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8

2004.06.10

리콜 후진국 …‘리콜제’ 부터 리콜하라!

업체는 갈 때까지 버티고 리콜해도 '쉬쉬'...官ㆍ民도 인식 낮아 대처 소극적, 결함 정보 수집 걸음마 단계

  • 윤영호 기자/ 이나리 기자/ 최영철 기자

    입력2004-06-02 1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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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개월 된 딸을 둔 맞벌이 주부 김지현씨는 지난해 2월 아찔한 경험을 했다. 딸아이가 정수기의 온수 밸브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오른 팔뚝 전체에 3도 화상을 입은 것이다. 문제는 그 정수기가 ‘어린이 안전장치가 돼 있어 화상을 절대 입을 염려가 없다’는 현대홈쇼핑의 광고를 믿고 산 제품이었다는 점.

    “방송의 주 내용이 ‘아이가 있는 집에 꼭 필요한 제품’이라는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니 밸브를 뒤로 밀면 괜찮지만 앞으로 당기면 온수가 나오게 돼 있는 거였죠.”

    겨우 정신을 차린 김씨는 현대홈쇼핑에 항의전화를 했다. 반응은 썰렁했다. 제조사라도 알려달라고 했지만 역시 묵묵부답.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면서 분노가 치민 김씨는 한국소비자보호원(이하 소보원)의 문을 두드렸다. 그제야 홈쇼핑 쪽에서 연락이 왔다. “새 제품으로 교체해줄 테니 조용히 해달라”는 것이었다.

    제도 자체는 선진국 수준, 운영은 낙제점

    김씨가 적절한 보상과 전면 리콜을 요구하자 현대홈쇼핑은 무조건 모든 책임을 정수기 제조사에 미뤘다. “현대홈쇼핑의 광고와 공신력을 믿은 것”이라는 김씨의 주장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게다가 제조사가 보낸 손해사정인은 김씨를 “뭔가 뜯어내려 머리 쓰는 악덕 소비자”로 취급했다. 그러나 끝까지 전면 리콜을 요구하는 김씨 앞에서 결국 현대홈쇼핑은 두 손을 들고 리콜을 실시했다. 김씨가 또 다른 피해를 예방한 셈이다.



    리콜 후진국 …‘리콜제’  부터 리콜하라!

    홈쇼핑 TV를 통해 구매한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리콜은 소비자의 생명과 신체 및 재산상에 위해를 끼치거나 끼칠 우려가 있는 결함이 발견된 제품에 한한다. 이때 사업자 스스로, 또는 정부의 강제명령에 의해 소비자에게 제품의 결함 내용을 알리고, 수거·파기 및 수리·교환·환급 등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결함 제품으로 인한 피해 확산을 방지하는 것이 리콜이다. 여기서 말하는 재산상의 위해란 해당 제품의 문제로 다른 ‘재산’에 피해가 간 경우다. 그러므로 기능에 문제가 있는 단순 품질 결함은 리콜 대상이 아니다(상자기사 참조).

    국내의 리콜제도는 선진국 못지않은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자동차 안전 관련 리콜은 자동차관리법에, 자동차 배기가스 관련 리콜은 대기환경보전법에, 그리고 일반 상품에 대해서는 소비자보호법에 각각 규정돼 있다. 여기에 제품의 결함으로 인해 소비자가 신체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입은 경우 사업자의 과실 여부를 묻지 않고 소비자의 피해에 대해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제조물책임제도(PL)까지 도입돼 제품 결함에 대한 사후적인 보상제도까지 마련돼 있다.

    그러나 제도 운영은 후진국 수준이다. 소비자들의 권리의식이 아직 낮은 데다 기업 역시 리콜을 숨기거나 되도록 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재정경제부가 집계한 리콜 건수가 고작 74건에 그쳤다. 이 가운데 59건은 자동차 관련 리콜. 국내 기업들이 아직도 만들기만 하면 팔리던 과거 고속성장 시절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국내에서 리콜이 활성화되려면 어떤 기업이든 PL소송에서 크게 한번 당해야 한다는 얘기를 한다. 미국의 경우 제작 결함을 숨기다가는 PL소송에서 져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데, 국내 기업의 경우 이런 쓴맛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리콜에 소극적이라는 것. PL전문 하종선 변호사는 “국내에서도 PL소송에서 집단소송이 인정돼야 기업들이 PL소송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리콜을 열심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리콜 후진국 …‘리콜제’  부터 리콜하라!

