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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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 은 끝나야 한다

포천 여중생 엄현아양 사건 수사 난항 … 구멍 뚫린 치안·안전 불감증 개선 시급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4-02-19 13: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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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의 추억’ 은 끝나야 한다

    2월13일 경기 포천시 소흘읍 D중학교에서 열린 여중생 엄현아양의 노제에서 엄양의 영정이 재학생들의 배웅을 받으며 정든 학교를 떠나고 있다.



    ”고통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어.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꼭 다시 친구 하자.”

    2월13일 오전 경기 포천 D중학교의 교정에는 비통함이 흘렀다. 실종된 지 96일 만에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고 엄현아양(15)이 모교에 작별인사를 고하는 시간이었다. 운구차량이 운동장을 돌자 이를 지켜보던 친구들과 교사들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2년 연속 개근상을 받을 만큼 성실했고, 훌륭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아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유쾌하게 웃으며 주위 사람들을 늘 행복하게 만들었던 명랑한 소녀. 하지만 환한 미소의 엄양은 2월8일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5리 식당 진입로변 배수관에서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실종 당시 입고 있던 교복과 속옷이 모두 벗겨진 상태였고, 상반신은 심하게 부패돼 있었다. 추운 듯 다리를 가슴 쪽으로 구부리고 웅크린 모습이었다. 무엇이 한 여중생을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경찰의 허술한 대처와 실종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처음부터 대대적 수색과 수사인력 투입 있었다면 … ”



    엄양의 시신이 발견된 직후 여론의 비난은 경찰에게로 쏟아졌다. 실종 직후 빠른 수색작업과 수사를 벌이지 못해 비난받았던 경찰은 지금 범인 검거에 난항을 겪고 있다.

    “지난해 11월5일 현아가 실종된 이후 형사들이 교대로 집에 머물면서 협박전화가 오는지 살폈습니다. 형사들 나름대로 잠도 자지 못하며 현아 수사에 매달린 셈이지요. 하지만 현아를 찾기 위한 대대적인 수색작업은 곧바로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아가 실종된 부근에서 서울 번호판을 단 트라제 XG 승합차와 또 다른 차를 봤다는 주민의 진술이 있었는데도 차량 조회도 바로 이뤄지지 않더군요. 석 달 전에 그 작업이 이뤄졌더라면….”

    엄양의 가족은 경찰 수사에 못내 아쉬움을 나타냈다. 실제로 포천경찰서 관계자들은 엄양이 사라진 직후 ‘가출’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벌여 많은 수사인력을 투입하지 못했다. 2급경찰서인 포천경찰서가 수색에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은 고작 30~40명. 이 때문에 엄양 실종 직후 주변 지역에 대한 꼼꼼한 수색을 벌이지 못했고, 관련 목격자 진술도 확인하지 않아 비극을 자초했다. 엄양의 사체가 발견된 이후에야 경찰은 기억이 희미한 목격자에게 최면수사를 실시해 당시 보았던 차량번호를 떠올리도록 했다.

    군인인 엄양의 아버지는 안타까운 마음에 이웃주민들과 군부대의 도움을 받아 수색에 나서기도 했으나, 엄양을 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엄양의 유류품이 발견된 직후 수사방향을 ‘납치’로 빠르게 전환하지 못했던 경찰의 늑장대응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실종 23일 만에 엄양의 휴대폰, 가방, 운동화가 경기 의정부시 민락동 도로공사 현장 근처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됐다. 엄양 사체가 발견된 장소에서 불과 2km 떨어진 곳이었다. 유류품이 발견됐다는 것은 곧 엄양이 납치됐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대목이었지만 수사인력이 보강되지는 않았다.

    엄양 사건이 뒤늦게 조명되기 시작한 시점은 1월30일 경기 부천에서 초등학생 2명이 실종 16일 만에 숨진 채 발견되면서부터다. 엄양 사건이 함께 언론에 알려지면서 경찰은 경기지방경찰청의 도움을 받아 수사전담반을 2개 반으로 확대하고 하루 평균 300~500명의 경찰 병력을 동원해 수색에 나선 것. 결국 공개수사가 이뤄진 지 6일 만에 경찰수색대는 엄양의 주검을 발견했다. 언론의 조명이 없었다면 엄양의 주검 발견은 더욱 늦어졌을지 모른다.

    실종자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무관심은 가족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엄양 찾는 일에 물심양면으로 나섰던 이웃 주민 박광엽씨(42)의 얘기다.

    “현아가 사라진 직후 수십만 장의 전단지를 만들어 경기와 강원 지역에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전단지를 ‘쓰레기’ 취급 하며, 아파트 게시판에 붙이지 말라고 호통을 치는 사람도 있더군요. 돈벌자고 돌리는 광고지도 아니건만….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주변 사람들의 작은 관심도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엄양 주검이 발견된 부근에서 음식점 ‘옹달샘 가든’을 운영하고 있는 한 주민은 “배수관 옆을 막고 있던 TV박스에 신경을 썼더라면 엄양을 조금 더 빨리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 자책했다. 엄양의 주검이 발견된 배수관은 지난해 6월경 만들어졌고, 지난해 11월 초부터 TV박스가 배수관 옆에 놓여 있었다는 것. 주변 사람들과 경찰이 수로에 갑자기 버려진 TV박스에 의심을 갖고 접근했더라면 덜 손상된 엄양의 주검을 발굴할 수도 있었다. 엄양의 부검을 집도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김윤신 박사는 “상반신이 심하게 부패돼 사망 요인이나 추정시간을 쉽게 알아낼 수 없다. 정액에 대해 음성반응이 나왔지만, 성폭행 여부를 판단하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구멍 뚫린 치안과 안전불감증은 엄양의 죽음을 가져온 또 다른 요인이다. 엄양이 실종된 곳으로 추정되는 소흘읍 추산초등학교 후문 부근은 가로등 하나 없는 외딴 길이다. 엄양과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친구 조모양(15)은 “현아와 헤어질 무렵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고 말했다. 초·중·고교생들이 등·하교 때 이용하는 길에 가로등 하나 없다는 사실은 ‘납치의 잠재적 위험’을 안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엄양 실종 이후 이웃 주민들의 납치 공포는 더욱 커졌지만, 이 길의 치안상황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사랑하는 딸을 보낸 엄양의 아버지 엄익봉씨는 분노와 눈물을 삼키며 간절한 마음을 밝혔다.

    “딸이 누워 있던 그곳을 여러 번 지났는데, 쉽게 찾지 못해 정말 미안합니다. 현아를 찾기 위해 밤잠을 설쳤던 형사분들, 참 고맙습니다. 하지만 뒤늦은 수사인력 지원과 전문성이 부족한 경찰 수사는 안타까움으로 남습니다. 딸의 죽음을 계기로 제2의 납치 피살 사건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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