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3

2004.02.26

“KAL기 폭파 조작 의혹은 내가 꾸민 것”

당시 반미청년회 의장 조혁씨 “독재정권 술책으로 여겼지만 결국 조작 가능성 희박 인정”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04-02-19 15: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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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L기 폭파 조작 의혹은 내가 꾸민 것”

    KAL기 폭파사건 조작설을 퍼뜨렸다고 증언한 조혁씨(왼쪽). 김현희씨가 아닌 다른 아이가 방북한 장기영씨에게 꽃을 주는 사진을 붙여놓았던 안기부의 수사발표문 사진. 이 아이의 귓불은 김현희씨(오른쪽)의 귓불과 모양이 다르다.

    2월3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백춘기 부장)는 1987년 11월29일 발생한 KAL 858기 폭파사건의 희생자 유가족 회장인 차모씨가 서울중앙지검을 상대로 낸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5200여 쪽의 기록 가운데 80여 쪽의 수사기록과 개인 신상기록을 제외한 기록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이로써 그동안 끊이지 않고 제기돼온 KAL기 폭파사건 조작설에 대한 의문이 풀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이와 관련해 ‘주간동아’는 최근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하나는 이 사건이 일어난 1987년, 주사파(NL) 계열의 학생운동 지하조직인 반미청년회 의장으로 고려대 애국학생회 등 주요 대학의 NL계를 이끌었던 조혁씨(40)에게서 다음과 같은 증언을 확보한 것이다.

    “KAL기 폭파사건 조작 의혹을 처음 제기했던 것은 나였다. 당시 나는 전두환 독재정권이 여당의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모든 수를 다 쓴다고 믿고 있었다. 또 노동당이 이끄는 북한은 아웅산 사건처럼 한국 정부의 요인이 탄 비행기는 노릴 수 있어도 중동 근로자들이 탄 KAL 858기는 폭파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KAL기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나는 북한의 ‘구국의 소리’ 방송에서 ‘이 사건은 안기부의 자작극으로 안기부가 프로젝트 쭛쭛(조씨가 기억하지 못함)이란 이름으로 준비해왔던 공작이다’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이 안기부의 자작극임을 증명하는 증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반미청년회 선전부로 하여금 ‘KAL기 사건은 조작됐으니 그에 관한 자료를 입수하라’고 지시했다.

    거기서 여러 차례 화제가 됐던 어릴 적 김현희씨의 귓불과 성인 김현희씨의 귓불이 다른 것 등 최근 제기됐던 대부분의 의혹이 수집됐다. 나는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KAL기 사건의 진실과 의혹’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만들어 비밀리에 전 대학 NL계 조직에 보내고, 이 원고를 대자보로 옮겨 쓰게 했다. 이것이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본 대자보 중의 하나가 되면서 KAL기 폭파사건 조작 의혹을 일으키게 됐다.



    “사실로 여기는 이들 많아 안타깝고 미안”

    “KAL기 폭파 조작 의혹은 내가 꾸민 것”

    북한에서 소녀기를 보낼 때의 김현희씨 모습(화살표).

    그러나 당시 나는 한국이 88서울올림픽이라는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한국 항공기를 감쪽같이 파괴한 북한이 사고 책임을 한국에 떠넘기는 데 성공한다면, ‘한국은 국제적으로 안전하지 않은 분단국가로 알려져 서울올림픽이 무산될 수 있고, 한국의 군부정권은 정권 연장을 위해서라면 무자비한 공작으로 무고한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집단으로 국제사회에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사회운동가로서 나는 이 점을 놓쳤던 것이다.

    그때 만약 김현희씨가 체포되지 않았다면 북한의 의도는 어느 정도까지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씨가 체포돼 진실을 털어놓았고 그 후 나 또한 북한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면서 나의 가설은 완전히 무너졌다. 따라서 그 가설을 토대로 작성했던 ‘KAL기 사건의 진실과 의혹’은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학생운동 조직이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통치를 종식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제기했던 의혹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데 대해 안타깝고 또 미안하게 생각한다.”

    “KAL기 폭파 조작 의혹은 내가 꾸민 것”

    金正日을 金正一로 적어놓고 김현희가 묵었던 호텔의 방 번호를 잘못 기재해놓은 안기부의 수사발표문. 오른쪽은 KAL 858기 잔해물인데,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이 증거에도 불구하고 KAL기 잔해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증언을 한 조씨는 “이제 모든 의혹을 불식시키려면 김현희씨가 KAL기 사건 유가족들을 만나서 ‘나(김현희)는 북한 출신이고 북한에서 KAL기를 폭파시키라는 공작을 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증언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조언했다.

