽 도시들에 비해, 비바람에 다소 색이 바랜 동유럽의 중세풍 건축물들은 세월과 삶의 흔적을 느끼게 해 좋다. 운하에 둘러싸인 중세 교회 건축물들을 돌아보고는 수백년의 전통이 남아 있는 대학 캠퍼스를 지나 옛 시가지 중앙에 있는 아름다운 시청사 앞 광장 벤치에 앉았다. 사물을 관찰하고 느끼는 데는 움직이는 것보다 허리를 낮추는 게 좋다.

    아무런 색상을 더하지 않고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83m 높이의 육중한 성 엘리자베스 성당 종탑이 그 높이만큼이나 긴 그늘을 늘어뜨릴 즈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폴란드의 관광명승지 중 하나인 파노라마 벽화미술관과 중세 종교미술품 소장으로 이름이 있는 국립박물관을 찾았다. 중세의 유럽문화사는 가톨릭 종교 문화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의 유명 박물관과 미술관들을 돌아보면 한눈에 느낄 수 있다. 이곳 박물관 또한 예외는 아니다.

    박물관에서 손이 닿을 거리에 있는 라츠라비체 파노라마(Raclawice Panorama)를 찾았다. 18세기 후반(1794년)에 막강한 제정러시아 군대를 맞아 벌어진 라츠라비체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해 전승 99주년 기념으로 19세기 말에 제작되어 꼭 100년 만인 1985년에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이다. 114m 둘레에 15m 높이로 제작된 벽화는, 원근감을 고려한 완벽한 공간처리 덕분에 마치 4차원에서의 실제 전투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환상적인 예술공간 그 자체였다. 폴란드를 여행할 계획을 세워놓은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곳 가운데 하나다.

    이번 여정의 루트를 선정할 때부터, 폴란드 남동부에 위치한 크라쿠프에 들를 것인지를 고민했다. 크라쿠프에서 60km 떨어진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지난 여행 때 이미 돌아본 곳이다. 250km 거리를 달려 또다시 찾아야만 할 만큼 15년 사이에 큰 변화가 생겼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서 희생된 수백만 유대인들의 영혼의 소리를 다시 한번 접해야 한다는 자기최면 때문에, 역사가 자리했던 현장에서 끊임없는 윤회의 곡선을 이어가는 진행형인 역사의 속성에 대해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고민했다.

    고요함이 깃들어 있는 브로츠와프에서 여독이 풀릴 때까지 며칠간 쉬고 싶다. 그러나 풀어야 할 과제를 남겨둔 채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만큼의 내공은 못 된다. 결국 숙제가 기다리는 아우슈비츠를 향해 출발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여정이란 안고 온 숙제를 풀기 위해 달리는 고행 속의 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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