    서울 삼성동에서 발생한 자동차 사고 현장. 리콜은 사고 원인 조사에서부터 시작된다.

    제품 결함에 대해 ‘소비자 탓’ 발뺌 일쑤

    제품 결함에 대해 국내 기업들은 일차적으로 무조건 소비자의 사용 잘못으로 몰아붙이고 본다. 심지어 PL소송을 당한 상품에 대해서도 여전히 판매가 이뤄지고 있다. 회사원 김종혁씨(29)는 지난해 CJ홈쇼핑에서 독일 D사가 중국 공장에서 주문자상표 부착방식(OEM)으로 생산한 전동칫솔을 샀다. 그런데 이 제품으로 이를 닦다 칫솔 머리의 금속에 앞니가 부딪혀 부서지는 부상을 했다. 당연히 리콜 대상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 내친김에 PL소송까지 제기했다.

    그러나 소송은 쉽지 않았다. “내게 과실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입유통사인 P사가 PL보험을 든 까닭에 상대편이 된 보험회사 측 변호사는 CJ홈쇼핑 사이트에서 피해 사례를 모으려 한 김씨를 ‘상습 악덕 소비자’라 공격하며 거세게 몰아붙였다. 지친 김씨는 결국 판사의 강제조정에 따라 보상금 350만원을 받고 소송을 마무리지었다. 이 전동칫솔은 지금도 인터넷 쇼핑몰에서 버젓이 팔리고 있다.

    화장품의 경우는 더하다. 최근 서울대병원 피부과는 50대 여자 환자에게서 의료법 위반으로 고소를 당했다. 국산 레티놀계 화장품인 I제품을 쓰다 얼굴 화상에 버금가는 피부염증을 앓고 있는 이 여성이 I제품이 불량임을 증명하는 진단서를 써주지 않는다며 주치의를 고소한 것. 이 여성은 해당 화장품이 자신의 얼굴에 피부질환을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병원 측은 간단한 패치 테스트만 하고 이상이 없다며 돌려보냈다.

    이 여성의 이런 행동은 리콜에 인색한 화장품회사의 태도 때문. 현재 화장품회사들은 문제 화장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품이나 리콜 요구에 해당 화장품의 결함 여부를 소비자들이 직접 밝힐 것을 요구하고 있다. 모발, 탈모 전문 피부과인 리치피부과 오준규 원장은 “심지어 소보원도 화장품에 의한 피해 사례를 제대로 모으지 않고, 화장품의 불량을 제보자에게 입증하라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약사들 리콜 요구 무시 … 식약청도 ‘나 몰라라’

    의약품은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약사들은 지난해 6월부터 건조시럽 형태로 공급되는 소아 항생제의 제품 포장 틈으로 공기가 들어가 항생제의 역가(力價)가 떨어지고, 인체 유·무해 여부가 가려지지 않은 완전히 다른 성분의 물질로 변질해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신고를 받은 약사회 산하 부정불량의약품신고센터는 사회적 파장을 우려해 공개를 자제하며 지난해 8월 이후 30여곳 제약사에 3년 유통기한의 제품에 대한 전면 리콜과 함께 시정을 요구했으나 제약사들은 이를 무시했다.

    약사회는 올 3월까지 리콜이 이루어지지 않자 이런 사실을 식약청에 고발했으나 식약청은 묵묵부답인 상황. 약사회 관계자는 “건조시럽에 물을 부으면 정상적으로는 색깔이 흰색으로 변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제품이 갈색으로 변하는 것을 일선 약국 대부분이 경험하고 있다”며 식약청에 대한 제약업체의 로비 의혹을 제기했다.

