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6

2004.08.05

“가게 차려놓고 물건을 안 판다고?”

기업들 ‘이미지숍’ 개설 잇따라 … 제품 홍보 통해 브랜드 이미지 높이고 고객 반응도 수집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4-07-29 19: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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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게 차려놓고 물건을 안 판다고?”

    ‘소니’의 베가 시어터 버스 내부. 판매는 하지 않고 체험만 제공하는 이동식 매장. 1억원어치의 전자제품이 실려 있다.

    가게에서 꼭 물건을 판다는 ‘편견’을 버려야 할 때다.

    물건보다 브랜드의 이미지를 팔고, 고객에게 상품이 아니라 경험을 제공하는 가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한 기업에서 생산하는 모든 물건을 판매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플래그숍’이기도 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판다는 점에서 ‘이미지숍’으로 불리기도 한다.

    5월 말 서울 압구정동에 문을 연 ㈜태평양의 ‘디 아모레 갤러리’.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압구정동의 혼잡함과 요란함과는 완전히 차단된 세계에 들어선 기분이 든다. 백화점 화장품 매장과도 닮지 않은 ‘디 아모레 갤러리’는 말 그대로 화장품과 거울의 전시장처럼 보인다.

    2층에는 ‘실험실’이 있다. 여러 종류의 플라스크와 정교한 저울, 그리고 약병들이 가득 차 있는 진짜 실험실이다. 이곳에 전문연구원이 나와 있어서 손님의 피부 색깔과 상태를 측정해 가장 잘 어울리는 색조 화장품을 만들어준다. 화장품을 구입하면서 ‘황금빛이 더 많이 났으면’이라든가 ‘더 화사한 핑크빛이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사람들이라면 반길 만한 곳이다.

    전자제품·담배·茶 등 종류도 다양



    3층에는 갤러리 겸 강의실이 있다. 아깝지만 전시가 없으면 ‘놀려둔다’. 인천공항 설계에 참여한 세계적 건축가 장 미셀 빌모트의 작품으로 화제가 되기도 한 ‘디 아모레 갤러리’는 가장 번잡한 지역에서 가장 조용한 공간으로 꼽힌다. 비싼 임대료 때문에 최소의 공간에서 최대의 물건을 보여주고 판매하려는 주변의 가게들과 180도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느낌을 준다.

    매니저 박소은씨는 “수익을 위한 가게는 아니고 이미지숍 겸 안테나숍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요구가 모두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져 신상품 개발에 반영된다”고 말한다.

    태평양은 세계적 명품 화장품 브랜드들이 국내에 진출한 이후 기업 이미지를 화장품 회사에서 전통과 문화, 웰빙(well-being) 기업으로 바꿔나가고 있다. 올 봄 리뉴얼한 제주의 박물관 ‘오설록’도 같은 맥락에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차 박물관인 ‘오설록’이 제주에서 좋은 반응을 얻자 태평양은 서울 명동에 차 전문점 ‘오설록 티하우스’를 오픈했는데, 늘 자리가 없을 정도다. 갤러리 기능을 갖춰 찻잔 등을 전시하며 커피는 팔지 않고 차로 만든 과자, 케이크에서 비누까지 차와 관련된 모든 상품을 판다. 하나뿐인 이 가게를 위해 모든 녹차 레서피를 새로 개발해냈다.

    ‘디 아모레 갤러리’나 ‘오설록’이 이미지숍이라면, 담배회사 BAT(브리티시 아메리카 토바코)의 ‘시가렛’은 신문이나 방송 광고가 금지된 상품을 직접 소비자에게 홍보하는 가게다. 일종의 초호화 ‘담배 가게’인 셈이다.
    “가게 차려놓고 물건을 안 판다고?”

    로얄코펜하겐이 외산 도자기 업체로 처음 독립된 플래그숍을 냈다.

    역시 서울 압구정동에 문을 연 ‘시가렛’은 언뜻 카페처럼 보인다. 화려한 붉은색 인테리어는 BAT의 인기 상품인 ‘던힐’을 상징하는데, 전면에 벽돌처럼 쌓인 담배 케이스나 쇼박스 안에 들어 있는 시가, 파이프 토바코, 끽연 액세서리 등은 상품이라기보다 디자인 작품처럼 보인다. 카페지만 커피나 음료를 팔지 않고 공짜로 제공한다. 다른 카페들과 달리 잘 차려입은 남성 손님들이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시가나 담배를 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담배 가게지만 비정기적으로 와인 테이스팅 행사나 파티가 열릴 예정이다.

    또 다른 담배회사 KT&G도 서울 신촌의 멀티플렉스 아트레온에 흡연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상상예찬’을 카피로 내걸고 있는 KT&G가 젊은층을 공략하고 있다면, BAT는 던힐의 주요 소비자인 강남의 트렌드세터를 타깃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가게 차려놓고 물건을 안 판다고?”

    BAT가 소비자들에게 직접 자사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운영하는 압구정동 카페 ‘시가렛’.