    ‘주간동아’가 찾아낸 또 하나의 진실은 1988년 1월15일 안기부가 발표한 KAL 858기 사건 수사 발표문에 지금까지 그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중대한 오류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자가 여러 차례 수사발표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사항으로, 조혁씨와 반미청년회는 물론이고 안기부조차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찾아낸 기자는 국가정보원에 기자의 판단이 옳은지 문의했는데, 국정원측은 “당신의 판단이 옳다. 당시 안기부가 너무 성급히 수사문을 만드느라 실수를 범한 것 같다”며 오류를 시인했다.

    KAL 858기 사건과 관련된 김현희씨의 귓불 공방, 金正日을 金正一로 써놓은 것, KAL기 잔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김현희가 김승일과 함께 묵었던 호텔의 방 번호가 틀린 것 등에 대해 국정원측의 해명과 실수 인정이 있었고 ‘신동아’ 1월호 등 여러 언론이 진실을 밝혀냈으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사진 참조).

    김현희 항공권에서도 숨겨진 진실 발견

    “KAL기 폭파 조작 의혹은 내가 꾸민 것”

    김현희씨 등이 11월30일 알리아항공에서 교체한 항공권에다 ‘11월20일 알리탈리아에서 구입했다’는 엉터리 설명문을 붙여놓은 안기부의 수사발표문.

    1987년 12월1일 김현희와 김승일이 바레인을 출국하려다 공항에서 검거된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현희씨는 조서에서 “11월30일 바레인의 알리아 항공사로 가서 11월20일 오스트리아의 알리탈리아 항공사에서 예약한 ‘아부다비→암만→로마행’ 티켓을 ‘바레인→암만→로마행’으로 바꾸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그와 김승일은 12월1일 바꾼 항공권을 들고 바레인 공항에 나갔다가 검거돼, 김승일은 자살하고 그는 자살 미수로 생포되었다.

    전후 사실이 이러하면 안기부는 마땅히 바레인→암만→로마행 항공권을 공개함으로써 두 사람이 이 항공권을 들고 바레인 공항에 나온 것을 입증하여야 한다. 그러나 안기부는 수사발표문에서 11월20일 두 사람이 오스트리아에서 구입한 알리탈리아 항공권은 공개했으나, 바레인 공항에 들고 온 새 항공권은 공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일부 인사들은 “비행기 표도 없는데 두 사람이 왜 바레인 공항까지 나와서 검거되었는가. 이 사건은 조작된 것임이 틀림없다”며 최근까지도 의혹을 제기했다.

    국정원까지도 답변하지 못했던 이 의혹은 너무 쉽게 풀렸다. 우습게도 당시의 안기부는 11월30일 바레인의 알리아 항공에서 교체한 항공권에다 ‘11월20일 오스트리아에서 구입한 알리탈리아 항공권’이라는 잘못된 설명을 붙여놓고, 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래 사진 항공권의 오른쪽을 보면 1987년 11월30일 발행했다는 뜻인 ‘30 NOV 87’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고 왼쪽 상단에는 영어로 ‘alia(알리아)’가 인쇄돼 있는데도, 안기부는 ‘11월20일 알리탈리아에서 구입한 것’이라는 엉터리 설명문을 붙여놓았던 것이다.

    알리아측은 ‘원래는 아부다비에서 출발하는 항공권인데, 바레인 출발로 바꿔주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이 항공권 여정란의 맨 위에 아부다비(ABUDHABI)를 쓰고 탑승시간은 적지 않았다. 그리고 바레인(BAHRAIN)과 암만(AMMAN)에서의 여정에는 12월1일을 뜻하는 ‘01 DEC’라는 날짜와 탑승시간을 적어놓았다.

    이렇게 전혀 다른 여정이 적혀 있는데도 안기부는 ‘11월20일 알리탈리아에서 구입한 항공권’이라는 엉터리 설명문을 붙여놓았고, 의혹을 제기한 사람들은 항공권을 보지 않고 안기부의 설명문만 보고 “항공권이 없는데 두 사람이 왜 바레인 공항에 나왔느냐”고 해왔던 것이다.

    당시 학생운동권의 막연한 의심과 안기부의 서툰 솜씨가 KAL기 폭파사건에 대한 의혹을 마구 키우는 데 일조하였다. 그야말로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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