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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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시대’ 두 재벌엔 곤혹 드라마

정주영·이병철 일대기 현대·삼성 전전긍긍 … MBC “이유 있는 성공과 실패 다 그릴 것”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4-02-19 16: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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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시대’ 두 재벌엔 곤혹 드라마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왼쪽),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오른쪽 위)과 이건희 회장.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을 모델로 삼은 기업 드라마가 안방극장을 찾아간다. MBC가 ‘대장금’ 차차기작으로 준비 중인 ‘영웅시대’(기획·연출 소원영, 극본 이환경). 총 100부작으로 올 6월 첫 전파를 탄다. 고 정 명예회장 역에는 차인표, 고 이회장 역에는 전광렬이 캐스팅됐다.

    MBC측은 기획안에서 ‘시련과 영광의 대한민국 경제사, 그 불모지대에서 기적과 전설을 일으켰던 주역들의 불꽃같았던 삶을 조명’하기 위해 이 드라마를 기획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대로라면 제목 그대로 두 재벌 총수를 영웅시하는 찬양 일변도의 드라마가 될 위험성마저 있어 뵌다. 그러나 MBC 드라마국 박종 국장은 “그렇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성공과 실패를 다 그릴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그룹과 삼성그룹이 우려하는 것도 이 점이다.

    때문에 양 그룹 홍보 및 대외협력 라인은 소원영 PD와 이환경 작가가 매만지고 있는 드라마의 아우트라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두 총수는 양 그룹에 ‘신성불가침’의 존재다. 또 현재 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들은 모두 두 총수의 자손이며 한라, 금강고려화학, CJ, 신세계, 새한 등 방계 그룹 또한 만만치 않다. 시놉시스에 의하면 방계 그룹 총수들 역시 모두 조연급으로 드라마에 등장한다. 고 조중훈 한진그룹 총수와 김우중 전 대우그룹 총수 등도 ‘출연진’에 포함되어 있다. 특히 현대건설 회장 출신 이명박 서울시장을 모델로 한 인물에게 드라마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내레이터로서의 역할을 맡긴 점이 흥미롭다.

    MBC측은 “두 기업인을 모델로 삼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웅시대’는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인물과 회사의 이름을 달리 가져가는 것은 물론 주변인이나 개인사 등도 새롭게 재구성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만큼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것”이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제작진이 내놓은 시놉시스를 보면 ‘영웅시대’가 두 인물의 삶을 참고한 수준 그 이상의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총 100부작 6월 초 안방 노크

    그럼 여기서 줄거리를 간략히 살펴보자. 먼저 현대가 모델인 세기그룹 스토리다.

    빈농의 맏아들로 태어난 천태산은 떠돌이 소리꾼의 딸 박소선을 사랑하나 부모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 와중에 네 차례 가출 끝에 18세 때 쌀가게 점원이 된다. 타고난 성실성으로 주인의 눈에 들어 쌀가게를 물려받은 후 자동차정비소까지 열어 큰돈을 번다. 이 무렵 아버지의 강권으로 아내 현영순을 만나 결혼한다. 현영순이 첫 아이를 낳을 무렵 박소선이 숨겨 길러온 맏아들 일국을 맡겨온다. 해방 직전 여동생 천태희의 남편이자 ‘기계박사’인 박일이 그의 밑으로 들어온다.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기간 중 ‘세기토건사’를 설립해 건설업에 뛰어든 천태산은 특유의 뚝심과 카리스마로 거금을 움켜쥔다. 종전 직전 인플레로 큰 위기를 겪지만 여성 사채업자 강혜영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짧은 사랑이 오가고 그 와중에 천태산의 다섯째 아들, 오국이 태어난다. 이렇게 해서 천태산은 세 여인에게서 다섯 명의 아들을 얻는다.

    ‘영웅시대’ 두 재벌엔 곤혹 드라마

    작가 이환경씨(위)와 소원영 MBC PD.

    이후 박정희 대통령과 의기투합한 천태산은 갖가지 기상천외한 영웅담을 뿌리며 욱일승천의 기세로 사업을 확장해간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나 88서울올림픽 유치 등을 통해 신군부와 관계를 회복한다. 이즈음 동생 태일과 매제 박일에게 각각 계열사를 떼어줘 분가시킨 후 장성한 다섯 아들에게도 경영수업을 시킨다. 위의 세 아들은 눈에 차지 않았으나 시를 쓰고 싶어하는 넷째와 총명한 다섯째 아들이 위안이 된다.

    한편 5공화국 말기부터 정권과 심한 갈등을 겪던 천태산은 마침내 대통령 출마를 결심한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대북사업에 박차를 가하나 이 역시 노령과 자금난에 시달리는 그룹 사정으로 인해 난관에 봉착한다. 그의 사업을 이어받은 사국은 난국을 헤쳐나갈 인물이 못 되었다. 천태산은 차남 이국에게 자동차그룹과 가문의 적통을 물려주고 눈을 감는다.

