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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신화| 저승 이야기①

세상 떠난 영혼의 길잡이 ‘강림도령’

저승사자 시행착오 바로잡은 이승차사 … 탐라의 ‘차사본풀이’ 노래 속에 사연 담겨

  • 류이/ 문화평론가·연출가 nonil@korea.com

세상 떠난 영혼의 길잡이 ‘강림도령’

세상 떠난 영혼의 길잡이 ‘강림도령’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불지옥 모습.

소별왕과 대별왕이 이승과 저승을 나누어 다스리기 시작한 이후에는 누구도 이승과 저승을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람은 서천강을 건너 한 번 저승으로 가고 나면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 누구나 한 번은 가지만 처음 가는 길이라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저승사자가 처음이자 마지막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대별왕이 저승법은 맑고 청량할 것이라고 선언하였지만, 아직 법을 다 만들지 못한 때였나 보다. 저승사자들이 아직 저승으로 갈 때가 되지 않은 아이들을 잘못 데리고 간다든가, 아니면 저승으로 갈 때가 된 사람들을 못 데리고 간다든가 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 ‘법지법’을 바로 세워야 할 때였다.

이 저승법을 바로 세운 이가 강림도령이다. 사람들에게는 강림도령이 저승 가는 길의 동반자였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하직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강림도령의 안내 없이는 저승에 갈 수 없었다.

‘사자’ 혹은 ‘차사’는 여럿이 있다. 하늘에서 심부름을 하는 천황(天皇)차사는 ‘일(日)직사자’요, 땅의 일을 보는 지황차사는 ‘월(月)직사자’다. 이승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안내하는 이는 ‘이승차사’ 강림도령이고, 저승의 일을 보는 이는 ‘저승차사’ 이원사자다. 또 ‘명부차사’가 있어 제 명을 다하지 않으면 아무나 죽는 일이 없도록 한다. 우물가에는 ‘단물차사’가 기다렸다가 세상 떠나는 영혼을 인도하고,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거나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등진 영혼을 인도하는 ‘용궁사자’도 있으며, 객지나 길에서 저세상으로 가는 영혼을 인도하는 ‘객사차사’도 있다. 나뭇가지에 걸려 죽은 영혼을 인도하는 ‘의사차사’, 멱을 감다가 갑자기 세상을 하직한 영혼을 데려가는 ‘엄사차사’, 날아온 돌에 맞아 비명횡사한 혼을 인도하는 ‘탄석차사’, 불에 타 죽은 영혼을 인도하는 ‘화덕차사’, 옥에서 목숨을 잃은 영혼을 인도해가는 ‘무죄차사’도 있다.

강림도령이 ‘이승차사’로서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저승으로 가서 ‘저승차사’인 이원사자에게 인계하면 그때 이원사자가 비로소 명부(冥府)의 세계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심청전’을 잠깐 볼작시면, 심청이가 아비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깊은 밤에 정화수 한 그릇을 떠 놓고 비는데, 똑 이렇게 비는 것이렷다.

“아무 달 아무 날에 심청은 삼가 두 번 절하고 비옵나이다. 천지 일월성신이며 하지후토 산영성황 오방강신 하백이며, 제일에 석가여래 삼금강 칠보살 팔부신장 시왕성군 강림도령 차례로 굽어보옵소서.”

심청은 저승을 다스리는 대별왕의 시왕(十王)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염라대왕은 부르지도 않고 강림도령을 부르고 있다. 우리 조상들에게 강림도령은 아이도령으로서 염라대왕보다 더 친숙하고 더 큰 비중을 가진 신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강림도령이 어떻게 ‘이승차사’가 되었는지 탐라의 ‘차사본풀이’ 노래를 들어보자.

세상 떠난 영혼의 길잡이 ‘강림도령’

용왕의 심부름을 하는 거북사자.

동경나라의 범을황제 아들로 삼삼구 아홉 형제가 솟아났다. 아들이 한 명도 아니고 두 명도 아니며 아홉이 쑥쑥 솟아나니 하늘이 내려준 복 중의 복이라. 경사 중의 경사로구나.

어느 날 갑자기 아무 병도 없이 한날한시 위로 삼형제 죽고 아래로 삼형제 죽으니 가운데 삼형제만 살아남았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뒤따른다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는구나. 범을황제, 살아남은 아들 삼형제에게 글공부시키면 ‘없는 명’과 ‘없는 복’이 생길까 하여 동문 10리 밖에 스승을 정하고 글공부를 시킨다.

아들 삼형제 일천서당 다니면서 부지런히 공부를 하였더랬다. 노는 날이 돌아와 심심하고 더 심심하여서 뒤천당 연하못에 배 구경 물 구경을 가는구나. 연하못에서 신들이 쉰다는 연팡돌이 좋아서 삼형제가 고누판을 그렸다. 고누 두며 세월을 보내네.

동개남 상주절 마라 스님이 시주를 받아다 헌 당, 헌 절 수리하려고 절을 내려온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고누를 두며 노는 범을황제 아들 삼형제를 보았네.

