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7

2004.03.25

‘외국자본 두 얼굴’ 삼성重 말한다

굴삭기 인수 ‘볼보’ 한국이 허브 기지 … 지게차 인수 ‘클라크’ 빚만 남기고 철수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4-03-18 13: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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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자본 두 얼굴’ 삼성重 말한다

    볼보건설기계코리아 에릭 닐슨 사장(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임직원.



    SK가 소버린자산운용과의 경영권 다툼에서 승리했다. 3월12일 워커힐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42차 SK㈜ 정기주주총회에서 이사 선임과 정관 개정안 등을 놓고 소버린과 표 대결을 벌인 SK는 거의 모든 안건에서 소버린을 4~20%포인트 차로 앞서며 완승했다. 소버린을 통해 재벌식 지배·경영구조 개선에 나섰던 주주자본주의자들이 ‘일단’ 패배한 것.

    소버린측은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적대적 경영권 인수를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소버린은 국부 유출을 우려하는 친재벌론자들의 주장대로 1700억원으로 50조원의 자산을 가진 SK를 집어삼키려는, 또는 투자이익에만 관심 있는 투기자본일까. 아니면 쥐꼬리만한 지분으로 선단식 지배구조를 고집하는 ‘재벌경제’ 개혁의 전도사일까.

    소버린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각에서 미뤄볼 수 있듯 한국경제 전반에서 외국자본은 두 얼굴이었다. 어떤 곳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가르치며 경영 선진화에 기여했고, 또 어떤 곳은 투기자본의 면모를 드러내면서 단물만 빼먹고 한국을 떠났다. 외환위기 당시 조각조각 갈려져 나간 삼성중공업 임직원들의 현 모습은 외국자본의 빛과 그림자를 고스란히 웅변한다.

    SK 넘보는 소버린 “게임은 이제부터”



    삼성중공업은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업체로 꼽힌다. 1998년 삼성중공업은 지게차와 굴삭기 등 중장비 부문을 조각내 외국자본에 매각함으로써 유동성 위기를 극복했다. 지게차 부문은 미국 클라크머터리얼핸들링(이하 클라크)이 공장째 떼어갔고 건설기계 부문은 스웨덴의 볼보가 새 주인이 됐다.

    당시 ‘삼성맨’들의 충격은 상당했다. 책상 앞에 꽂혀 있는 영한사전 한영사전은 ‘병사의 총알’과 같은 존재가 됐고, 간부들은 ‘사무실’을 버리고 ‘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연공서열 수직적 직급체계는 ‘지는 노래’가 됐으며 자율경영과 수평적 직급체계에 적응해야 했다.

    그 후 6년, 옛 삼성맨들의 운명은 엇갈렸다. 어떤 외국자본을 만났느냐에 따라 회사의 운명과 개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뀐 것. ‘볼보’는 희망이었고, ‘클라크’는 악몽이었다.

    98년 7월 볼보는 삼성중공업의 중장비 부문을 5억7000만 달러에 인수, 굴삭기 부문에 특화한 볼보건설기계코리아(이하 볼보건설기계)를 세웠다. 당시 볼보의 투자는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이뤄진 첫 번째 대규모 외자유치였으며, 이후 볼보의 성공적인 기업 운영은 글로벌 기업들의 한국 진출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볼보는 인수 이듬해부터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볼보건설기계를 그룹 내 굴삭기 부문의 ‘허브’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900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하며 재무구조를 개선한 것. 볼보는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삼성맨들을 자극하며 선진 경영 기법을 전수했고 효율적인 경영환경 구축에 매달렸다. 삼성맨들이 서구의 합리성과 한국의 전통을 버무린 ‘제3의 문화’를 강조한 볼보측에 ‘믿음’을 갖기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외국자본 두 얼굴’ 삼성重 말한다

    볼보의 굴삭기 부문 세계 본부인 볼보건설기계코리아 창원공장.

    “처음엔 걱정하는 직원들이 많았습니다. OEM이나 하는 하청업체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자리잡아가는 과정을 보면서 역시 글로벌 기업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직도 삼성 시절을 그리워하는 직원이 있기는 하지만, 삼성 시절 계속된 적자로 인해 쌓였던 패배의식은 송두리째 사라졌습니다.”(볼보건설기계의 한 관계자)

    볼보건설기계는 볼보의 바람대로 그룹 내 굴삭기 부문의 ‘허브’로 거듭났다. 스웨덴 에슬뢰브에 있던 굴삭기 공장을 아예 폐쇄해버리고 한국의 창원 공장을 굴삭기 비즈니스의 전진기지로 삼은 것.

