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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인, 미국 시민권 입맞춤하나

미의회 법안 상정 한국 내 5천여명 부푼 꿈 … ‘펄벅재단’에 증명서 발급 요청 쇄도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혼혈인, 미국 시민권 입맞춤하나

혼혈인, 미국 시민권 입맞춤하나

1995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 시민권 취득 선서를 하고 있는 한국계 혼혈인들.

흑인 외모의 혼혈인 K씨(43)는 미군부대가 있는 경기 동두천에 살고 있다. 비슷한 또래 혼혈인들처럼 그가 살아온 한평생 역시 차별과 가난으로 점철돼왔다. 미군 클럽에서 악기 연주를 하며 생계를 꾸리는 K씨의 인생 목표는 오직 ‘아버지의 나라’ 미국에 정착하는 것.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 형무소에 드나든 전력이 있는 데다 재정보증을 설 후원자마저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 그에게 실낱 같은 희망이 생겼다.

‘미국계 아시아인 시민권 부여법안(H.R.3987)’이 레인 에반스와 짐 모란, 두 명의 민주당 연방하원의원에 의해 3월17일 미의회에 상정된 것. 이 사실은 4월 초 법안 상정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전종준 이민전문 변호사(46)와 송길원 목사(47)에 의해 국내에 전해졌다.

이 법안은 ‘혼혈인 이민법’(1982년)에의 적용 대상인 모든 아시아계 혼혈인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혼혈인 이민법에는 1950년 12월31일부터 1982년 10월22일 사이에 미군이 주둔한 한국 베트남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에서 미국인 아버지에 의해 출생한 혼혈인들에게 미국 시민권자가 5년간 재정보증을 해준다는 전제 아래 이민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이 있다.

단순한 이민을 넘어 시민권이 부여될지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내 혼혈아 문제를 전담해온 펄벅재단에는 이 재단에서 발급하는 ‘혼혈인 증명서’를 받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했다. 미군 출신인 아버지를 찾지 못한 혼혈인들이 펄벅재단이 오래 전부터 관리해온 자신들의 자료를 통해 미국인 아버지를 입증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

1982년 ‘혼혈인 이민법’안 통과 후 20여년간 5000여명의 혼혈인들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국에서 받아온 지긋지긋한 인종차별에 항거해 탈출한 셈이다. 아직도 5000명 가량의 혼혈인들이 이 땅에 살고 있지만 그들 대부분의 소망은 K씨와 마찬가지로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것. 그렇다면 미국으로 향했던 혼혈인들은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을까.



‘가난과 차별’ 시민권 획득 어려움

미국 내 한국혼혈인협회장인 오흥주씨(49)는 “미국 내에서도 혼혈인 대부분이 가난과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무학(無學)에 가까울 정도로 배우지 못한 데다 영어조차 서툴러 타향에서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미국 내 한인사회에 만연한 혼혈인 따돌리기 정서도 이들의 처지를 어렵게 만들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미국이 한국계 혼혈인들에게 영주권만 제공했지 시민권을 쉽게 부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미군에 의한 아시아계 혼혈인을 아메라시안(Amerasian)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는 대개 베트남 출신을 지칭한다. 유사한 전쟁을 치른 나라지만 미국에서는 한국 출신과 베트남 출신에 대한 일종의 차별이 존재했다. 베트남계 혼혈인들이 좀 쉽게 시민권을 획득해 고국에 있는 생모(生母)와 형제를 초청하는 데 비해, 한국 라오스 등 소수계 혼혈인들은 가족을 불러들일 수 없었다.

혼혈인, 미국 시민권 입맞춤하나

소설 '대지'의 작가 펄벅(가운데)은 1973년 사망할 때까지 1년에 한두 차례씩 경기도 부천 소사희망원`을 방문해 혼혈아동들을 돌봤다. 펄벅재단을 통해 자라난 혼혈아동들은 대부분 미국으로 터전을 옮겼다.

이런 차별은 1988년에 제정된 ‘아시아계 혼혈인 이민법안’에 근거해 1962~76년에 베트남에서 태어난 혼혈인에 한해 미국 입국을 더욱 손쉽게 해준 데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2003년 10월에는 조 로프그렌 미 연방하원의원이 베트남계 혼혈인에게 시민권을 자동 부여하는 법안을 제안한 바 있다. 결국 이번에 에반스 의원 등이 제안한 법안은 베트남계 혼혈인에게 국한된 특권을 폭넓게 수정한 셈이다.

현재 미국 내 한인들은 이 법안 통과를 위해 다각도의 로비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미군에 의한 아시아인의 상처를 보듬어 안는다는 점에서 미국 내 여론도 긍정적인 편이다. 한국과 베트남 등 현지에서 살고 있는 혼혈인들에 대한 인권개선 프로그램도 계획하고 있다.

물론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펄벅재단 한국지부 이지영 팀장은 “이 법이 통과된다 하더라도 미국 영주권을 지닌 혼혈인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에 미국 땅을 밟을 수조차 없는 소외된 혼혈인들과 1982년 이후 태어난 청소년 혼혈인들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국내 혼혈인들, 특히 기지촌 출신들은 정상적인 직업은커녕 성공한 가정을 이룬 사람조차 드문 게 현실이다. 펄벅재단 한국지부가 4년 전 기지촌 출신 혼혈인 67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혼혈 성인 56%가 미취업에 가까웠고, 33%는 단순노무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10명 중 9명이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셈이다.

미의회에서 이 법안이 통과될 수 있을지는 현재로서 미지수지만, 미국 시민권 자동부여 운동이 미국 내 혼혈인은 물론 한국 내 혼혈인들의 위상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민·형사상 큰 문제가 없는 혼혈인이라면 쉽게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인들 법안 통과 다각도 로비

이 법안 통과를 위해 미국에서 서명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송길원 목사는 “차별을 내포하고 있는 ‘혼혈아’란 이름부터 ‘다문화 가정 2세’로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대한민국이 혼혈아를 고아 취급하며 국방의 의무조차 부여하지 않는 점은 국민으로 대접하기를 거부한 조치”라며 이의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일각에서는 아직도 혼혈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자성과 함께 베트남에 살고 있는 ‘라이따이한’과 최근 동남아시아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코시안’ 문제에 더욱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주간동아 2004.04.29 432호 (p64~65)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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