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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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서적 시장 ‘만화 독무대’

‘학습’ 강조한 시리즈물 베스트셀러 수위 … 쉽게 읽는 재미에 부모 교육열까지 겹쳐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4-02-12 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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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동서적 시장 ‘만화 독무대’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어린이 책 매장.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만화책을 읽고 있다.

    토요일 오후 4시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넓은 매장 한구석이 유독 붐빈다. 걸어다니기조차 불편할 만큼 복잡한 곳은 바로 어린이책 매장. 부모들은 둘째치고 이곳저곳 작은 공간이라도 있으면 비집고 들어앉아 책 보는 아이들로 인해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아이들이 보는 책의 90% 이상은 만화다. 저마다 책갈피에 코를 박은 채 웃고 탄성 지르고 인상을 찌푸리며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다.

    “만화 말고 사줄 책이 없어요. 과학도 만화, 역사도 만화, 성교육서며 직업 알아보는 책까지 다 만화, 만화…. 동화책이랑 창작동화, 고전 몇 편 빼면 다 그래요.”

    초등학교 5학년, 2학년인 두 아들을 데리고 서점 나들이에 나선 주부 노윤정씨(38·서울 청운동). 아이들이 하도 만화만 봐 다른 책 좀 사주러 왔다는 노씨는 오늘도 또 허탕을 칠 듯하다. 벌써부터 만화책 서너 권을 끼고 앉은 두 아들이 좀처럼 맘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 까닭이다.

    노씨의 말대로 요즘 아동서 매장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만화다. 서점용 아동만화 단행본이 대형서점 주간 종합베스트셀러 순위 안에 들기 시작한 것은 3년여 전부터의 일. 지금은 ‘서바이벌 과학상식’(이하 ‘서바이벌’) 시리즈 8권째인 ‘시베리아에서 살아남기’(아이세움)와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이하 ‘그리스신화’·가나출판사) 18권, ‘마법천자문’(아울북) 3권이 수위에 올라 있다.

    서점용 아동만화 붐이 인 것은 2000년 11월15일 첫 출시된 ‘그리스신화’ 시리즈가 ‘대박’을 터뜨리면서부터다. “박하게 봐도 3년간 1000만권 이상은 팔려나갔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추측. 이어 ‘서바이벌’과 이희재의 ‘삼국지’(아이세움), ‘만화로 보는 북유럽신화’(창해), ‘마법천자문’ 등이 떴고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김우영의 ‘뚱딴지’ 시리즈 등 고전적(?) 작품들도 덩달아 힘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스신화’ 1000만권 이상 팔린 듯

    요즘 어린이책 코너를 ‘도배’하고 있는 만화책들은 어른들이 기억하는 그것과 많이 다르다. 일단 판형부터가 큰 공책 크기만한 4×6변형판(가로 18.5cm, 세로 24.5cm)이다. 책값은 8500원 선. 대본소, 그러니까 ‘만화방’용이 아니라 소장용이라는 뜻이다.

    “흔히 지금 유행하는 것들을 ‘아동학습만화’라고 하는데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서점용 아동만화 단행본이라 해야 맞지요. 고급스럽고 판형도 크고 ‘학습’을 강조한 책들이 많아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거예요.”

    만화전문 기획사 ‘코믹컴’ 홍재철 실장의 설명이다.

    만화평론가인 청강대 만화창작과 박인하 교수도 이에 동의한다.

    “요즘 인기를 끄는 ‘그리스신화’, ‘만화 초한지’, ‘만화 삼국지’ 등을 학습만화라 할 수 있을까요? 이건 그냥 만화입니다. ‘그리스신화’가 대표적이죠. 정형화한 캐릭터, 게임식 서사구조 등 전형적인 일본풍 오락만화예요.”

    아동서적 시장 ‘만화 독무대’

    과학 코너까지 ‘점령’하고 있는 만화책들. 역사, 사회, 수학 분야 등도 마찬가지다.

    서점용 아동만화가 ‘그저 만화가 아니다’라는 ‘착시현상’을 부추기는 것 중에는 우리나라의 출판 분류 방식도 한몫을 하고 있다. 4×6변형판 아동만화 단행본은 출판 통계상 만화가 아니라 ‘아동’ 항목에 잡히도록 되어 있는 것. 요즘 아동서 시장이 커졌다고 하는 데는 사실상 서점용 아동만화 시장의 급팽창이 결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렇다면 아동만화 단행본 시장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출판계에서 아동만화 기획의 대표자로 꼽히는 홍재철 실장의 ‘추정치’를 들어보자.

