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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진보, 국회 벽을 허물다

의원수 39명 “우리는 무적 女黨”

여성 당선자 사상 최다 … ‘여성문제 해결’ 위해선 여야 떠나 한목소리 낼 듯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의원수 39명 “우리는 무적 女黨”

의원수 39명  “우리는 무적 女黨”

3월8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

”국회에서 활동하며 말 못할 고통을 많이 겪었다. 여러 사안에 대해 ‘여성 의원도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다 ‘또 네가 하고 싶은 거냐’는 오해며 비아냥에 시달리기도 했다.”(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서울 동대문갑)

“무슨 주장이라도 펼라치면 ‘3선이나 되면 말하라’고 노골적으로 면박을 주는 남성 의원들이 있었다. 일반 사회의 남녀평등지수가 60% 수준이라면, 국회는 20%밖에 안 됐다.”(한나라당 김영선 의원·경기 고양 일산을)

17대 총선에서 재선, 3선 고지에 오른 두 여성의원의 말이다. 16대 국회의원 중 겨우 5.9%. 절대 소수의 설움을 온 몸으로 겪어야 했던 이들에게 17대 총선은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여성 당선자 39명. 전체 의원의 13%에 해당하는 수다.

여성의원 세계 평균 15.8%에는 아직 못 미쳐

지역구 출마 여성 후보들의 선전과 비례대표 여성 50% 할당제에 힘입은 이 결과를 놓고, 요즘 정계와 언론에서는 “엄청난 일이다” “여의도에 여풍이 불게 됐다” “정쟁을 일삼던 우리 정치도 큰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등의 논평이 쏟아지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우리 여성 정치인들이 처한 현실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만 해석한 결과일 수도 있다. 정말 우리 국회에 여성의원 수는 ‘이 정도면 되는’ 걸까. 또 39명의 여성 의원들은 우리 정치에 분명한 새바람을 몰고 올 수 있을까.



여성 정치세력화는 지난해부터 여성계의 핵심 이슈였다. ‘17대 총선을 위한 여성연대’와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이하 맑은넷)를 두 축 삼아 발빠른 행보를 보였다. 맑은넷은 ‘17대 총선 당선운동 대상 여성’ 102명의 명단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중 46명이 각 당의 지역구 및 비례대표 공천을 받았으며, 그중 21명이 당선되는 큰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조현옥 대표는 “일각에선 ‘이제 해줄 만큼 해준 것 아니냐’ 식의 얘기를 하나 본데 아직 아니다. ‘여성 대거 등장’이니 하는 말도 경계해야 한다. 세계 평균인 15.8%에 못 미칠 뿐 아니라, 지역구 공천 비율도 너무 낮다. 유난히 가부장적인 우리 정치문화를 뿌리부터 바꾸기 위해서는 30%는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터뷰에 응한 여성 당선자 12명의 공통된 의견이기도 했다.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이제 ‘양’이 아니라 ‘질’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대표는 “지금까진 수가 중요했기에 그 이념적 성향이나 정치 행보에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 여성 정치세력화라는 대의에만 동의한다면 좌파건 보수건 서로 가리지 않고 연대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를 거다. 특히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무엇보다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절감했다. 이제 여성계의 새 화두는 ‘어떤 정치 상황에서의 여성 정치세력화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많은 여성 당선자들이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이하 민노당) 소속 의원들의 문제의식이 컸다. 우리당 홍미영 비례대표 당선자는 “여성이라고 다 개혁적인가. 남성 중심의 잘못된 정치 문화를 답습하고 심지어는 그에 편입해 한몫 챙기려는 여성도 분명 존재한다. 또한 진보적 남성보다 더 가부장적인 여성 의원도 없지 않다. 싸움은 뒤에서 남성들이 다 만들면서, 나서는 건 여성들을 시킨다면 이 또한 우려할 일 아닌가. 생각 다른 여성 의원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가 숙제”라고 말했다.

