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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업 죽이는 ‘건강기능식품법’

효소·과일즙 등 생산에도 적정 시설·인력 갖춰야 … 유기농 가내수공업 대부분 문닫을 판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유기농업 죽이는 ‘건강기능식품법’

유기농업 죽이는 ‘건강기능식품법’

친환경농업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면서 농가를 찾는 주부들도 늘고 있다

경북 의성군에서 14대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모씨는 자신의 표현대로 “칠순의 부모와 부인, 1남1녀의 자식 등 3대가 함께 살면서 마늘과 깨, 고추 등을 재배하는 보통 농촌의 농민”이다. 그런데 김씨는 보통 농민이라고 하기에는 꽤 유명한 편이다. 도시의 주부들이나 관계 공무원, 대학교수, 언론사 기자 등이 꾸준히 그의 농가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많을 때는 1년에 10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그가 이처럼 ‘유명인사’가 된 계기는 1978년 아버지가 사과나무에 농약을 뿌리다가 농약중독으로 쓰러지고 나서 유기농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당시 ‘살려고 농사짓는데 이러다간 그냥 죽겠다’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도달한 결론이 바로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고 자연퇴비만으로 농사를 짓는 유기농업이었다. 물론 초기에는 잡초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 등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그의 유기농업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직접 재배한 채소와 과일을 재료로 가족끼리 ‘가내공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이 재배한 모과 사과 당근 등 30여 가지의 유기농산물에서 삼투압을 이용해 체액을 추출, 이를 2년여 동안 전통 옹기에 저장해 발효시킨 ‘자연음료’를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 유기농산물 재배에 머물지 않고 이를 가공해 건강기능식품을 생산함으로써 부가가치를 창출, 우리 농업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시설비 수억원 어떻게 감당하나”

그러나 김씨는 이 자연음료를 8월 이후에는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하게 돼 애를 태우고 있다. 올 1월31일 공포된 건강기능식품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 따르면 김씨가 생산하는 자연음료는 건강기능식품의 하나인 식물추출물 발효제품으로 분류돼 7월 말까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이하 식약청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김씨는 “식약청장의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법령에서 정한 시설을 갖춰야 하는데, 이에 필요한 수억원을 감당할 만한 농가가 얼마나 되겠느냐”며 한숨을 쉬었다.



속을 끓이고 있는 것은 김씨뿐이 아니다. 그동안 유기농업을 하면서 효소 혹은 과일즙을 만들어 판매하던 농가들이 이 법에 따라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유기농업 농가들은 “헌법과 농업 관련 법률에서 정한 농가소득의 증진, 농산물 가공산업 육성이라는 취지를 외면하고 건강기능식품과 관련한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악법”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환경농업단체연합회는 17대 국회에서 이 법 개정운동을 펼 계획이다.

유기농업 죽이는 ‘건강기능식품법’

한 할인점에 전시된 친환경 농산물.

김씨처럼 유기농산물로 건강기능식품을 생산 판매한 농가는 지금까지는 시·군·구청장에게 품목제조 신고만 하면 됐다. 그러나 2002년 8월26일 건강기능식품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면서 사정이 변한 것. 이 법에 따르면 건강기능식품을 제조 판매하려면 올 7월 말일까지 이 법이 정한 시설을 갖추고 품질관리인을 고용해야 한다. 그러나 영세한 유기농업 농가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김씨처럼 이 법이 공포된 사실을 알고 있는 유기농업 농가들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환경농업단체연합 관계자는 “환경농업단체연합 차원에서도 올 4월 무렵에야 뒤늦게 이 법이 2년 전 공포됐고,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됐다”면서 “농민이 사회적 약자이다 보니 이 법 제정 과정에서도 이해를 대변하지 못했는데, 그나마 이제라도 발견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말했다.

현재 식약청장에게 건강기능식품 제조 판매를 위해 허가를 신청한 농가는 70여곳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건강기능식품을 제조 판매하고 있는 곳이 전국에 700여곳 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유기농업 농가들은 “현재 허가신청을 한 70여곳을 제외한 나머지 630곳 가운데 7월 말까지 식약청장의 허가를 받을 수 있는 곳은 20%에도 훨씬 못 미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유기농업 죽이는 ‘건강기능식품법’

한 기업이 알로에를 재료로 한 건강기능식품 전시회를 열면서 알로에 발 마사지를 서비스해주고 있다.

