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7

2004.03.25

“아프냐? 나도 역시 아프다”

영국 연구진, 사랑과 고통의 방정식 실험 … 16쌍 부부 전기자극 통해 같은 고통 체감 확인

  • 이영완/ 동아사이언스 기자 puset@donga.com

    입력2004-03-18 14: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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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냐? 나도 역시 아프다”
    흔히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는 상대의 고통까지도 함께하는 것이라고 한다. 결혼식 주례사에서도 즐거울 때뿐 아니라 ‘힘들 때나 괴로울 때’도 늘 같이할 것을 맹세하게 한다. 그런데 정말 연인이 아프면 나도 따라 같이 아플까. 내가 아프면 연인의 고통이 좀 덜해질까. 과학이 밝혀낸 사랑과 고통의 상관관계에 대해 알아보자.

    전선을 만지면 찌릿해지는 이유는 전기자극이 손가락 끝에서 뇌로 전달되면서 육체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감정을 다루는 뇌의 부위도 활성화돼 불쾌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영국 런던 유니버시티칼리지의 타니아 싱거 박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기자극을 가했을 때 연인의 뇌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실험했다.

    실험결과 ‘사이언스’에 게재

    연구진은 16쌍의 부부를 실험에 참가시켰다. 우선 16명의 여성들에게 손등에 전기자극을 하고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장비로 뇌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되는지를 관찰했다. 그 결과 뇌에서 감각과 감정을 관장하는 여러 부위들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고통으로 인한 불쾌한 기분을 뇌에 전달하는 전두대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과 뇌섬엽(nsula), 시상(thalamus) 등이 포함됐다.

    다음에는 먼저 전기자극을 받은 여성들의 연인들에게 전기자극을 가했다. 여성들은 전기자극이 가해지는지, 강도는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지만 자극을 받은 연인의 얼굴은 볼 수 없도록 했다. 이는 잘 아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지켜볼 때 발생하는 감정 반응을 상당 부분 줄여준다.



    과학학술지인 ‘사이언스’ 최신호에 게재된 실험결과에 따르면 여성들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연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도 자신에게 가해진 것과 같은 전기자극이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 동일한 고통을 느낀 것으로 밝혀졌다. fMRI 촬영 사진을 보면 연인에게 전기자극이 가해졌을 때 여성의 뇌는 자신에게 직접 전기자극을 가했을 때와 거의 유사한 반응을 보였다.

    이로써 실제로 고통이 따르는 자극을 가하지 않아도 상대에 대한 감정이입만으로 똑같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다만 고통을 주는 자극의 물리적 성질이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체감각피질(somatosensory cortex)은 자신에게 전기자극이 가해졌을 때와 달리 활성화되지 않았다. 연인의 고통에 대한 반응은 서로에 대한 감정이 강한 커플일수록 더 크게 나타났다. 이들은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에 올라간 것이다.

    “아프냐? 나도 역시 아프다”

    뇌의 반응 부위

    싱거 박사는 “고통마저 함께 느끼는 감정이입은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감정과 같은 강한 애착감을 형성시켜준다”며 이 같은 반응의 진화적 의미를 설명했다. 좀더 넓은 의미로는 상대가 고통스러운지 즐거운지, 아니면 화가 났는지를 알게 함으로써 상대가 내게 가할 수 있는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줬다는 것.

    연인의 고통을 똑같이 느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멋진 일이다. 그렇지만 연인에게 그런 마음을 내보이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지 모른다.

    2002년 말,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린 신경과학회 연례 학술행사에서 독일의 헤르타 플로르 박사는 연인에게 동정을 하는 행위는 고통만 줄 뿐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장 아프다 하더라도 마음을 모질게 먹고 나중을 위해 표현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의미다.

    플로르 박사는 등이 아파 고생하는 환자들 뒤에 각자의 배우자를 세워두고 아픈 부위를 한 차례 후려치게 했다. 이와 동시에 고통스러운 기분을 뇌로 전달하는 전두대피질의 전기적 활동을 조사했다.

    연구진은 이미 환자가 고통을 느낄 때 보이는 행동에 따라 동정심이 많은 배우자와 그렇지 않은 배우자로 분류했다. 실험결과 놀랍게도 동정심이 많은 배우자가 뒤에 서 있었던 환자는 냉정한 배우자의 환자에 비해 같은 자극에도 3배의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통 호소 때 동정하면 고통 심해져

    러시아의 과학자 파블로프는 ‘개들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종을 울렸더니 나중엔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렸다’는 조건반사이론을 확립했다. 플로르 박사는 그와 마찬가지로 환자들도 자신의 고통에 뭔가 보상을 받는다는 데 대한 조건반사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동정심이 많은 배우자에겐 더 많은 것을 받아낼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자극에도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플로르 박사는 그러므로 배우자가 고통을 호소할 때는 동정심을 보이기보다 걷거나 방을 나가게 하는 것이 통증을 완화하는 데 더 좋은 방법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간병인들은 환자가 고통을 호소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훈련받는다.

    사랑에 빠지면 연인의 고통까지도 나의 것이 된다. 특히 아이를 낳는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의 모습이나, 병마와 고통스럽게 싸우는 아내나 남편을 지켜보는 배우자의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정말 연인을 사랑한다면 그 마음을 드러내지 말고 스스로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모른 척해야 하는 것이다. 정말 사랑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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