마라 스님 풍월로 관상을 보고는,

“이 선비님 저 도령님. 낳기는 잘 낳았다마는, 열다섯 십오 세를 넘길 수 있다면 명도 길 듯하다마는, 넘기기가 어렵도다. 어려워!”

마라 스님이 한마디 툭 던지고는 아랫녘으로 치넘어간다.

곧 죽는다는 소리에 놀란 아들 삼형제가 울며불며 아비 찾아 집으로 쫓아오는구나.

범을황제 말하기를, “죽다 남은 자식들아, 묻다 남은 자식들아! 무슨 일로 우느냐?”

“아버님, 아버님. 웬 중이 와서 우리 삼형제 열다섯 살을 넘기지 못한다 하여 웁니다.”

“뭐라고? 여봐라, 오리정에 나가서 그 중놈을 잡아오너라.”

초조하게 기다리던 범을황제, 호위병들에게 끌려오다시피 한 마라 스님을 보고는, “중놈이 웬 허황된 소리냐?”

한날한시 여섯 아들을 잃은 범을황제, 속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손발이 사시나무 떨듯 하지만 짐짓 큰소리로 호통을 치는구나. 범을황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라 스님, 무심한 눈으로 높낮이도 없이 말을 하는구나.

“왕의 팔자에는 자식이 없소. 이 아이들은 왕의 아들이 아니라 부처님의 아들이오. 속세에서 살아가면 열다섯을 넘기지 못합니다. 지금이라도 속세 떠나 절에 가서 지내면 화를 면할 것이오.”

마라 스님의 담담한 신색에, 놀란 가슴을 다스리는 범을황제. 단박에 중놈이 아니라 스님이다.

“스님!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궂은 운을 막을 수는 있겠소?”

그 시절에는 아이들 사망률이 높았다. 홍역이나 천연두 따위를 쉽게 이길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범을황제처럼 모두들 자식들을 주렁주렁 많이 낳고 기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십오 세를 넘기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덜컥 겁이 난 범을황제는 이미 궂은 운을 막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게 ‘현실’이었으니까!

“왜 없겠습니까? 은그릇 놋그릇 비단 짐 차려서 아들 삼형제에게 팔도 구경도 시키고 우리 절에 와서 한 삼 년 공부하고 있으면 궂은 운수가 넘어가서 명이 길어질 듯합니다.”

마라 스님은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해서 품안의 자식으로 고이 길러서는 사람은커녕 목숨도 지킬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산과 들과 강을 다니면서 몸과 마음을 닦도록 아이들을 풀어놓으라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내던져라! 마을과 마을을 다니며 사람과 사람들을 만나서 인간을 배우도록 하라는 이야기다. 아이들아, 도전하라!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인생을 걸라!

범을황제도 이미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도 이미 열두 살에 동경나라를 떠나서 저 멀리 주년나라와 해동나라를 여행하지 않았던가? 범을황제는 은그릇 놋그릇 비단짐을 마련하여 삼형제를 동개남 상주절로 올려 보낸다.

마라 스님을 따라 동개남 상주절로 들어간 아들 삼형제. 머리 파르랗게 깎고 백팔염주 목에 걸고 느닷없이 중이 되었구나.

이렇게 저렇게 세월이 가더니 어느새 삼형제 나이 열다섯이 되던 해, 드디어 일이 닥치는데! 수명이 다된 삼형제를 데려오라는 염라대왕의 명을 받들고 저승사자 셋이서 동경나라에 내려왔구나.

느닷없이 오면서도 어김없고 비정하기로는 죽음의 사자, 차사만한 것도 없는 법이다. 차사는 염라대왕의 명을 받아 저승으로 사람을 데려가기 위해 이승으로 온다. 차사는 복장부터 서슬이 퍼렇다. 남색 바지에 백색 저고리를 받쳐 입고 자주색 행전을 차고 백색 버선에 미투리를 신었다. 까만 쇠털 전립(戰笠)을 머리에 쓰고 한산모시 겹두루마기를 두르고 남색 쾌자를 걸쳤다. 옆구리에는 붉은 오랏줄을 달고 옷고름에는 적배지를 달아매고, 팔뚝에는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는 석자 오치짜리 팔찌걸이를 조여 매었다. 가슴에는 용(勇)자, 등에는 왕(王)자가 새겨져 있고 등뒤에는 상여의 용두머리를 매어 끌고 갈 행차배를 지고 온다. 부릅뜬 눈은 부리부리한 봉황의 눈이다.

그런데 어허, 이게 어찌된 일인고? 어디에서도 삼형제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구나. 저승사자들 어쩔 수 없이 집안 가속들을 한 명씩 족친다.

아들 삼형제가 동개남 상주절에 있다네. 어서 가자.

저승사자 셋이서 상주절에 도착하니 눈이 핑핑 돌아가는구나. 파르랗게 머리 깎고 회색 가사 장삼 차려입고 백팔염주를 두른 중들이 모두 삼천이나 되는구나. 이 중이 저 중 같고 저 중이 이 중 같으니 이를 어이할꼬. 제아무리 저승사자라도 이 스님 저 스님 구별이 안 되네.

