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7

2004.03.25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다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4-03-19 11: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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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다
    ”그는 운명으로부터, 그리고 신으로부터 최대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사’에서 이탈리아의 부호 메디치가(家)의 로렌초 메디치를 묘사한 말이다.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이에게 바친 헌사였다.

    메디치 가문이 약 200년 동안 부를 기반으로 유럽을 호령했지만 국내에는 300년 동안 부를 지켜온 가문이 있다. 경주의 최 부잣집이다. 1600년대 최치원의 17세손인 최진립과 그 아들 동량이 가문을 일으킨 뒤부터 최준이 광복 직후 모든 재산을 바쳐 대학을 설립할 때까지 10대 300년의 세월 동안 부가 끊기지 않았다.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이 가문도 운명으로부터, 신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일까.

    최 부잣집은 단순한 부호가 아니었다. 9대에 걸쳐 진사를 지낸 지식 있는 양반 부자로 정당하게 부를 축적했으며, 그 부를 사회에 적절히 환원함으로써 민중의 존경을 받았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경영이념 또는 경영철학을 확고히 가진 훌륭한 경영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라는 사회적 책임을 다한 부자였다.

    지금도 재벌 등 부자가 많지만 존경받는 부자는 드물다.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형성하지도 않고 그 부를 행사하는 데도 사회적 윤리에 부합하지 않아 지탄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이런 점에서 최 부잣집의 ‘경영철학’과 행적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300년 만석꾼 집안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을 쓴 전진문 전 대구가톨릭대 교수(현 경일약품 이사)는 그 비결이 그들만의 독특한 전통에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즉 이 집안에는 정신적 기반이 된 가훈(家訓), 경영철학의 역할을 한 가거십훈(家居十訓), 구체적 상황에 따른 대처법인 육연(六然)이 있었는데 이런 정신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는 것이다.

    최 부잣집의 가훈은 6가지.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마라.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다섯째,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가문을 일으킨 최진립은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등 많은 전투에서 큰 공적을 세웠지만 나중에 당파간 싸움에서 누명을 쓰게 됐다. 이를 계기로 그는 “왕후장상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권세와 부귀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 권세의 자리에 있음은 칼날에 서 있는 것과 같아 언제 자신의 칼에 베일지 모르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는 유훈을 후손들에게 전했다.

    ‘흉년기에 땅을 사지 마라’는 유훈은 때를 가려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리라는 의미였다. 최 부잣집을 명실공히 만석꾼 집안으로 일으켜 세운 최국선은 병으로 오랫동안 누워 있게 되자 어느 날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어도 갚을 것이다”며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받은 땅문서들을 모두 돌려주라고 명했다. 거래할 때도 너무 잇속만 차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가거십훈’은 ‘친구 사이에는 신의가 있다(信朋友)’ ‘경학을 익힌다(講經學)’ 등 10가지 교훈을 말하고, ‘육연’은 ‘스스로 초연하게 처신하라(自處超然)’ ‘일이 있을 때는 과단성 있게 하라(有事敢然)’ 같은 행동강령이다.

    이런 가문이 막을 내리게 된 것은 10대 최준에 이르러서였다. 19세기가 저물고 한 시대가 변화하는 큰 물결 속에서 태어난 그는 변혁의 격랑에 휘말려들었다. 집안의 완고함 탓에 신식물을 들이지는 못했지만 그는 일찌감치 전 재산을 바칠 필생의 사업을 찾았다. 그 무렵 만난 이가 의병장 신돌석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최준은 광복회에 비밀리에 돈을 대기 시작했으며, 독립운동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백산상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최준은 이 회사로 인해 큰 부채를 떠안았고 결국 위기에 내몰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최준은 교육사업에 뜻을 뒀다. 자신의 집안이 300년간 만석꾼 집안을 이어온 이유도 결국 자녀들을 철저하게 교육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어릴 적 한 노스님한테서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나 골고루 사방에 흩으면 농작물의 거름이 되는 법이다”는 말을 듣고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그는 대구대학(영남대 전신)을 설립하고 남은 전 재산으로 다시 계림대학을 만들었다. 그래서 부는 없어졌을지라도 그 정신은 지금도 그 자손에게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전진문 지음/ 황금가지 펴냄/ 228쪽/ 1만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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