    이로써 창원공장은 생산·마케팅 기능뿐만 아니라 R&D센터까지 보유한 명실상부한 볼보의 ‘핵심기지’로 거듭났으며, 중국과 독일의 굴삭기 공장까지 관장하는 굴삭기의 메카로 변모했다. 한국에 자리한 R&D센터에 대한 꾸준한 투자와 창원공장을 중심으로 한 기술 개발로 볼보 역시 세계 굴삭기 시장에서 비약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98년 인수 당시 매출의 30%에 불과하던 수출 비중은 인수 후 급속히 상승해 지난해엔 70%를 넘어섰습니다. 전 세계 굴삭기 시장에서 볼보의 점유율도 꾸준히 늘고 있고요. 수출가를 국내 가격에 비해 1.5배 정도 높이고 부품의 대부분을 국산화함으로써 국가 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이재환 볼보건설기계 국내부문 사장)

    볼보가 한국 공장을 ‘허브’로 키우면서 회사의 경영수지 또한 현저히 개선됐다. 98년 67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던 회사가 2년 만에 흑자(253억원)로 돌아섰고, 2001년엔 550억원, 2002년엔 720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지난해엔 2002년보다 흑자 규모가 더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볼보건설기계가 다른 외국계 기업과 달리 이렇다 할 노사분규 한번 없이 탄탄대로를 걸어온 것은 이 같은 성과 덕분이기도 하다.

    몇 년 후에나 ‘자본 본색’ 드러나

    반면 클라크의 품에 안긴 삼성맨들은 ‘좌절’과 ‘절망감’에 시달려야 했다. 마음이 딴 곳에 있는 ‘외국자본’에 의해 회사가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상당수의 직원들은 새 둥지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세계적인 지게차 제조업체인 클라크는 98년 7월 삼성중공업의 지게차 부문을 인수해 클라크머터리얼핸들링아시아(이하 클라크아시아)를 세웠다. 한국에서의 첫 출발은 볼보와 마찬가지로 성공적으로 비춰졌다. 클라크측은 한국을 아시아 시장의 전초기지로 육성하겠다고 소리 높였고, 실제로 매출액도 인수 2년 만에 2배 가까이 늘어났다.

    하지만 클라크의 ‘본색’은 시장에서부터 드러났다. 클라크는 ‘현지화’에 방점을 찍은 볼보와 달리 돈을 벌기 위해 ‘렌털 사업’에 뛰어들며 시장을 교란시켰다. 지게차는 렌털을 통해 현장에 공급되는 경우가 많은데 클라크가 직접 렌털 사업을 벌이면서 지게차 임대 시장을 통째로 흔들어놓아 기존의 클라크 고객에까지 피해를 입혔다.

    당장의 수익에 눈먼 ‘시장 교란’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클라크의 미국 본사는 사실 90년대부터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클라크아시아의 판매 수익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 들어갔다. 수주·생산·판매가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음에도 클라크아시아는 다시 자본 유치에 나서야 했다. 국내 금융계에서 끌어 쓴 5000만 달러 상당의 수출환어음을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클라크아시아가 수출대금 중 일부를 경영난을 겪고 있는 본사에 지원했고, 클라크측이 이를 상환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한국 법인이 벌어들인 수익을 본사가 집어삼킨 것. 당시 클라크아시아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매년 이익을 내고 있으면서 어처구니없게도 미국 본사에 돈을 빼앗겨 국내 은행들한테서 상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고 회고했다.

    클라크는 2000년 미국엔 판매망만 남긴 채 핵심시설을 모두 한국으로 옮겼다. 미국 본사는 명목만 남고 클라크아시아가 사실상 클라크 본사가 된 셈이었다. 당시 한국 언론은 “한국이 글로벌 기업의 허브가 됐다”며 관련 사실을 호들갑스럽게 보도했다. 그러나 클라크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경영난을 겪어온 미국 법인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핵심 시설을 한국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 클라크는 ‘화려하게’ 한국을 뜬다. ‘부채’를 한국 자본에 떠넘기고, 또 양지에서 커온 삼성맨들에게 상처만 안긴 채 5년 가량의 한국 생활을 마무리한 것. 클라크아시아는 부채를 안겠다고 나선 한국 중소기업 영안모자에 거꾸로 인수됐다. 본사로 넘어간 자금을 한국법인에 갚기는커녕 부채까지 고스란히 한국 자본에 떠넘기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클라크 5년은 우리로선 잃어버린 시간입니다. 정말 열심히 일했고 실적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뭡니까. 영안모자로 소속이 바뀐 뒤 여러 가지로 즐겁습니다. 이젠 희망이 있으니까요. 회사가 다시 도약하는 모습을 보면서 클라크의 악몽을 조금씩 잊어가고 있습니다.”(삼성 출신의 클라크아시아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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