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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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기 100점’림도 놀라 원더풀!

1962년 3월3일 불가능 넘어선 쾌거 … 필드골 42.9% 자유투 87.5% ‘쏙쏙’

  •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younlo54@yahoo.co.kr

    입력2004-02-12 17: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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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경기 100점’림도 놀라 원더풀!

    1960년대 NBA에서 활약한 초특급 센터 윌트 체임벌린의 경기 모습 (왼쪽)과 로커룸에서의 모습.

    농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를 고르라면 십중팔구 마이클 조던을 꼽는다. 조던은 농구에서 구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기술을 완벽하게 보여주었고, 그가 속했던 시카고 불스를 역대 최고의 팀으로 이끌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조던은 농구를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은 선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농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선수는 조던이 아니라 윌트 체임벌린이다.

    필라델피아 워리워스 소속이었던 체임벌린은 1962년 3월3일 뉴욕 닉스와의 정규경기에서 ‘한 경기 100득점’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달성했다. 필라델피아 워리워스는 이날 뉴욕 닉스에 169대 147로 이겼다. 두 팀의 득점 합계도 316점으로 엄청났지만, 더 놀라운 것은 필라델피아가 올린 169점 가운데 60% 이상을 체임벌린이 혼자서 넣었다는 사실이다. 1쿼터 23점, 2쿼터 23점, 3쿼터 28점, 그리고 4쿼터에서는 26점을 몰아넣었다. 체임벌린은 이 경기에서 골만 넣은 게 아니다. 리바운드도 25개나 했고, 어시스트도 2개를 기록했다.

    3점슛 있었다면 100점 능가

    체임벌린은 필드골 36개(72득점), 자유투 28개(28득점)로 꼭 100점을 채웠다. 당시만 해도 3점짜리 득점이 없었기 때문에 100점에 그쳤지, 만약 3점슛 제도가 있었다면 100점을 훨씬 넘었을 것이다. 필드골 성공률은 42.9%였다. 놀라운 것은 자유투 성공률이다. 체임벌린도 대부분의 센터들과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자유투 성공률이 50%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체임벌린을 상대하는 팀들은 파울 작전을 즐겨 썼다. LA 레이커스의 샤킬 오닐을 상대하는 팀들이 자유투 성공률이 50%를 밑도는 그에게 파울 작전을 애용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그런데 이날 체임벌린은 32개의 자유투 가운데 무려 28개를 성공시켜 87.5%의 놀라운 자유투 성공률을 보인 것이다.

    체임벌린이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데는 그의 기록 수립을 위해 끊임없이 어시스트해주고 슈팅을 양보한 동료들의 역할도 컸다. 그러나 아무리 동료들이 자신들을 희생해가며 적극적으로 도와줬다고 하더라도 세계 최정상 무대인 NBA 정식경기에서 혼자서 한 경기에 100점을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체임벌린은 한 경기 100점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 3개월 전, 레이커스를 맞아 78점, 시카고 불스 전에서 73점을 혼자 넣는 등 조금씩 대기록에 다가서고 있었다.



    NBA 14년간 6반칙 퇴장 ‘0’

    체임벌린의 본명은 윌튼 노만 체임벌린이다. 36년 8월21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대기록을 세운 62년 3월 그의 나이는 만 25세였다. 캔자스 대학을 나와 59년 필라델피아 워리워스에 1라운드 3번에 드래프트됐다. 키 216cm, 몸무게 125kg으로 당시 NBA 빅맨들 가운데서도 가장 몸집이 큰 초특급 센터였다. 체임벌린은 데뷔하던 해에 평균 37.6득점을 기록했고, 이듬해에는 38.4득점, 대기록을 세웠던 62년에는 무려 50.4득점을 올렸다.

    내로라하는 선수들도 한 경기 50점을 올리면 기념이 될 만한데 한 시즌 평균 50득점대를 기록했으니 그가 얼마나 뛰어난 골잡이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62년 평균득점 2위를 기록한 윌트 벨라미의 게임당 평균득점은 31.6점이었다. 평균득점 1위와 2위의 차이가 20점 가까이 난 것은 NBA 역사에서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평균득점 20점 차이는 팀당 82경기를 치르는 NBA에서 2위와 1600점이나 득점 차를 벌여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필라델피아 워리워스와 상대하는 팀들은 모든 것을 제쳐두고 체임벌린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체임벌린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더블 팀, 좀더 심하면 트리플 팀까지 걸어봤지만 체임벌린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체임벌린의 라이벌인 빌 러셀은 “체임벌린을 막는 방법은 로커룸에 묶어두든가, 아니면 총으로 쏴버리는 것밖에 없다. 이 같은 추세로 나가다가는 한 경기 100점도 올리고 말 것이다”고 말했다.

    러셀의 우려처럼 한 경기 100점을 올린 체임벌린은 불멸의 기록을 남겼지만 그해 최우수선수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체임벌린의 수상 경력은 화려하다. 60년 신인상을 받았고, 올스타에 7차례 선정됐으며, ‘수비 베스트 5’에 2차례, 최우수선수 4차례, NBA 파이널 최우수선수 1회 등을 차지했다. 체임벌린은 독특한 기록도 갖고 있다. NBA 14년 선수생활 동안 단 한 번도 6반칙 퇴장을 당하지 않은 게 바로 그것. 체임벌린은 78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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