    “자잘한 건 빼고 베스트셀러 10권만 가지고 대충 계산해보죠. 우리 회사가 관여한 ‘서바이벌’을 기준으로요. 이 시리즈의 경우 지금껏 8권이 나왔는데 매달 각 권 5만권씩이 팔린다고 하면 1년에 60만권이 됩니다. 1년에 4권씩 만들어내고 있으니 1년 단위로는 최소 130만 권이 되겠죠. ‘그리스신화’는 ‘서바이벌’보다 권수가 2배하고도 2권이 더 많으니까 1년에 270만권은 팔렸다고 봐야 하고…. 물론 이건 엄청 짜게 잡은 겁니다. 하여튼 이 두 시리즈만 합쳐도 400만권이 넘거든요. 여기다 ‘마법천자문’이 1년에 50만권 이상…. 이런 식으로 따지면 1년에 얼추 2000만권 이상은 나간다는 게 됩니다. 권당 가격이 보통 8500원, 그러니까 시장 규모가 2000억원 이상은 되는 거죠. 우리나라 출판 시장 규모가 1조6000억원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비중이 엄청난 거죠.”

    그렇다면 이처럼 서점용 아동만화가 기세를 떨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전통적으로 만화는 어린이와 친숙한 분야다. 그렇더라도 2000년대 들어서 초등학생 이하 아이들이 만화에 이처럼 몰두하게 된 이면에는 청소년물로 급성장하던 대본소 만화, 즉 잡지 중심 만화공급체계의 몰락이 자리하고 있다.

    “이전에는 ‘소년챔프’니 ‘아이큐점프’니 하는 ‘메이저리그’에서 밀린 작가들이 학습만화 또는 아동만화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라요. 기존 만화잡지들이라는 게 일본식 만화를 대거 들여와 청소년 대상 시장에서 승부하는 건데, 요즘 청소년들은 게임이다 뭐다 해서 이전만큼 만화를 많이 보지 않거든요. 그런데도 잡지사들은 구태의연한 편집과 형태를 고집해왔어요. 그 와중에 완전히 실종됐던 초등학생 이하 아동만화 시장에 이른바 ‘학습만화’들이 차근차근 또아리를 틀기 시작한 겁니다.”

    박인하 교수의 설명이다.

    잡지 만화 작가들 단행본으로 옮겨

    초등학생이 주 독자인 서점용 만화단행본은 상대적으로 ‘작가’가 중시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기획과 아이디어다. 그럼에도 정통만화잡지를 통해 등단한 주류 작가들 중 상당수가 지금 아동단행본 시장으로 활동의 장을 옮기고 있다. 김린, 정준규, 이희재, 강경효, 김우영 등. ‘용비불패’로 2002년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한 문정후, ‘진짜 사나이’의 박산하, 한겨레신문 만평을 담당했던 박시백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원 소스 멀티유즈, 만화에서 게임·애니메이션·캐릭터 상품 등으로 뻗어나가는 첨단 마케팅의 첨병 역할 또한 서점용 아동만화가 담당하고 있다.

    만화업계 내부 요인 외에 요즘 아이들이 책 읽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도 만화 붐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공부 부담에 짓눌린 아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만화에 탐닉하게 된 것. 부모는 창작동화를 많이 권하지만 지나치게 교훈적이라 재미를 얻기 힘들다. 신기하고 환상적이며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이야기를 양껏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은 부모들의 교육열이다. ‘학습’ 냄새만 풍기면 팔릴 정도라고. 만화대국이라는 일본에서 한 해 나오는 아동용 학습만화가 20여종에 불과한 데 비해 우리나라는 300~400종을 헤아린다.

    초등학교 교사인 김선정씨(36)는 “아이들의 유난히 강한 동류의식, 소유의식도 한 원인일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들이 가진 건 나도 꼭 갖고 싶어하죠. 아이들끼리 ‘너 7권 있냐, 나는 어제 샀다’ 그런 얘기 하는 걸 자주 들을 수 있어요.”

    그래서 아동만화 시리즈물의 경우 일단 베스트셀러가 되면 ‘올라가는 게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팔려나간다. 그래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분야가 바로 아동만화 시장이기도 하다.

