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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짱’ 시대 ‘꽝’ 시대

유행 거스르며 산다, 어쩔래!

‘느리게 내 방식’대로 당당한 삶 … 경쟁사회 낙오 아닌 따뜻한 사회 주체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유행 거스르며 산다, 어쩔래!

유행 거스르며 산다, 어쩔래!

자연에 묻혀 소박하게 사는 시인 박남준(왼쪽)과느리지만 장인정신으로 책을 만드는 눌와출판사 김효형 사장.

”따뜻한 봄날입니다. 매화꽃이 피었다고 그러니까 거짓말이라고들 그러더군요. 정말 우리 집 뒤엔 매화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향기롭습니다. 연락사항을 남기시고요. 저는 뒷동산 꽃그늘 아래에 숨었습니다.”

지난해 가을 경남 하동 악양면 지리산 골짜기에 새 거처를 마련한 시인 박남준씨의 자동응답 전화기의 메시지다. 여유가 절로 느껴진다. 시내버스를 타려면 40분은 걸어나가야 하는 벽촌이지만 박씨는 “단지 햇볕이 너무 좋아”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아침형 인간’이니 ‘얼짱’이니 ‘몸짱’이니 하는 유행과 무관하게 눈 떠지는 대로 일어나고, 가고 싶은 대로 가며, 하루 두 끼만 먹고 사는 박씨의 ‘풍족한’ 삶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바쁜 삶을 살고 있나, 유행을 따라 살며 우리가 이르고자 하는 곳은 과연 어디인가.

유행과는 멀찍이 떨어져 살고 있는 이들이 어디 박씨뿐이랴. 옹고집 정신으로 한 길 출판에 매달리는 출판인이나 깊은 맛 나는 차를 만들기 위해 땀을 쏟는 다원 운영자도 그런 이들이다.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자는 취지에서 ‘얼짱’의 반대인 ‘얼꽝’(얼굴이 꽝인 사람) 모임을 만든 개성 있는 젊은이들이나, 관객 1000만명을 동원하는 블록버스터 시대에 관심 갖는 이가 적은 주제를 작가정신으로 작품을 다듬는 영화감독들, 성공 대열에 끼지 않아도 좋으니 느긋하게 ‘저녁형 인간’을 고집하는 이들도 ‘자신의 본분을 잊고 남을 좇아 사는 삶’에 대한 반항아들이다.

어쩌면 이들은 바삐 돌아가는 경쟁사회에서 낙오된 이들로 오인될 수도 있다. 이들의 삶은 최고, 또는 최신의 것과 거리가 있다. 그러나 당사자들에게는 이런 잣대가 무의미하다. 어차피 자신의 사이클대로 살고, 자족하며 살아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나오는 야구선수들처럼 이들은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 자유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느린 삶

그러나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제 길을 가려면 특별한 노잣돈이 필요하다. 그것은 신념과 용기, 또는 무욕의 정신이 아닐까. 자연과 인문,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책을 펴내고 있는 출판사 눌와(訥窩)의 김효형 사장(42)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어눌한 사람의 집’이라는 출판사 이름처럼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어눌한 말이어도 진실을 담은 책을 세상에 전한다”는 출판 철학을 갖고 있는 그는 1999년 강희안의 ‘양화소록’을 첫 책으로 내놓은 뒤 ‘궁궐의 우리 나무’ ‘이 땅의 큰나무’ ‘명화를 보는 눈’ 등 주목받는 책들을 마치 계간지 내듯 띄엄띄엄 내고 있다. 주변에서 “그렇게 해서는 망하기 십상일 것”이라고 조언하지만 김사장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지만 견딜 만하다. 앞으로도 계속 소식하며 살겠다”고 말한다.

19년 전부터 전남 승주군에서 5500평의 차밭을 일구고 있는 유수용씨(41)도 느린 삶의 한 전형이다. 대학 때 절에 들렀다 우연히 차와 인연을 맺게 된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삶을 차밭 경작에 맞추고 그곳에 집중해왔다. 비료를 줘서 맛이 단 차보다 깊은 맛이 나는 야생차의 참맛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 유씨는 1년에 두 달(4, 5월) 제다(製茶)작업에 몰두하고 나면 나머지는 불교심리학인 유식학(唯識學)과 쪽물들이기에 빠져 산다. 그런 유씨에게 도시의 유행은 너무 싱겁고 재미가 없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가장 친한 친구”라고 표현했던 시인 황인숙씨도 이런 축에 드는 이다. 서울 남산 아래 해방촌의 한 옥탑방에서 최소한의 살림살이로 ‘무소유’의 정신을 실천하며 시를 쓰고 있는 그는 최근 ‘자명한 산책’이라는 시집을 펴냈다.