이런! 이런! 하는 사이 삼형제 죽을 날이 스리슬쩍 지나가 버리고 이제 저승사자 셋이서 그냥 돌아갈 수밖에.

“이러다가는 염라대왕한테서 벼락이 떨어지겠소. 가다가 아무 놈이나 잡아 가지고 빨리 갑시다.”

저승사자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사람을 저승으로 데리고 간다. 강림이 사자가 되기 전에는 저승사자가 사람을 잘못 데리고 가는 일이 많았다네. 자기 명이 다하지도 않았는데 죽은 사람들만 억울하기 짝이 없구나. 불쌍타, 불쌍해!

삼형제는 고비를 잘도 넘겼겠다?

우리 삼형제 이제는 살았네. 이제 죽을지 저제 죽을지 두근반 서근반 하던 새가슴을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쓰다듬던 그 해 9월 보름날. 삼형제가 어미 생각 아비 생각에 비새 울 듯 우는구나.

“저 해와 달이야 우리 어미 아비 쳐다보고 있으련만, 우리는 이처럼 못 보는구나.”

삼형제 노래를 부르니, 스님에게 어찌 들리지 않을까? 그러다가 삼형제가 급기야 집에 보내달라는 청을 넣으러 가니 마라 스님이 탄식을 하는구나.

“삼 년만 꼬박 채우면 본디 수명과 복을 되찾을 수 있을 텐데 어쩔 수가 없구나! 굳이 가고 싶다 하니, 쯧쯧쯧….”

마라 스님은 혀를 차면서도 은그릇 놋그릇 비단 꾸러미들을 모두 내주며 노자 삼아서 가라고 한다. 그래도 못내 아쉬워 신신당부한다. 한 고비를 넘겼을 때가 더욱 위험한 법이 아니던가?

“어차피 가는 길! 다만 가는 길에 김치고을에 들르지 마라. 어쩔 수 없이 들어가게 되더라도 까치못 우물물일랑 마시지 마라. 만약 그 물을 마셨다 하더라도 과양상이 집에 가서 밤잠을 자지 말고 술이며 밥이며 주나때나 먹지 마라.”

삼형제 동경나라 집 찾아가는 길에 이 마을 저 마을로 장사하며 물건 팔고, 팔도를 구경하다 보니 여러 날이 지나갔다. 날도 저물어가는 어느 날, 그날 따라 빨리 고향에 가려는 성급한 마음에 물 안 마시고 밥 안 먹은 채 가다보니 배도 고프고 목도 말라온다. 일은 꼭 이럴 때 생기는 법.

바로 눈앞에 보이는 연못으로 달려들어 실컷 물을 마시고 보니 연못가에서 어여쁜 아낙네가 빨래를 하고 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김치고을이에요.”

“그럼 이 연못 이름은 뭐죠?”

“까치못이라 해요.”

김치고을에 까치못이라. 아차! 스님이 가지 말라던 김치고을에서 먹지 말라던 물까지 마셔버렸구나.

그렇다. 금기는 깨지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금기를 깬 삼형제의 앞날이 왠지 불안하다. 더군다나 ‘어여쁜 아낙네’라 더욱 그러하지 않은가?

삼형제 속으로 후회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은 이미 저물어 갈 곳도 없구나.

“이 부근에 묵어갈 곳이나 있소?”

“없어요.”

“주막이… 없나요?”

“괜찮으시다면 우리 집에라도 가시지요.”

멀뚱멀뚱 쳐다보고도 눈앞에 걸어가는 어여쁜 아낙이 과양상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삼형제.

은그릇 놋그릇 비단 꾸러미에 눈이 돌아가버린 과양상이 아리따운 옷을 입고 나와 술 음식을 차려놓고 대접하니 삼형제는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다가 드디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는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어여쁜’ 아낙네의 웃음에 잘도 넘어갔구나. 미련하고 또 미련하구나. 눈이 즐겁고 입에 단 향기 좋은 것에 홀려 실체를 보지 못한 채 눈뜬 장님이 되었구나. 그렇다. 삼형제는 이미 3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절을 떠남으로써 스스로 포기한 바가 있다. ‘팔도 구경’과 ‘3년 공부’라고 하는 여정은 운명에서 도피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자신의 수련 과정이기도 했다. 어미 생각 아비 생각에 자신의 의지를 꺾고 눈앞의 욕망에 굴복하여 절을 떠나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오늘의 사태가 예비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자신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능력도 없고 상대방도 볼 줄 몰라 인생을 그르치는 이가 어디 삼형제뿐이랴! 우리들 모두가 늘 그렇게 무언가 그르치며 살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 결과는 참혹하다.

은그릇 놋그릇 비단 꾸러미에 눈먼 과양상이가 참기름을 솥뚜껑에 소왕소왕 끓여다가 삼형제 왼쪽 귀에 사르르 오른 쪽 귀에다 사르르, 삼형제를 모두 죽여버리네. 삼형제의 시체를 까치못에 던져버리네.



주간동아 425호 (p66~68)

류이/ 문화평론가·연출가 nonil@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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