의원수 39명  “우리는 무적 女黨”
의원수 39명  “우리는 무적 女黨”
우리당 김현미 비례대표 당선자 역시 “나는 총선 전 논란이 됐던 여성 광역선거구제를 반대했다. 여성 의원 수가 많아지는 것보다는 전체적으로 사회 개혁과 발전, 진보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정말 괜찮은 여성, 지역구에서 열심히 뛰어온 여성들이 더 많이 당선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개혁 입법에 반대하는 여성의원이라면 바지 입다 치마로 바뀌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여성문제 해결에 있어서만큼은 힘을 합칠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나라당 이혜훈 당선자(서울 서초갑)는 “선거운동을 하며 심지어 당원들한테서까지 ‘서초구를 뭘로 보고 여자가 나섰느냐’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뿐 아니라 살아오면서 (여성이라) 많은 차별을 받아왔다고 생각한다. 양성평등 실현은 내가 정치에 나서기로 한 큰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전재희 의원(경기 광명을) 또한 “물론 나는 여성이기 이전에 국회의원이다. 그러나 또한 여성이기도 하다. 여성문제에서 당내 여론과 내 의견이 다르면 이를 바로잡기 위해 애쓸 것이다. 그럼에도 당론이 달리 간다면 나는 내 양심과 생각을 따를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여성 당선자들은 호주제에 있어서만큼은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김희정 당선자(부산 연제)는 “친양자제도, 호주승계제도의 즉각 폐지를 찬성한다. 그러나 ‘폐지’라는 강한 용어의 내용을 잘 모르는 유권자들에게 무조건적인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목표는 전면 폐지지만 일단은 500여개의 관련 법규를 단계별로 야금야금 바꿔나가는 게 더 실리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당선자 중 몇 사람은 진보적이라는 민노당이 당파성을 앞세우다 오히려 여성 문제를 등한시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민노당 심상정 비례대표 당선자는 “그동안 우리 노조운동이 일정 정도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여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민노당 창당 이전의 일이다. 지금 민노당은 그 어떤 정당보다 철저히 양성평등에 입각한 정책을 입안하고 또 안으로부터 실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당이 공약한 ‘가내노동자보호법’은 식당 등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다수 여성 노동자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여풍이 한국 정치를 바꿀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한나라당 전재희 의원은 “정치를 시작한 후 가장 어려웠던 것이 남성 중심의 계파정치, 계보정치였다. 이제 공식 루트가 중시되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만큼 여성 의원들의 활약도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당 홍미영 당선자는 “계파정치는 우리 정계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점 중 하나였다. 핵심은 공천권과 현금 동원력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다 깨져나가고 있지 않나. 여성들이 경쟁할 만한 환경이 어느 정도 조성됐다고 봐도 좋을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신중론을 펴는 이도 있다. “우리 정계는 실력 위주, 정규 플레이 중심이 아니고 연고 위주, 사적 소근거림이 중시되는 공간이다. 여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는 아직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여성 국회의원이 많아진 만큼 그 극복 또한 훨씬 빨라지리라 믿는다. 39명이 힘을 합하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한나라당 김영선 의원의 말이다.

의원수 39명  “우리는 무적 女黨”
의원수 39명  “우리는 무적 女黨”

1월 8일 여성 정치세력화를 위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 회원들.

일부 당선자는 “여성이 부드럽고 타협적이라는 것은 선입견”이라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한 우리당 당선자는 “성공한 여성들은 비타협적이다. 적당히 넘어가는 식이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다. 오히려 ‘타협’은 힘의 향배에 민감한 남성들이 더 잘한다. 여성 의원들은 부정적 의미의 타협이 아닌, 논리와 합리를 중심에 세운 설득과 균형감각을 통해 국회를 바꿔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당 조배숙 당선자(전북 익산을)는 “여성 의원들이 피스 메이커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 여성은 그렇게 교육받아왔으며 실제로 화해자의 역할에 익숙하다. 여성으로부터 우리 정치에 화합, 상생의 기운이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여성주의의 생래적 진보성에 기반한 정치개혁을 일궈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 정치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서도 탁월한 역량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였다. 한나라당 김희정 당선자는 “먼저 국회 상임위원회 구성부터 신경 써야 한다. 특정 상임위에 여성이 몰리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골고루 퍼져 각기 제 분야에서 여성적 관점과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당 김희선 의원은 “궁극적으로 지역구 여성 당선자 수가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당에서도 힘을 가질 수 있다. 또 지도력에 여성적 지도력, 남성적 지도력이 따로 있나. 여성이고 남성이고 양성적 리더십을 고루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미래를 이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7대 국회 여성의원 39명. 이제 출발점에 선 이들의 책임은 막중하다. 앞으로 4년간 이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우리 정치의 모습, 우리 여성의 지위는 몰라보게 달라질 수도 있고 오히려 답보할 수도 있다. “여자 많이 뽑아놨더니 한 일이 뭐냐는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느냐”며 남다른 결의를 밝히던 한 여성 당선자의 당찬 눈빛에 기대를 건다.





주간동아 2004.04.29 432호 (p22~24)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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