    아이들로부터 “만화책 사달라”는 요구에 시달리는 부모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어찌 보면 옛 만화들에 비해 괜찮은 것도 같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공부도 되는 것 같고, 그런데 어떤 경우엔 지나치게 선정적 폭력적이고, ‘이렇게 만화만 봐도 되나’ 슬금슬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웬만한 고전이나 ‘가시고기’ ‘셰익스피어 4대 비극’ 같은 성인용 작품, 심지어 ‘오페라의 유령’까지도 만화로 습득하는 것이 요즘 아이들이다. 조악한 그림, 질 낮은 대사가 난무하는 괴기·엽기·수수께기·연애물 또한 차고 넘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학교도서관분과 서울모임 대표를 맡고 있는 교사 박화연씨는 “만화책이라도 읽는 게 어디냐”고 말했다. 요즘 아이들이 워낙 책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전에 근무한 학교가 주변 환경이 좀 열악했거든요. 그때 같이 근무하던 역사 교사가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만화 삼국지’까지는 관두더라도 TV 드라마를 만화로 만든 ‘여인열전’이니 ‘명성황후’니 ‘상도’니, 하다못해 ‘야인시대’ 같은 거라도 본 애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요. 만화책이라도 읽으면 기본 상식이 쌓이잖아요.”

    ‘예스24’ ‘알라딘’ 등 인터넷 서점 해당 사이트에 들어가 봐도 “책을 전혀 안 보던 애가 책 보는 버릇이 생겼다”는 식의 감상문이 적지 않다. 일본 문부성은 만화를 많이 본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독서량이 월등히 많으므로 만화 독서를 권장한다는 발표를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질이지요. 사실 부모로서 아이에게 마음 놓고 내밀 수 있는 만화가 많지 않아요. ‘오싹오싹 공포체험’이니 뭐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어린이도서연구회 출판문화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인 주부 구현진씨의 걱정이다.

    실제로 서점에 깔려 있는 아동만화 중에는 ‘날림’으로 제작했음이 분명한 책들이 꽤 많다. 출판사 만화기획 담당인 김모씨는 “인세 계약이 아니라 단발성 원고료 계약으로 제작되는 책일수록 문제가 많다. 그런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달까, 그런 책이 어떤 땐 더 잘 팔린다. 출판사로서는 많이 팔아도 인세 나갈 염려가 없으니 서점에 공급 가격 낮춰주고 마케팅 열심히 하고 해서 마구마구 파는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저질 만화 상당수 … 부모가 골라줘야

    “아이들은 99% 충동구매를 합니다. 어른들은 작가니 장르니 나름의 선택 기준이 있지만 아이들은 아니에요. 자기 돈으로 사는 게 아니거든요.(웃음) 그저 재미만 있으면, 심지어 그 재미가 100점짜리이든 50점짜리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그저 아주 재미있으면 반복해 읽고 아니면 두어 번 보고 마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코믹컴’ 홍재철 실장의 설명이다.

    교사 백화연씨는 “하지만 아이들을 너무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만화 삼국지를 읽다 보면 ‘진짜 삼국지’를 읽고 싶어지는 게 사람이죠. 그때부터 중요한 건 바른 독서교육입니다.”

    구현진씨도 “애들이 당장은 만화에 손이 가지만 ‘가장 감명 깊은 책이 뭐냐’고 물으면 결국 양서를 꼽더라”며 “서점에 가 아이에게 직접 ‘좋은 책’과 ‘나쁜 책’을 구분하는 훈련을 시키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가 만화로부터 시작된 독서를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하게 가져갈 수 있느냐는 전적으로 부모 책임”이라고 조언했다.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자면 이런 거다. 예를 들어 아이가 ‘서바이벌’ 시리즈에 재미를 붙였다고 하자. 그럼 그 다음에는 문자의 양이 조금 더 많은 만화과학백과 등을 추천한다. 이어 인체·우주·화학 등 분야별로 깊이 들어가는 학습만화를 사주고, 마지막으로 문자가 주류를 이룬 개념서를 내미는 식이다. 요컨대 부모 자신이 어린 시절 읽은 고전이나 명작동화, 창작동화만 고집하지 말고 역사·과학 등 아이가 만화를 통해 흥미를 보이는 분야로 독서 성향을 확장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사, 어린이도서연구회 관계자, 만화 기획자 등 취재에 응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발 어머니가 좀 먼저 읽어보라. 10쪽만 훑어보면 좋은 책인지 나쁜 책인지 금방 가려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만화가 다 그렇지’ 하는 생각에 짚이는 대로 사주지 말고 목차, 그림, 대사 등을 단 몇 분이라도 찬찬히 훑어보는 성의를 보였으면 하는 것. 박인하 교수는 “연령별, 성별 권장도서 목록을 만들고 바른 만화독서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만화계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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