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우리문화 우리풍수 | 조선과 중국의 합작 풍수 서울 동관왕묘(동묘)

오죽했으면 ‘사당’을 세웠겠는가

  • 김두규/ 우석대 교수dgkim@core.woosuk.ac.kr

오죽했으면 ‘사당’을 세웠겠는가

오죽했으면 ‘사당’을 세웠겠는가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묘

서울 지하철 동대문역에서 내려 신설동 방향으로 조금 걸으면 오른쪽에 동묘가 있다. 이곳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장군(?~219년)을 모시는 사당(廟)으로 정식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다. 특이한 사실은 건축 양식이 우리 모양이 아닌 중국식이란 점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선 왕실이 거의 파탄 지경에 있을 때 지어진 사당으로, 조성 배경에 풍수적인 이유가 담겨 있다.

1592년 임진왜란에서 97년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긴 전쟁으로 인해 조선 전역이 황폐화되고 백성들은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조정대신들은 당파를 만들어 서로 싸우고 있었다. 당시 선조 임금으로서는 참으로 참담하고 답답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정유재란을 끝으로 일본군은 철수했지만, 조선을 구원하러 온 명나라 군대가 도처에 주둔하고 있었다. 조선을 구원하러 왔다고는 하지만 명나라 군대 역시 포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조정에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심지어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가 조선을 병탄(倂呑)할 계획이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아 왕실을 불안하게 했다.

선조 임금은 나라가 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명나라 군대를 따라 입국한 중국인 풍수 섭정국(葉靖國)과 다른 조선의 풍수들에게 한양 도성의 문제점을 살피게 했다. 계속되는 난리와 당쟁은 한양의 지기(地氣)가 빠져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 초부터 문제점으로 지적됐던 도성의 수구(水口·현재 동대문운동장 일대)가 다시 문제로 지적됐다.

오죽했으면 ‘사당’을 세웠겠는가

동묘 내부의 관우 장군상

풍수에서 말하는 수구란 좌청룡 우백호가 서로 마주하며 그 사이에 물이 빠져나가는 지점을 말한다. 한양의 경우 백호인 인왕산이 남산으로 이어지다가 그 마지막 산자락이 현재의 광희문 부근에서 끝나고, 다른 한편으로 청룡인 낙산은 현재 동대문 부근에서 그 산 능선이 끝난다. 따라서 한양의 수구는 광희문과 동대문 사이에 해당하는데, 상당히 넓게 벌어져 있는 셈이다.



그런 까닭에 조선 초부터 이곳에 가산(假山·인공산)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이 수구의 결점을 보완했다. 도성의 지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지만, 관리 부족과 오랜 전쟁으로 나무는 없어지고 가산은 허물어져 있었다.

수구가 허한 곳에는 인공산을 만들거나 나무를 심기도 하지만, 풍수책에선 또 다른 방법으로 사당(廟)이나 단(壇·제사나 치성을 드리는 곳)을 쌓는 것도 권하고 있다. 이에 선조 임금은 사당을 세울 자리를 중국인 풍수 섭정국과 조선인 풍수 박상의(朴尙義)에게 찾아보게 했다. 박상의는 현재 동묘가 있는 자리가 풍수지리서 ‘지리신법’에도 부합한다고 했고, 섭정국 역시 이 자리가 적절하다고 주장해 현재의 자리로 사당 터가 정해졌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관우 장군을 모신 사당이었을까? 중국 장수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장군인데, 당시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파병돼 전투를 치를 때 관우가 꿈에 나타나 도움을 준 일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조정은 한양의 지기가 빠지는 곳에 관왕묘를 세워 풍수적으로 도성의 지기를 온전하게 하고, 조선에 주둔하던 명나라 군대를 달래고자 했다. 당시 이곳을 관우 장군 사당터로 정했다고 하자 명나라 장수들이 와서 보고 흡족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명나라에 보고하니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도 이를 기쁘게 여겨 소요 비용과 친필 현판을 보내왔다. 그래서 사당은 1599년 착공돼 1601년에 완공됐다. 터잡기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 조선과 중국이 합작한 작품이다. 동묘의 건축이 중국의 사당 모습을 띤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다.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의 군대가 약소국에 주둔할 때 피해자는 약소국 백성이다. 당시 명나라 군대의 횡포가 오죽 심했으면 남의 나라 장군의 사당까지 지어서 잘 봐달라고 아첨했을까. 동묘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직후 초라한 조선 왕조의 눈물겨운 ‘풍수 외교’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주간동아 437호 (p103~103)

김두규/ 우석대 교수dgkim@core.woosuk.ac.kr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345

제 1345호

2022.06.24

우주를 향해 쏘아 올린 무결점의 완벽한 꿈 ‘누리호’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