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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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남겨온 ‘오사카 商道’ 해부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4-02-13 13: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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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남겨온  ‘오사카  商道’  해부
    ‘하늘이 두 쪽 나도 노렌은 지킨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사카 상인들의 신조다. 여기서 ‘노렌(暖簾)’은 식당 같은 곳의 입구에 내거는 주렴 형태의 무명 천을 말하는 것으로 일본 어디에서건 쉽게 볼 수 있다. 초밥집, 다시마 가게, 도시락 가게, 약국, 사진관, 시계점, 꼬치집, 악기점, 옷가게 등 수많은 점포들이 이 빛바랜 ‘노렌’을 내걸고 분명한 철학과 상인정신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천 쪼가리에 불과한 이 ‘노렌’이 일본에서는 상인들의 신용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만든 음식이나 상품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품질을 지킨다는 신용정신을 뜻했다. 그래서 ‘노렌’을 내린다는 것은 상인에게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일본 뒷골목 엿보기’ ‘진짜 일본 가짜 일본’ 등 일본 관련 서적을 여러 권 낸 홍하상씨(49)가 이 ‘노렌’을 통해 확인한 일본 경제의 힘에 대해 설명한 책 ‘오사카 상인들’을 내놓았다. 그는 이 책에서 수백년 동안 이어져 오는 오사카의 오래된 점포인 ‘시니세(老鋪)’ 12곳과 오사카 출신 재벌들의 역사와 경영비결, 오사카 상인정신의 형성과정 등을 소개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인으로 화교상인 유대상인 아랍상인 등이 있지만 20세기 최고 상인으로 꼽히는 것은 역시 일본상인이다. 1960년대부터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일본 종합상사원들의 상인정신은 “에스키모인에게 냉장고를 팔았다”는 일화가 전해올 정도다.

    그러나 본류는 역시 오사카 상인이다. 이들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이들은 최소한 400년 이상 대대로 장사를 해오면서 상인정신을 키워왔다. 586년에 창업한 오사카의 건축회사 공고구미(金剛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 공고구미는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의 금세공회사 토리니 피렌체(1369년 창업)보다 800년이나 앞서 있다.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화과자점 스루가야, 500년 전통의 이불가게 니시카와, 400년 역사의 히야제약 등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점포나 기업이 오사카에 500개가 넘는다. 100년 이하의 역사를 가진 기업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다.



    ‘공고구미가 흔들리면 일본 열도가 흔들린다’는 말이 있다. 이 기업은 어떤 공사를 맡아도 기본에 충실하고 보이는 곳보다는 보이지 않는 곳에 더 신경을 쓴다고 한다. 연 매출액 1000억원대에 불과하지만 액수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자신들의 본분에 충실함으로써 그 역사와 전통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1995년 고베 대지진 때 고가도로가 넘어지고 땅이 갈라지는 와중에도 공고구미가 지은 절은 서까래 일부만 비틀어졌을 뿐 별다른 피해가 없었을 정도로 튼튼한 건축으로 유명하다.

    오사카 상인들은 또 이익을 중시하면서도 전통적인 한 가지 업종에만 전념해왔다. 철도 여행객을 위한 도시락(에키벤)을 만드는 업체인 스이료켄은 1888년 창업주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다른 사업에까지 뛰어들지만 1906년 나머지 사업은 모두 철도공제회에 넘기고 ‘에키벤’에만 전념했다. 기응환으로 유명한 히야제약도 마찬가지. 1662년 창업한 이곳은 기응환의 성공으로 다른 약품 생산에까지 뛰어들었지만 1950년 대기업들이 너나없이 신약개발에 나서자 기응환 한 제품에만 집중해 오히려 더 탄탄한 회사로 거듭났다.

    오사카 상인들의 상도(商道)는 1700년경 유명한 상인 이시다 바이칸에 의해 완성됐다.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노동은 힘들고 고단한 것이 아니라 인격 수양의 길’이다. 그래서 상인의 존재 의미와 이윤의 정당성, 검약과 정직이라는 상도가 나왔다. 그중에는 ‘돈을 남기는 것은 하(下)고 가게를 남기는 것은 중(中)이며 사람을 남기는 것이 상(上)’이라는 원칙이 있다. 고객이 있는 한 사업은 영원하기 때문에 눈앞에 놓인 이익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의 오사카 기업들은 이런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스턴트 라면을 최초로 발명한 닛산식품 창업주도 오사카 상인 출신이고, 손님이 골라서 먹을 수 있도록 벨트를 따라 접시가 도는 회전초밥을 만든 이도 오사카 상인 출신이었다. 70개 계열사에 25만명의 사원을 거느린 일본식 자수성가의 대표주자 마쓰시타그룹, ‘전례가 없으므로 하겠다’는 역발상으로 일본 맥주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 아사히 맥주도 오사카 기업이다.

    마침 일본이 ‘잃어버린 10년’(1989년 일본의 거품 경제가 무너지면서 시작된 10년간의 불황)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 저력의 일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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