    한 담배회사 관계자는 “이전에 파티 오거나이저들을 동원해 모임에 담배를 제공하는 방식에 이어 이번에는 투명한 유리 공간에 담배 피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흡연 장면을 노출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동네의 ‘물’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한 디자인 한다’고 자부하는 전자회사 소니(SONY)의 체험매장 ‘소니스타일’도 대표적인 이미지 및 플래그숍이다. ‘소니스타일’은 소니의 모든 제품군을 소비자들이 직접 경험해보게 하는 공간으로 서울 코엑스에 있다. ‘소니’는 이와 함께 움직이는 ‘소니스타일’ 버스를 운영한다.

    “소니가 명품이란 인식은 있으나 일반 소비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워한다”는 최고 경영자의 지적에 따라 설치된 매장이다. 버스에선 물건을 팔지 않고 오로지 제품을 체험할 수 있다. ‘베가 시어터’로 불리는 이 버스는 최근 ‘소니 컬럼비아’가 제작한 ‘스파이더맨2’로 안팎을 바꿔 젊은층의 인기를 얻고 있다.

    백화점이나 대학 축제 등을 찾아다니는 ‘베가 시어터’에 들어선 손님들은 일단 ‘와!’ 하는 탄성을 빼놓지 않는다. 버스 한 대에 60인치 프로젝션 TV와 42인치 PDP 모니터, 디지털카메라 등 소니의 모든 상품들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 1000만원대로 구성된 완벽한 홈시어터의 기능을 체험할 수 있다. 또 전자기기와 푸른색 네온 인테리어 때문에 미래로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우연히 버스에 오른 대학생 이명석씨는 “마케팅 전략 때문에 제품 디자인이 더 멋있게 보이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며 감탄했다.

    “가게 차려놓고 물건을 안 판다고?”

    ‘디 아모레 갤러리’ 내부. 직접 제품을 조제해주기도 한다

    백화점 매장만을 운영하던 도자기 그릇과 테이블 웨어 브랜드 로얄코펜하겐도 수입 도자기 그릇 매장으로는 처음으로 6월1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 독립 플래그숍을 냈다. 229년 전에 문을 열어 덴마크 왕실 지원을 받아 성장한 로얄코펜하겐은 덴마크 디자이너 헨리 키첼의 디자인으로 플래그숍을 열었는데, 그릇 하나하나를 눈높이에서 감상하게 한 인테리어 방식이 돋보인다.

    ‘로얄코펜하겐’의 주순희 과장은 “로얄코펜하겐을 ‘고가의 도자기 그릇’이란 인식에서 ‘정통 도자기 제작방식을 거친 장인의 수공예품’으로 인식시켜 소비자층을 늘려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플래그숍에서 한 발 더 나아간 독특한 개념과 목적을 가진 이미지숍을 만드는 곳은 대개 다국적 기업이거나 해외브랜드와 경쟁이 심한 국내 기업들이다. 특이한 사실은 이 같은 이미지숍이나 안테나숍이 다른 나라의 마케팅 시장에서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해외엔 별로 없는 한국에서만의 마케팅

    그래서 마케팅 담당자들이 이 같은 가게들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하는 말이 “한국은 좀 다르다”라는 것이다.

    BAT의 ‘시가렛’도 런던 등 전 세계에서 단 한 두 곳에서만 운영되는 형태이며, 소니의 이동 매장은 일본에도 없고 오로지 한국에만 있다. 일본 소니 본사 회장이 “놀랍다”고 감탄했을 정도다. 또 ‘소니스타일’도 본사의 엄격한 기준에 따라 전 세계에 단 11개밖에 없는 매장이 한국에 있다.

    이를 경제 규모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마케팅 담당자들은 한국 소비자들의 취향이 이처럼 ‘물건을 팔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매장들을 만들어냈다고 입을 모은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제품 자체에 대한 상세한 설명보다 뭔가 특별한 것을 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상품에 관심을 가지죠. 아주 새롭다든가, 비싸다든가 해서 자신이 VIP 마케팅의 대상이 되는 것을 좋아하죠. 그래서 일단 입소문이 나고 유명세가 붙으면 판매가 폭발적으로 되니까, 기업으로선 당장 매출이 일어나지 않아도 앞을 보고 이런 이미지숍들을 내는 거죠. 그리고 반응이 오는 시간은 외국 시장보다 오히려 짧습니다.”

    “가게 차려놓고 물건을 안 판다고?”

    ‘오설록 티하우스’는 제주 차박물관의 컨셉트를 이용한 찻집 겸 갤러리.

    한 마케팅 담당자는 “한국은 마케팅이 가장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가장 쉬울 수도 있는 곳”이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인다. 하기야 아무리 기업 이미지가 중요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기업이라 해도, 금싸라기 땅에 그 넓은 공간을 ‘웰빙’ 공간으로 소비자에게 안겨주고, 카푸치노를 공짜로 주며, 판매가 없는 수억원짜리 버스를 굴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소비자들도 상품 가격을 계산할 때 이 같은 비용을 한번쯤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VIP 마케팅 자체에 비싼 값을 지불하는 까닭도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특징 때문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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