유행 거스르며 산다, 어쩔래!

인터넷 다음의‘전국얼꽝연합’홈페이지.

인터넷 다음의 ‘전국얼꽝연합’(전얼련)은 얼짱문화 또는 1등주의에 대한 반기로 등장했다. 지난해 10월 이 카페가 생긴 뒤 ‘얼꽝’, ‘얼꽝이 최고’ 등 비슷한 부류의 카페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뭉치기 잘하는 사이버공간의 특성으로 봐 이마저도 유행의 한 흐름을 탄다고 생각될 정도다. 이들의 ‘전얼련 선서’에는 ‘외모에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개성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자신감 갖고 살겠다’는 주장이 실려 있다. 전문가들은 “짱문화나 꽝문화 역시 또래의 집합 문화지만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짱’문화보다 개성을 중시하는 ‘꽝’문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아침 시간을 잘 활용하면 원하는 대로 성공할 수 있다는 취지의 ‘아침형 인간’ 열풍이 오랫동안 식지 않고 있다. 일본인 사이쇼 히로시의 동명 책에서 촉발된 이 유행은 분명 설득력을 지니지만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생체시계도 다른데 하나만을 선택할 것을 강요하는 듯해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들이 많다. 어느 소설가는 자신을 저녁형도 모자라 ‘심야형’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동이 터올 때까지 소설을 쓰고 오전에는 잠자고 오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어느 시인은 요즘 유럽 챔피언스 리그 중계를 보느라 심야형 인간이 됐다. 이런 가운데 퇴근 후 3시간을 잘 활용하면 성공한다는 ‘살아있는 저녁형 인간’이란 책도 나왔다.

#관객 1000만명 시대의 반기

유행 거스르며 산다, 어쩔래!

작가정신으로 다큐멘터리 ‘송환’(왼쪽) 을 12년 만에 완성한 김동원 감독.

‘실미도’가 관객 1000만명을 돌파했고, ‘태극기 휘날리며’도 최단기간 800만명 관객동원 기록을 세웠다. 영화사측이 의도적으로 퍼뜨렸든 그렇지 않든 입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아직도 그 영화 안 봤어?”라는 말은 숫제 그 영화를 보지 않으면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럴수록 ‘집단주의’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영화를 보지 않으려는 이들도 많다.

엄청난 블록버스터의 등장은 관객 취향만 강제하는 게 아니라 영화계 전체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로 인해 오락성 높은 영화에만 투자가 몰리면서 그 여파로 예술영화 등 다른 장르의 영화는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때 2004 선댄스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상’을 받은 다큐멘터리 ‘송환’의 등장은 이채롭기까지 하다. 진보적인 시선의 다큐멘터리를 주로 제작해온 푸른영상의 김동원 감독(49)은 이 영화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의 일상을 통해 분단의 상처와 우리 사회의 벽, 인간의 양심 등을 조명했다. 1992년부터 촬영에 들어가 무려 12년 만에 완성한 영화다. 감독은 제작 중에 감옥도 들락거렸고, 촬영을 위해 여러 차례 방북도 시도했지만 모두 무산됐다. 김감독은 “북으로 송환된 조 할아버지(조창손)가 날 아들처럼 생각하신다는 말에 별 해드린 게 없어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이 이 작품을 마칠 수 있게 한 힘이었다”고 말했다.

마치 “내가 세상에 맞출 수 없으니 세상이 내게 맞춰라”고 말하는 듯한 이들의 삶은 속도전 같은 유행을 따라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삶을 돌아보게 한다. 크게 주목받진 못하지만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런 이들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주위 환경보다 내적 요구에 더 민감한 이들은 사회 평균 20~25% 정도를 차지하는 내성적인 사람들의 비율과 거의 일치한다”며 “이들은 세상의 기본 틀을 유지하는 사람들이므로 사회에 기본적 안전성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이동연 문화연대 문화사회연구소장은 “천천히 살려는 것은 변화하는 속도로부터 자기 삶을 방어하려는 하나의 생존 방식이다”며 “속전속결 방식이 지배하는 지금 사회에서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천천히 가는 법도 익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느리게, 내 식대로 사는’ 이들이 있어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 노력하는 삶’을 요구하는 경쟁사회가 한결 따뜻해질 수 있음은 자명하다.



주간동아 425호 (p22~23)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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