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3

2004.02.26

봄내음에 취하랴 남도 맛에 반하랴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4-02-20 1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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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내음에 취하랴 남도 맛에 반하랴

    남원 춘향골새집추어탕이 추어탕, 장흥 바다하우스의 키조개와 바지락회무침, 순천 일품매우의 매실 한우(위 왼쪽부터).

    개구리가 튀어나오기를 머뭇거릴 만큼 아직 봄은 멀리 있지만 봄의 전령사는 벌써 몸이 달아올랐다. 전남 광양 청매실농장의 매화꽃은 앞다투어 꽃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성급한 놈은 벌써 햇볕에 마음을 열었다. 보길도 등 남해의 섬에는 동백꽃이 절정이라 한다. 순천 선암사 앞뜰의 보라색 동백꽃들도 이제 몸을 떨며 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보리밭도 나날이 푸르름을 더하고 있었다.

    육지에서 가장 먼저 봄을 맞이하는 곳은 남해안. 그 중에서도 섬진강이 흐르는 구례 하동 일대는 봄소식을 전하는 1번지다. 거대한 지리산 자락이 초봄의 시베리아 한기를 막아내고, 강의 따뜻한 기운이 어우러져 기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곳이기 때문.

    마침 섬진강 일대로 봄 마중 가는 이들이 있어 2월11일 오전 7시50분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여수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손꼽히는 맛집을 순례하는 테마여행 상품인 ‘명품 맛집 기차여행’(여행그룹)이 그것. ‘감성과 테마’가 있는 여행을 지향한다는 이 여행사 홈페이지에 들렀더니 ‘아줌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이가 상품 평을 해놓았다.

    ‘운전하느라 고생하는 사람 없어 좋다. 맛집 찾느라 시간낭비 하지 않는다. 일류 맛집에서 먹고 나면 뿌듯하고 기분 좋다. 여행지 정보를 자세히 들을 수 있고, 여행 내내 여행사가 준비한 분위기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첫 번째 감동은 기차 안에서 건네받은 따뜻한 떡으로 찾아왔다. 잠을 설치고 서둘러 나서느라 아침을 거르게 생겼는데 진행요원이 차와 함께 떡을 권했다. 떡으로 허기를 달래고 편안하게 등받이에 기댔다. 잠이 절로 쏟아졌다.



    낮 12시20분 소리의 고장 남원에 도착했다. 군데군데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있었지만 햇살은 완연한 봄의 그것이었다. 심호흡을 해봤다. 공기도 한껏 부드러웠다. ‘날씨가 여행의 반’이라는 말이 있는데 시작이 좋았다.

    미리 준비된 관광버스가 일행들을 첫 번째 ‘명품 맛집’으로 데려갔다. 남원추어탕골목의 ‘춘향골새집추어탕’. 고추에 미꾸라지를 넣어 튀긴 고추튀김(2만원)은 무척 부드러웠고, 추어탕(7000원)은 국물이 진했으며, 추어숙회(2만5000원)는 매운맛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눈을 반짝이며 밥상 앞으로 당겨 앉을 정도로 매웠다. 대를 이어 45년째 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서삼례씨(44)는 “자연산 미꾸라지에다 직접 끓인 간장과 된장이 맛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다시 차에 오른 일행은 섬진강으로 향했다. 지리산 고봉들은 아직도 눈을 이고 있었지만 여인의 옷고름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푸른 섬진강은 이미 봄을 풀어내고 있었다. 물에 비쳐 반짝이는 햇살과 금빛 모래, 웃자란 대숲과 살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강을 따라 가는 19번 국도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드라이브 코스. 일행들 사이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여행그룹 임상수 대표는 “섬진강은 보는 강이 아니라 마음에 담아가는 강이다”며 예찬론을 폈다.

    경남 하동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쪽으로 접어들었다. 벚꽃이 만개할 때면 차가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인파가 몰리는 곳이다. 쌍계사를 지나쳐 ‘관향다원’이라는 제다원으로 들어갔다. 길가에서 간판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옥집 3동은 한껏 멋을 부렸다. 부산에서 이 골짜기로 들어온 지 16년 됐다는 주인 이호영씨(59)가 객들을 맞이했다. 다양한 종류의 작설차와 쑥환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팔고 있는 이씨는 차를 우려내는 품이 꽤나 격조 있어 보였다.

