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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짱’ 시대 ‘꽝’ 시대

획일화 포로가 된 ‘삶의 질’

발전주의 담론 여전히 한국 사회 장악… 다양한 욕망 인정받는 싸움은 이제부터­

  • 박동범/ 수유+너머 연구원 esarn@hanmail.net

획일화 포로가 된 ‘삶의 질’

획일화 포로가 된 ‘삶의 질’

‘태극기 휘날리며’의 관객 동원력을 영화적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몸짱’, ‘얼짱’, ‘아침형 인간’, ‘웰빙’, ‘10억 만들기’. 최근 각종 매체를 훑다보면 유난히 눈에 띄는 단어 내지 표현 들이다. 실제 ‘열풍’이라 불릴 만큼 이와 관련된 정보가 넘쳐난다. 한데, 정작 이러한 열풍이 어떤 사회적 욕망의 흐름들과 맞닿아 있는지를 분석하는 경우는 썰렁하리만치 빈약하다.

아무리 주류 언론, 방송이 이미 그 자체 자본이자 자본의 문화ㆍ정치적 윤활유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라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싶다. 그렇다고 자본과 언론의 내연관계를 새삼 확인하고 이를 준열히 성토하는 것 역시 썰렁하긴 마찬가지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자본의 전제적 욕망과 이질적 선을 긋는 욕망의 흐름들을 포착해내고, 이를 긍정적으로 증식ㆍ확장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자면 앞서 열풍이라 거론한 현상들에는 두 가지 현실적 욕망의 흐름이 중첩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삶의 질’과 구체성을 중시하려는 대중적 욕망의 흐름과 이를 이윤 축적의 지대로 남김없이 포획하려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흐름이 그것이다.

예컨대 몸짱과 웰빙이라는 현상에는 분명, 박정희 시대 ‘민족중흥’ 슬로건으로는 결코 메울 수 없는 삶의 구체성에 대한 욕망이 존재한다. 문제는 삶의 구체성을 중시하는 이 같은 사회적 욕망의 흐름이 자본의 욕망과 결부되면서 단일한 척도에 따라 다시 줄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적 욕망이 자본과 결부 ‘가치 줄세우기’

자기 몸과 삶의 구체성에 대한 욕망은 표준화된 삶의 척도를 성취하기 위한 지루한 아귀다툼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삶 속에서 발생하는 긍정적 차이들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준거로 위계화된다. 얼짱이나 몸짱, 그리고 웰빙이라는 지표가 대중적 욕망의 복수화된 흐름을 드러내지 못하고, 척도화된 삶의 조건을 강제하는 자본의 파시즘적 욕망에 포획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때 아침형 인간과 10억 만들기란, 그 성공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 같은 파시즘적 욕망의 내면화를 부추기는 세련된 프로파간다에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듯 자본의 욕망은 기본적으로 파시즘적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파시즘적 욕망이란 병리적 탈선이 아니라 체제의 내적 조건으로서 존재한다. 근ㆍ현대 사회에서 파시즘은 끝장난 적이 없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필요도 없다고 하는 지적이나, 나아가 오늘날 그것이 ‘정상적인’ 조직을 이루는 삶의 다양한 관계들에 내재하는 문제라는 지적은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가 서구에서 발견하는 ‘삶의 질’이란 이 같은 자본의 욕망을 완화하거나 국지화하려는 역사적 투쟁 속에서 성취된 것이다. 하지만 2004년 우리의 현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삶의 질에 관한 담론들에는 이 같은 측면에 대한 통찰이 결여돼 있다.

아니, 삶에 대한 통찰은커녕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처럼 따라잡기식 근대화를 통해 지겨우리만치 반복돼왔던 발전주의적인 구호가 아직까지 담론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삶의 질과 구체성을 다루는 담론들이 IMF 구제금융 이후 한층 심화된 궁핍화 추세 속에서 오히려 ‘계급적 구별짓기’로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흥행 성공에 대한 언론의 의미화 방식에서처럼, 한국 근대사의 경험 속에서 해원(解寃)해야 할 집단 기억이 한국 영화자본, 나아가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에 필요한 내적 통합의 소재 따위로 활용되는 것 역시 이 같은 상황과 결부돼 있다.

결국 문제는 다시, 다양한 욕망의 흐름을 파시즘적으로 포획해온 자본주의적 욕망에 맞서 어떻게 삶의 관계를 재구성해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물론 자본주의적 욕망을 하나의 지배적 체제로서 유지시켜 온 제도적ㆍ이데올로기적 장치와 습속을 폐절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구체적 예를 들면, 국가보안법과 호주제 및 청소년보호법 폐지 움직임은 한국 자본의 파시즘적 욕망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삶의 지평을 넓히려는 구체적 노력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다. 지금-여기, 각자 선 자리에서 ‘자본의 시다바리’로 휘둘리지 않을 ‘차이의 공간’을 만들어내기―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지만 결코 끝나지 않을 투쟁의 원 그리기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주간동아 425호 (p20~20)

박동범/ 수유+너머 연구원 esar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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