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2

2004.02.19

‘이태백 스트레스’ 어찌하오리까

‘긴장·불안’ 병원 찾는 20대 실업자들 늘어 … “내 탓 아닌 경제 탓” 좌절·열등감부터 벗어야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4-02-12 16: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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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백 스트레스’ 어찌하오리까

    20대 실업자의 스트레스는 방치할 경우 질환이 되기 십상이다.

    요즘 20대는 불안하다. 입시지옥에서 빠져나와 대학생활을 즐기는 것도 잠시, 대학 문보다 더 좁은 취업 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일자리가 지속적으로 줄어들면서 20대의 스트레스는 심각하다. 최근 스트레스와 긴장, 불안감을 이기지 못해 신경정신과를 찾는 20대가 꾸준히 증가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양대구리병원 신경정신과 박용천 교수는 “병원을 찾는 20대의 수가 예전에 비해 크게 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에 따라 특징이 있다”며 “요즘 20대의 특징은 늦은 나이에 사춘기를 겪는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즉 신체적 나이는 성인이지만 정상심리발달이 늦어 정신적으로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신경정신과를 찾는 20대들은 대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알코올중독 등의 증세 때문에 병원을 찾지만, 면담해보면 주체성(identity)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게 박교수의 설명이다.

    요즘 20대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예전의 20대는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는 어린 시절, 부모와 주변 사람들에게 반항하고 방황하면서 독립성을 키우는 사춘기,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인이 될 준비를 하는 시기를 거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요즘 20대는 중·고교 시절에 겪어야 할 이러한 방황을 대학에 들어와서, 또는 대학을 졸업할 나이에 겪는다. 입시에 찌들려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뒤늦게 잠복해 있던 ‘자신의 주체성 찾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 많은 형제들과 북적거리며 성장했던 과거의 아이들과 달리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외동, 기껏해야 형제 한 명이 더 있는 환경에서 자란 탓에 다양한 대인관계를 경험해보지 못해 늦은 나이에 사랑니 나듯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늦은 나이에 사춘기를 겪는 만큼 그에 따른 부작용과 고통이 심하다는 점. 마치 어렸을 때 수두를 앓으면 쉽게 넘어가지만 나이가 들어 앓으면 증상이 심하게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이 사회에 나오면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또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취업이 힘든 현실에서 이들에게 백수의 상황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될 수 있다.

    심리증상 심하면 신체도 이상징후



    2002년 가을 대학을 졸업한 안모씨(29세). 취업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얘기에 ‘코스모스 졸업’을 택했지만 1년 6개월이 다 되도록 한 번도 합격통지를 받아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자신만 힘든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실망하지 않고 계속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합격하지 못하고 번번이 탈락하는 동안 활달한 성격의 안씨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며, 스트레스와 불면증이 심해지고,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결국 안씨 가족들은 안씨를 데리고 신경정신과를 찾기에 이르렀다.

    백수가 됐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좌절감이다. 고등학교나 대학을 나오면 일자리를 얻어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데, 이러한 욕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좌절하게 된다. 좌절 뒤의 심리적 반응은 분노. 분노는 여러 방향으로 표출되는데 밖으로 향하면 사회에 대한 불만, 기존질서에 대한 반발, 충동적 행동 등이 생기고 무조건 남의 탓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쉽게 짜증을 내고,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고 싸우며, 남을 비난하고,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한다. 분노가 자신의 안으로 향하면 불안, 초조, 자기비하, 열등감 등의 심리적 변화가 일어난다. 자기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야단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야단맞는 것과도 비슷하다. 이때는 위축, 자신감 감소, 우울, 안절부절못함, 집중력 감소, 의욕상실, 자살에 대한 생각 등의 심리증상이 나타난다. 이런 심리적 증상과 함께 불면증, 가슴 답답함, 가슴 두근거림, 호흡곤란, 소화불량, 변비나 설사, 생리불순 등의 신체증상도 동반한다.

    ‘이태백 스트레스’ 어찌하오리까
    결국 취업 실패로 인한 스트레스가 병으로 발전하는 셈이다. 박용천 교수는 “‘이태백 스트레스’의 위기를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황하지 않고 현실을 똑바로 보는 것”이라며 “현실을 회피하거나 외면할수록 불안감이나 좌절감이 더욱 커진다”고 충고했다. ‘이태백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취업이 가장 큰 해결책이지만 여건상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만큼 자기 스스로 치료법을 찾아야 한다. 다음은 정신과 전문의들이 ‘이태백’에게 권하는 마음가짐과 자세다.

    첫째, 나라 전체의 불황으로 인해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고통을 겪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위로가 된다. 자신이 못나서가 아니라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자신의 노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 홍수가 났을 때 물에 떠내려가는 돼지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천재지변 때문에 벌어지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인다. 나중에 날씨가 개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듯, 나라 전체의 경제가 나아지면 취업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셋째, 모든 일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 당시에는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런 일이라 하더라도 훗날 그 경험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어쩔 수 없이 군대를 가지만 군대생활이 나중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백수생활을 해본 사람만이 대성할 수 있다고 자기최면을 건다.

    스트레스 해소 비법은 ‘긍정적 사고’

    넷째, 전화위복의 기회로 생각한다. 위기 뒤에 절호의 기회가 오는 것은 운동경기뿐만 아니라 인생살이에도 해당된다. 목매고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난 뒤 시작한 개인사업이 성공해 오히려 자신을 쫓아낸 회사가 고맙게 생각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섯째, 비록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백수기간을 세계관, 인생관을 정립하고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조바심 내지 말고 평소에 소홀히 했던 건강도 챙기고, 취약했던 부분도 보충하면 나중에 취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20대 백수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정신과 전문의들이 마지막으로 꼽은 항목은 ‘긍정적인 사고’다. 고통이 심할 때는 시야가 좁아지고 한 가지 생각에만 빠져 헤어나기 힘든 경우가 많은데 시각을 바꾸고 시야를 넓히면 나아갈 길이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 생각의 방향을 바꾸거나, 혼자서 잘 안 될 경우 다른 사람과 의논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이 일로 인해 너무 스트레스를 받거나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평소 꾸준히 자기관리를 하고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건강을 지키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현명한 20대의 모습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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