    “상처 막아라” 홍보라인 총동원

    고 이병철 회장의 삼성가는 국대호의 대한그룹으로 그려진다. 경상도 지주 집안의 막내아들로 와세다대학을 중퇴한 국대호는 치밀한 계산과 남다른 안목으로 사업에 뛰어들어 부를 쌓는다. 젊은 시절에는 요정 나들이를 하며 졸부의 생활을 만끽한다. 이때 소리기생이 된 박소선과 자리를 함께하기도 한다.

    해방 직후 무역업에 뛰어든 국대호는 놀라운 사업감각을 발휘해 일거에 거부를 이룬다. 이때 설립한 ‘대한물산공사’는 대한그룹의 전신이 된다. 이후 여러 번 빈털터리가 될 위기에 처하지만 신용과 ‘사람에 대한 투자’로 난국을 돌파한다. 한때 부정축재자로 몰려 큰 위기를 겪으나 무역업과 외국 차관 도입에 남다른 수완을 발휘해 재계의 리더로 자리를 굳힌다.

    이때 대한비료밀수사건이 터진다. 그로 인해 사업 일선에서 물러난 국대호는 7년 후 경영 복귀를 시도하던 중 아들들과 극심한 갈등을 겪는다. 장남은 아버지의 의중을 읽지 못해 신뢰를 잃고, 밀수사건 때 아버지 대신 옥고를 치른 차남은 경영권이 장남에게로만 갈 것을 우려, 아버지를 사정당국에 고발한다. 결국 국대호는 두 아들을 그룹에서 추방하고 셋째 아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준다. 국대호는 셋째를 위해 장남을 아예 정신병자 수용소에 가두려 한다. 차남은 국외를 떠돌다 병사하고 나머지 세 부자는 국대호가 암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야 비로소 얼굴을 마주한다.

    시놉시스에서도 알 수 있듯 현대, 삼성 두 그룹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총수 일가의 가정사 노출, 그리고 정경유착과 관련한 어두운 과거다. 특히 드라마에서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는 데다 ‘등장인물’도 월등히 많은 현대그룹 쪽 걱정이 상대적으로 더 깊다.

    현대그룹에서 갈려나온 모 그룹 홍보담당 간부는 “제일 큰 걱정이 자녀 문제 같은 사생활 부분이다. 제작진과 차차 조율해나가야 할 것으로 본다. 안 되면 별 수 있나, 이환경 작가 집 앞에 텐트라고 치고 누워야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현대 2세가 오너인 또 다른 그룹 임원은 직접 박종 국장과 소원영 PD를 만나 드라마 방향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그 임원은 “픽션이라고는 하지만 픽션-논픽션을 넘나들 텐데 걱정이다. 드라마의 속성상 여러 가상의 이야기가 끼어들 테고. 뭐라 불만을 토로하자니 결국 핵심은 작가의 상상력이라 할말이 마땅치 않더라. 뭔가 해보려면 결국(장자 회사인) 현대자동차가 구심이 돼야 할 텐데…”라며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삼성그룹의 경우에는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더 화제가 될 테니 지금은 가만있는 게 상책”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룹 홍보실측은 “아직 MBC 쪽에 어떠한 접촉도 시도한 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PD는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임원을 각각 만났고 삼성과 전화통화를 했다. 때가 되면 삼성과도 만날 것”이라고 밝혔다. ‘움직인 바 없다’는 삼성측 주장에도 불구하고, 지난 15일 삼성·현대 등 관련 그룹들은 광고주협회를 통해 MBC측에 “방송을 말아달라”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소PD는 “현대 쪽에 우리 드라마가 개인 사생활을 파헤치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내부적으로도 법률적 분쟁이 발생할 것에 대비해 고문변호사의 검토를 거쳤다. 아무 문제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MBC는 시청자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매 회마다 첫 화면에 ‘정주영, 이병철 회장을 모델로 삼았으나 드라마 내용은 허구임을 밝힌다’는 요지의 자막을 넣을 예정이다.

    그러나 방송사로서 더 무겁게 생각해야 할 것은 현대그룹이나 삼성그룹의 반응이 아니라 시청자들의 평가일 것이다. 드라마가 자칫 두 그룹 총수의 삶을 무턱대고 미화하는 쪽으로 흐를 경우 상당한 비판에 부딪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종 국장은 이에 대해 “실제 상황에서는 정말 재수가 좋아 사업이 잘 되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드라마다. 철저히 이유 있는 성공, 이유 있는 실패를 그릴 것이다. 예를 들어 한탕주의나 권력과의 결탁은 결국 실패를 불러올 수밖에 없음을 보여줄 것이다. 현대는 왜 ‘앞’이 강하고 ‘뒤’가 약해졌는지, 삼성은 어떻게 ‘앞’의 실책을 극복해 ‘뒤’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됐는지 등을 재미있고 의미 있게 그려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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