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3

2004.02.26

흉흉한 세상 살아남기 비상!

잇단 어린이·여성 범죄 ‘충격과 공포’ … 치안 믿음 상실 자신·가족 ‘스스로 방어’ 행렬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4-02-19 13:4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흉흉한 세상 살아남기 비상!

    납치, 살인 등 강력 사건이 잇따르면서 개인 안전을 위해 보디가드를 고용하려는 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

    ”차라리 총을 팔아라. 스스로 방어할 수 있게.”(bada2371)

    “적어도 올해는 우리나라에서 공포나 엽기 영화를 안 만들어도 될 듯하다. 생활 자체가 공포고 엽기 아닌가.”(gempal)

    실종사건이 잇따르고 강력 범죄가 끊이지 않는 현실에 대해 네티즌들이 쏟아놓은 독설에서는 언뜻 장난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이 글의 바탕에 깔린 공포는 결코 장난스럽지 않다. 일상이 ‘공포고 엽기’인 대한민국에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은, 이제 살아남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유배달 주부 살인사건’ ‘독신여성 원룸 연쇄강도사건’ ‘포천 여중생 사망사건’ 등 각종 범죄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여성과 어린이들이 느끼는 공포는 더욱 크다. 이들은 끊임없이 실망만 주는 경찰과 정부에 대한 믿음을 접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나서고 있다. 자식을 흉포한 사회에서 보호하려는 부모들의 노력도 시작됐다.

    최근 125만원짜리 신변 보호용 보디가드 상품을 내놓은 ‘우리홈쇼핑’은 방송 1시간 만에 152건을 판매해 화제를 모았다. ‘우리홈쇼핑’ 관계자는 “스토킹과 학교 폭력, 납치 등에서 자녀를 보호할 수 있다는 쇼핑호스트의 설명이 나간 후 1분당 2.5건씩 신청이 접수됐다. 특히 가정주부들의 문의전화가 많았다”고 밝혔다.



    호신용품 불티·헬리콥터 페어런츠 신조어도 등장

    보디가드를 고용하지 않는 부모들은 자체적으로 팀을 구성해 아이들을 매일 직접 등·하교시키는 품앗이를 하기도 한다. 초등학교 3학년과 5학년생 자녀를 두고 있는 주부 김순애씨(35·서울 도봉구 방학동)는 “한 동네 어머니들끼리 모임을 만들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가며 등·하교를 시켜주고 있다”며 “번거롭지만 아이가 집에 올 때까지 불안하게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 아이들도 혼자 집에 오는 것을 싫어하고, 엄마에게 ‘무서우니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하루 종일 자녀의 근처를 떠나지 않는 부모들을 가리키는 ‘헬리콥터 페어런츠’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말 그대로 아이가 집 밖에 나가 있는 동안 부모가 그의 머리 위를 선회 비행하듯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는 뜻.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근처를 어머니들이 지키고 있는 모습이나 학원 시간에 맞춰 입구에 자가용 행렬이 늘어서는 풍경 등은 최근 우리 사회에 ‘헬리콥터 페어런츠’들이 적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여성용 호신용품 판매도 늘어나는 추세다. 인터넷 쇼핑몰 ‘CJ몰’은 2월 들어 호신용 스프레이, 경보기, 호루라기 등 호신용품의 판매가 20% 가량 증가했다고 밝혔다. 역시 인터넷 쇼핑몰인 ‘롯데닷컴’에서는 최근 ‘호신용품’이 쇼핑 검색어 10위권에 진입하기도 했다. 비상시 버튼을 누르면 독한 액체가 뿜어져나와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 호신용 스프레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고음 경보기 등이 인기 품목. 집 안에 외부인이 침입하면 이를 알려주고 자동으로 현장을 녹화해주는 ‘디지털 영상방범시스템’도 혼자 사는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다. 태권도, 호신술, 복싱 등의 격투기 도장에 젊은 여성들의 발길이 늘어난 것도 신풍속이다.

    최근 태권도를 시작한 대학생 김은경씨(24)는 “약하고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여성상이 환영받던 시절은 지금 생각해보면 ‘태평성대’였던 것 같다. 요즘은 여자든 남자든 최소한 자기 자신은 지킬 수 있어야 살아남는다”고 말했다.

    ‘내 자신은 내가 지켜야 한다’가 절대명제가 된 2004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