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2

2004.02.19

반전과 평화의 노래 “이젠 안녕”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4-02-12 17: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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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과 평화의 노래 “이젠 안녕”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의 삶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해온 뮤지컬 ‘블루 사이공’. 이 뮤지컬은 우리나라가 이라크전에 참전하는 것을 비판하며 2월18일 영원히 막을 내린다.

    너무 두려워 숨을 쉴 수가 없다. 저들의 분노가 나를 향한다. 오라에 묶인 채 피 묻은 총칼을 들어 춤추는 이들. 눈을 돌릴 수 없다. 어느 순간 저 칼날이 내 심장을 겨눌지 모른다.

    ‘블루 사이공’의 시작이다. 막이 오른 후 10여분 동안 무대는 한 맺힌 원혼들의 춤으로만 가득 찬다. 그들은 휠체어에 앉은 채 움직이지도 못하는 늙은 남자를 위협한다. 그런데 객석은 그의 고통에 함께 숨이 막힌다. 그 남자를 빌려 바로 자신을 위협하고 있음을 눈치 채기 때문이다. 하늘에서는 흰 가루가 쏟아지고, 남자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절규한다. 그가 발작적으로 쓰러진 후에야 비로소 무대 위에는 왜 그들이 분노의 춤을 추었는지가 펼쳐진다.

    ‘블루 사이공’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살아 돌아온 맹호부대 김문석 상사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창작 뮤지컬이다. 이 극에서 김상사는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맣고 씩씩한’ 남자가 아니다. 그의 삶에는 고통과 두려움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다.

    함경북도 북청군 신창면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그는 ‘살아남기 위해’ 이웃들을 빨갱이로 밀고했다. 그의 지목을 받은 이들은 모두 국군의 총탄에 죽어갔다. 건장한 청년 시절에는 ‘살아남기 위해’ 베트남의 모녀를 향해 총을 쏘았다. 전우들이 모두 죽은 케산 전투에서도 그는 베트콩 간첩인 애인 후엔의 도움으로 혼자 ‘살아남았다’.

    평생 그가 원한 것은 오직 ‘살아남는 것’뿐이었으나 그것은 언제나 그를 죽음보다 못한 삶으로 몰아넣었다.



    반전과 평화의 노래 “이젠 안녕”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집 주소를 외우며 매순간 원혼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환상을 보는 남자. 고향집 주소를 따서 이름 지은 딸 신창이 고엽제 후유증 탓에 정신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그는 절규한다.

    “이제 그만 숨쉬고 싶어. 나를 데려가줘.”

    ‘블루 사이공’은 그 남자 김상사가 이승의 고통을 벗고 편안히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게 도와주는 한판 진혼굿이다.

    만약 김상사를 둘러싼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구구절절 설명했다면 이 뮤지컬은 교훈적이지만 지루한 역사 교과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블루 사이공’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살아남기 위해 미쳐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저 생생히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아무 잘못도 없이 끊임없이 죄를 짓는’ 김상사의 인생 앞에서 관객들은 그와 함께 미쳐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고된 이승의 사슬을 끊고, 오직 살아남기만을 원했던 나약한 자신과 화해하며 떠나는 순간 비로소 그 고통을 털어낸다.

    1996년 초연된 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대상 등 권위 있는 뮤지컬 상을 휩쓴 이 작품이 관객 동원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뮤지컬을 보면서 유쾌해지고 싶은 관객들의 기대를 참혹하게 배신하기 때문이다. ‘블루 사이공’을 보는 동안은 그 누구도 제3자로서 무대를 즐길 여유를 부리지 못한다.

    물론 ‘블루 사이공’에도 웃음을 터뜨리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장치들이 군데군데 숨어 있다. 베트남 정글에서도 젊음을 잃지 않는 익살스런 병사들, 인터미션 후 관객과 함께하는 깜짝 공연, 섬집네와 양촌댁이 보여주는 코믹 연기는 무거운 공기를 순식간에 들뜨게 할 만큼 힘이 있다.

    김상사와 후엔이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펼쳐지는 화려한 연등 축제도 300개의 색등이 뿜어내는 빛깔만큼이나 곱고 아름답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는 순간조차 가슴 한켠이 욱신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앞에서 환히 웃고 있는 그들 모두가 실은 부릅뜬 눈으로 관객석을 향했던 첫 무대의 원혼들임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상황 아래서 ‘평범한 행복’은 존재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그들의 웃음을 통해 절절히 전해지는 탓이다.

    관객들은 조명이 꺼지고 배우들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순간 찾아올 카타르시스를 위해 공연시간 내내 계속되는 아픔을 참고 견뎌야 한다.

    지난 8년간 무대에 올려지면서 관객을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이 뮤지컬은 2월18일 영원히 막을 내릴 예정이다. 원작자이자 극단 ‘모시는 사람들’의 대표인 김정숙씨가 다시는 공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또다시 참전국의 국민이 된 상황에서 반전과 평화를 노래하는 ‘블루 사이공’의 정신은 의미가 없어졌다는 게 그 이유다.

    8년 동안 꾸준한 사랑받아

    하지만 이 뮤지컬을 보내는 마음은 조금도 편안하지 않다. 첫째는 마지막 ‘블루 사이공’이 지금껏 계속돼온 여느 공연보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오직 이 보름간의 무대를 위해 새로 작·편곡한 29곡의 뮤지컬 넘버들과 이 공연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을 듯 열연하는 주ㆍ조연들의 연기는 객석을 사로잡는다.

    끊임없이 전쟁의 참상을 고발했던 김상사가 더 고통스러운 곳으로 떠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블루 사이공’과의 작별을 힘들게 한다.

    “뉴스에서 이라크전에 참전할 젊은이들이 V자를 그리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또 다른 김상사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 가슴이 아팠다”는 김대표의 말처럼, ‘블루 사이공’은 끝나지만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극단 ‘모시는 사람들’은 “이 뮤지컬은 너무 많은 이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이제는 좀더 따뜻하고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로 돌아오고 싶다”고 밝히며 중단의 뜻을 바꾸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뮤지컬이 마지막에 다다를 무렵, 김상사는 고된 인생길의 마지막을 걸으며 홀로 읊조린다.

    “이제 다 왔나. 여기가 거긴가. 아주 먼 여행. 이렇게 짧은 끝, 이렇게 짧은 끝.”

    아쉽고, 때로는 너무나 짧은 끝. ‘블루 사이공’의 마지막도 그렇다. 하지만 그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이 또 다른 시작, 따뜻한 평화의 노래를 가져오기를 기다린다. 2월18일까지, 문의 02-507-0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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