    국내 기업들은 리콜을 실시하더라도 이를 제대로 알리지도 않는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LG전자의 전기밥솥은 이미 지난해 7월 리콜에 들어간 제품이다. 그러나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아 같은 해 8월 밥솥이 폭발해 소비자가 부상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LG전자는 이후에도 ‘조용히’ 리콜을 진행하다 5월17일 또다시 밥솥 폭발사건이 일어나자 그제야 부랴부랴 5만원의 포상금을 지불하는 광고를 내는 등 수습에 나섰다. 삼성전자 전기밥솥의 일부 모델 또한 2001년 6월과 2003년 12월 리콜을 실시했으나 이를 아는 소비자들은 많지 않다.

    자동차 리콜 역시 마찬가지다. 자동차를 구입한 고객이 주소를 이전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기는 경우가 많아 자동차 회사가 우편으로 리콜을 통보해도 제대로 배달되지 않는다. 더욱이 건교부가 리콜을 발표할 때는 리콜 대상이 된 결함의 위험성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운전자들은 “바쁜데 리콜까지 받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

    그나마 이런 문제는 교통안전공단 산하 자동차성능시험연구소(이하 연구소)가 리콜 통지 시스템을 개발해 2005년 1월부터 전면 적용할 예정이어서 사정이 조금 나아질 것으로 보인다. 연구소는 차대번호 및 현재 소유자를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 개발을 최근 완료, 올 7월1일부터 시험 가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연구소 조사연구실 윤영식 책임연구원은 “앞으로 리콜 통지 비율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소비자보호법에는 사업자가 불특정다수에 판매된 제품의 리콜을 단행할 때는 ‘2개 이상의 중앙일간지 1면에서 5면 사이에 시정계획 통지문을 눈에 잘 띄게 공고하고, 제품이 유통됐던 백화점·대형 할인매장·`대형슈퍼·영업매장 등에도 안내문을 포스터 형태로 제작해 30일 넘게 게시하거나 사보 등에 공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해당사 대리점에서조차 어떤 제품이 리콜 대상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어요. 에어컨 리콜이 단행되는 와중에도 해당 모델을 버젓이 판매하는 식이죠. 밥솥 건만 해도 지난해 한국전자산업진흥회 PL상담센터에 접수된 PL사고 33건 중 전기밥솥으로 인한 화상 사고가 6건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기업과 관계 당국의 무사 안일한 대응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서울대 여정성 교수(소비자학)의 말이다.

    관련부처 공무원 아직은 기업 편? … 인식 전환 시급

    현행 리콜제도와 관련한 또 다른 문제는 특정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불만이나 피해 사례 등 제품 결함 징후에 대한 정보가 체계적으로 수집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연구소 윤영식 책임연구원은 “자동차의 경우 일부 안티사이트 등에서 피해 사례 등을 어느 정도 수집할 수 있지만 인터넷과 친하지 않은 트럭 운전기사들이나 대형 승용차 기사들의 사례는 수집하기 힘들다는 맹점이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은 기울이고 있다. 안전과 관련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피해 상담, 리콜 추진 등의 도움을 주기 위해 올 1월 소보원에 ‘소비자안전센터’를 설치하고 소비자 안전 관련 상담 및 정보를 제공하는 ‘소비자안전넷’(www.safe.cpb.or.kr)을 개설했다. 자동차의 경우는 건교부가 지난해 10월 자동차 제작결함 정보 전산망(www.car.go.kr)을 개설했다.

    그러나 안전센터와 이들 사이트의 존재를 아는 소비자는 아직 많지 않다. 당연히 이들 사이트가 활성화되지 않아 소비자 안전과 관련한 풍부한 정보가 수집되지 않고 있다.

    소비자문제 전문가인 한 국책기관 연구원은 “우리나라의 리콜은 법이 아닌 집행의 문제”라고 단언했다.

    “재정경제부, 산업자원부, 보건복지부, 건설교통부 등 관련 부처 공무원들의 인식 전환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리콜 관련 부처는 대부분 ‘기업진흥 부처’입니다. 그만큼 기업의 입장에 서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다 보니 리콜 등 소비자 보호를 일종의 기업규제 정책으로 여기는 측면이 없지 않아요. 리콜이야말로 기업과 소비자가 윈-윈 하는 길임을, 리콜 활성화가 기업 경쟁력 강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음을 이제라도 인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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