    그가 차와 함께 내놓은 다식(茶食)이 일행들을 감탄케 했다. 갈대줄기로 싸서 밖에 걸어두고 겨우내 얼렸다 녹이기를 반복했다는 악양의 대봉감을 다식으로 내놓은 것. 차를 석 잔 마신 뒤 홍시를 꿀에 찍어 먹고는 저마다 상찬을 내놓았다. 진행요원 유영선 이사와 한지수씨가 기타와 해금 합주로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봄내음에 취하랴 남도 맛에 반하랴

    여행그룹 유영선 이사(오른쪽)와 한지수씨가 기타와 해금 합주로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위). 섬진강변의 갈대밭.

    일행은 화개와 전남 광양을 잇는 ‘영호남 화합의 다리’ 남도대교를 걸어서 건넜다. 강바람은 아직 차가웠다. 그러나 인근의 청매실농원 입구의 매화나무는 이미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만개는 대개 3월20일께. 40년 넘게 키워온 매실농사로 ‘신지식인’ 대열에까지 합류한 안주인 홍쌍리씨는 “지금 꽃이 피믄 열매는 안 되는 기라요”라며 때이르게 개화한 매화를 꾸짖었다.

    매실은 엑기스와 술, 장아찌, 된장과 잼 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지만 특히 요즘엔 ‘매실한우’로까지 연결되고 있다. 광양시가 매실 먹인 한우 3000두를 기르며 이를 지역의 식당 등에 보급하고 있는 것. 숙소인 순천 시티관광호텔에 여장을 풀기 위해 시내로 이동한 일행은 순천 연향동의 고급 한식당 ‘일품매우’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육질이 부드럽고 맛이 좋았다.

    시티관광호텔 커피숍에서 다시 ‘여행길’의 연주 솜씨가 빛을 발했다. 해금과 기타가 자아내는 특별한 분위기는 여독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해금연주와 안치환 김광석의 노래, 젊은 국악연주단 슬기둥의 노래들이 1시간 동안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12일은 순천 장날이었다. 양식으로 이른 아침을 먹고 여정을 서둘렀다. 아직껏 남아 있는 재래시장 가운데 규모와 질적인 면에서 단연 돋보이는 순천장에는 새벽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풍성한 해산물과 농산물을 사기 위해 북적거렸다. 꽃모종과 묘목들도 새순을 달고 길가에서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천장에서 순천만 갈대밭으로 이동했다. 시장의 주인이 사람이라면 갈대밭의 주인은 자연이었다. 35만평의 드넓은 갈대밭은 대자연의 장엄함을 그대로 보여줬다. 재두루미 흑부리오리 검은머리물떼새, 민물도요 같은 철새들은 새벽 비행을 마치고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었지만 저서생물들은 재게 몸을 놀렸다. 갈대처럼 금빛으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을 등에 받으며 일렁이는 갈대밭으로 성큼 걸음을 내딛자 영화의 한 장면으로 빨려드는 듯했다.

    황로가 날아오르자 일행은 버스에 올라 3본향(차향, 예향, 의향)으로 알려진 보성의 차밭으로 이동했다. 영화 촬영지로 유명해진 대한다업의 녹차밭 산책로를 느긋하게 걸었고, 따뜻한 찻잔을 만지며 곱아진 손을 녹였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율포해수·녹차탕에서 마음의 때까지 깨끗하게 씻어냈다.

    점심 메뉴는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에 있는 바다횟집의 바지락회(대 3만원)와 키조개(3만원). 회로 먹고 기름에 구워 먹는 키조개맛과 뜨거운 밥에 비벼 먹는 바지락회맛에 모두가 과식했다. 남원에서 기차를 타기 전 선암사로 마지막 산책길에 나섰다 만난 어느 분은 “남도 여행은 돌아가서 아침마다 마음 화장하는 데 그만이다”고 말했다.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욕심 때문이었는지 장시간 버스 이동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화장하기에 충분한’ 이색적인 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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