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7

2004.03.25

말, 탄핵 그리고 국민

  • 이주향 / 수원대 인문대학 교수

    입력2004-03-19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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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탄핵  그리고  국민
    사람이 선한가, 악한가? 어려운 문제고 종지부를 찍을 수 없는 문제지만 분명한 건, 착한 일을 하면서도 착한 마음이 아닐 때가 있고 악을 쓰면서도 악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선하지 않아 활력이 있는 거고, 악하지 않아 희망이 있는 거라고. 그런데 활력이 있다 못해 어지럽기까지 한 탄핵정국에서 또 배운 게 있다. 분노인지 절망인지 희망인지, 분간이 안 되는 정서가 있구나, 하는 것을.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내치기 위해 이른바 ‘경호권’까지 발동해서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는 국회는 ‘테러’ 국회가 아닐까. 그런데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것은 말을 절제할 줄 모르는 노무현 대통령이 자초한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고.

    노대통령의 말에 분명히 자극적인 부분이 있다. 옳다고 생각되면 상대에게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상대는 여지없이 악이 된다는 점! 그런 소신이 긍정적으로 나타날 때는 돌파력이 되지만, 부정적으로 나타날 때는 포용력 부재가 된다.

    열린우리당 지지율 상승·촛불 항거는 무엇을 의미하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도 하고,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도 하니까 말은 그냥 말이 아니다. 아마 노대통령은 지금 돌이킬 수 없는 말의 위력을 배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말의 힘을 옛 성현들은 이렇게 말했다. ‘한번 뱉은 말은 화살과 같으니 가벼이 말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항우와 같은 힘이 있어도 뽑기 어렵다.’



    쉽게 말하고 쉽게 갈등하고 쉽게 상처받는 요즘, 절감하는 말이다. 우리는 또 얼마나 그 말에 쉽게 걸려 넘어지는가. 대통령의 말에 걸려 넘어진 탄핵국회처럼. 대통령의 말이 탄핵사유라니, 그것이 국민의 대표들이 모여 할 말인가.

    탄핵이 가결된 후 최병렬 대표가 말했다. “승리했지만 기쁘지 않습니다.” 그렇게 탄핵을 가결시키고자 했던 그이건만 왜 기쁘지 않았을까. 혹시 그는 그날부터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가는 여론을 미리 내다본 것일까. 눈앞 승리에 연연하느라 더 크고 귀한 것을 잃어버렸음을. 분노가 앞을 가린 상태에서 가혹하게 휘두른 힘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치는 법인데, 이 눈앞 승리 이후에 찾아오는 참담한 결과를 그들은 어떻게 소화해낼까. 그들은 정말 아픈 만큼 성숙해질까.

    모든 신문의 1면이 ‘노대통령 탄핵안 가결 권한정지’라는 활자로 뜨거웠던 그날, 야릇하게도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마치 널뛰기라도 하듯 훌쩍 올라간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서울에서 부산에서 광주에서 대전에서, 일제히 켜진 저 항거의 촛불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하루 사이에 쑥 올라간 열린우리당에 대한 돌연한 지지율이 마음에서부터 열린우리당의 정책적 방향을 지지하거나 노대통령의 기자회견 태도를 지지한 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분노인지 절망인지 희망인지, 분간이 안 되는 바로 그 정서가 결집되어 나타난 폭발이다. 국민들의 주권선언이라고 해야만 하는 바로 그것! 세상에,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국민이 납득되지 않는 이유로 끌어내리려 하다니!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한테서 나온다는 당연한 입장을 이렇듯 부지불식간에 선언해야 하는 국민의 당혹감을 모르고 어떻게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 민주당 조순형 대표, 자민련 김종필 총재는 ‘국정안정’에 협력하겠다고 했다. 그들이 말하는 국정안정이란 도대체 뭘까. 도처에서 날마다 열리고 있는 촛불시위를 공권력으로 막아달라는 것인가. 1987년 6월항쟁을 방불케 하는 군중집회를 방치하고 있다고 행정자치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의 불신임을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는 걸 보면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주권재민의 헌법정신을.

    지금은 낡은 주류와 새로운 주류의 교체기인지도 모르겠다. 교체기의 갈등이 탄핵으로 나타난 것인지도. 낡은 주류가 선택한 ‘탄핵’을 국민들이 아니라고 촛불을 켠 것이 아닐까. 역사의 주체가 바뀌는 교체기에는 언제나 혼란이 있었다. 단기적으로는 혼란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시스템의 구축을 위한 진통일 테니까 이 진통을 잘 견뎌야 하지 않을까.

    이제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은 신중하고도 신속하게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헌재가 탄핵국회처럼 분노의 마음으로가 아니라 ‘신중하게’ 생각하고, 매일매일 촛불을 들어야 하는 국민의 마음을 읽어 ‘신속하게’ 결정하리라 믿는다. 헌재야말로 헌법정신을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곳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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