물론 입법 취지만을 본다면 이 법의 제정은 오히려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건강기능식품의 안전성 확보 및 품질향상과 건전한 유통판매를 도모함으로써 국민의 건강을 증진하고 소비자를 보호한다는 게 이 법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식약청 건강기능식품과 관계자는 “제정 당시 허위 과대광고로 인해 소비자가 피해를 보는 등 사회문제가 됐던 상황도 이 법 제정을 서두르게 한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법조계에서도 건강기능식품을 관리할 법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미국은 이미 1990년대 후반 건강기능식품에 관한 법률 드쉐(Dshea)법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강기능식품은 식품과 의약품의 중간단계인데, 의약품 관련 법으로 건강기능식품을 규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게 당시 입법논리였고, 이후 미국의 건강기능식품은 세계시장을 석권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건강기능식품은 미국의 드쉐법과 달리 많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이 법으로 건강기능식품의 안정성이 확보된다는 보장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유기농업 농가만 죽이게 된다는 것. 환경농업단체연합 고문변호인인 송기호 변호사는 “건강기능식품을 모법에 정한 드쉐법과 달리 식약청장이 건강기능식품의 범위와 기준을 고시하도록 함으로써 너무 많은 식품을 건강기능식품으로 분류해놓아 일정한 시설을 갖출 수 없는 유기농업 농가들로서는 앞으로 만들어 팔 만한 건강기능식품이 없어지게 됐다”고 주장했다. 현재 건강기능식품으로 고시된 것은 알로에 제품, 버섯제품 등 32개 품목.

식약청 측 “공장에 위탁 제조하라”?

이에 대해 식약청 건강기능식품과 관계자는 “유기농업 농가들이 기존에 제조 판매해오던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고 말했다. 가령 뼈를 튼튼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진 홍화씨의 판매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홍화씨의 효능이 현재로선 전래의 속설일 뿐이고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건강기능식품’이라고 표기해서 판매하면 이 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또 “유기농업 농가들이 제각각 이 법이 요구하는 설비를 갖추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말했다. 가령 유기농업 농가들이 조합을 만든 다음 이 법이 요구한 설비를 갖추고 있는 공장에 위탁해 자신들이 재배한 유기농산물을 재료로 건강기능식품을 제조하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법상 건강기능식품 제조업자가 반드시 두도록 돼 있는 품질관리인도 동일 또는 인접 시·군·구의 영업소와 공동으로 선임해도 되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유기농업 농가들은 현실을 모르는 얘기라고 반박한다. 유기농업 농가들의 위탁을 받아 건강기능식품을 생산할 공장은 농촌지역에 들어서야 하는데 누가 여기에 투자하겠느냐는 것이다. 또 품질관리인도 공동으로 선임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 법 시행령이 정한 품질관리인의 요건에 맞는 사람 중 누가 농촌에 있는 건강기능식품 영업소에 내려와 취직하겠느냐고 반문한다.

또 현행 법령으로는 기존에 건강기능식품을 제조해온 유기농업 농민들이 품질관리인이 되기 힘들다는 점도 문제다. 현행 법령에 따르면 대학에서 식품관련 학과를 졸업하고 3년 이상 건강기능식품 제조 업무에 종사한 자도 품질관리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건강기능식품을 제조해온 유기농업 농민이 품질관리인이 되려면 대학만 졸업하면 되는 게 아니고 다시 3년 넘게 건강기능식품 제조에 종사해야 자격증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이 법의 제정 목적대로 식품안전성은 양보할 수 없는 목표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송기호 변호사는 “대량생산되고 있는 햄버거에 대한 안전성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을 보면 농가에서 알로에를 직접 재배해 소규모로 즙을 짜내 먹는 것보다 알로에를 대규모로 재배해 일정한 시설을 갖춘 공장에서 대량으로 즙을 짜내 먹는 방법이 반드시 더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면서 “그런데도 이 법이 결과적으로 유기농업 농가들을 고사시킬 수 있고, 그것은 한국농업의 싹을 자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주간동아 437호 (p50~52)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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