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2

2004.02.19

범죄 단서 찾아 희미한 ‘기억 속으로’

최면수사 활용 점차 증가 추세 … 미궁에 빠진 사건 결정적 실마리 ‘역할 톡톡’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4-02-12 15: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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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 단서 찾아 희미한 ‘기억 속으로’

    한 최면술사가 피최면자에게 최면을 걸고 있다.

    ”자…, 1월14일 밤의 기억으로 돌아갑니다. 친구들이 어디로 가고 있나요?”

    “영규랑 형이 춘덕산 쪽으로 가고 있어요. 친한 친구랑 형이 밤늦게 산에 들어가는 것이 이상해 3분 정도 따라갔어요. 앞에 어른이 가고 있어요. 어둡고 음산한 것이 무서운 느낌이 들어요.”

    “그 어른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요?”

    “짧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짙은 색 잠바와 청바지를 입은 아저씨요.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신고 있었어요.”

    1월29일 오후 6시경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신경정신과 의원 진료실. 정신과 전문의 변영돈 박사(대한최면치료학회장)가 김모군(11)에게 최면을 걸어 경기 부천시에서 실종된 윤기현(12), 임영규군(11) 두 어린이의 행방을 묻고 있다. 실종된 임군의 친구인 김군은 사라진 두 어린이의 최종 목격자. 1월17일 경찰조사에서 김군이 “친구랑 형이 어른 한 명을 따라 산으로 갔다”고 진술했지만 경찰은 이들이 산으로 갈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 수사를 진전시키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건 해결의 뚜렷한 단서가 없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면수사를 통해 김군의 말이 믿을 만한지 확인해보기로 한 것. 김군이 최면상태에서 일관된 진술을 하자 경찰은 다음날 오전 춘덕산 일대에서 대대적 수색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실종 16일 만에 윤군과 임군의 싸늘한 시신을 발견했다.



    부천 어린이 피살사건 사체 발견에도 한몫

    미궁에 빠진 부천 어린이 피살사건에서 두 어린이의 사체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수사기법은 다름아닌 최면수사였다. 최면수사(hypno-investigation)란 법최면(forensic hypnosis)과 같은 의미로 범죄수사에 최면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건 발생 현장에 단서가 없고 목격자나 피해자만 있을 경우 이들에게 최면을 걸어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수사에 필요한 단서를 얻는 방법이다. 최면수사는 답보 상태의 수사에서 ‘히든 카드’인 셈이다.

    범죄 단서 찾아 희미한 ‘기억 속으로’

    CJ엔터테인먼트 소포폭발물 사건에서 최면수사기법이 수사의 효율성을 높였다. 구로CGV극장에 대한 폭발물 협박 혐의로 구속된 박모씨(왼쪽)와 범행에 사용된 소포폭발물.

    국내의 최면수사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97년 정신과 전문의 박희관씨가 범인의 차량을 본 목격자에게 최면기법으로 차량번호를 회상시켜 범인을 검거한 게 국내 최면수사의 최초 성공사례다. 다음해 박씨가 대한최면수사연구회를 창립하고, 99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의 범죄심리과에 최면수사 전담부서가 설치되면서 최면수사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지난해 초 영화투자제작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사 본사에서 발생한 ‘소포 폭발물’ 사건도 최면수사 기법을 활용해 범인을 잡은 대표적 경우로 꼽힌다. 소포를 CJ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에게 전달했던 비서 김모씨는 최면수사에서 불에 타 없어져버린 우편물의 발송우체국이 ‘구로 역전우체국’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고, 경찰은 이를 토대로 구로 일대의 우체국을 모두 뒤져 수사대상을 압축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김씨는 최면수사 과정에서 포장지에 적혀 있었던 발송우체국 소인은 물론 발신자 이름과 발신주소를 기억해냈고, 경찰은 용의자 박모씨를 검거한 뒤 조사를 통해 최면수사 내용이 모두 사실임을 확인했다.

    지난해 초 충남 당진, 서산, 홍성 일대에서 일어난 어린이 성추행 사건도 최면수사를 통해 범인인 트럭 운전사 김모씨를 검거한 경우. 한 피해 어린이가 최면상태에서 성추행을 당할 당시 트럭 안의 모습을 자세히 떠올렸고, 경찰은 충남 일대의 트럭을 뒤져 어린이가 묘사한 것과 유사한 트럭을 찾아내 범인을 검거했다. 이들은 모두 최면수사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경우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잊고 있던 기억을 최면상태에서 쉽게 떠올릴까. 최면이란 의식보다 무의식이 활동하는 상태다. 잠과 다른 점은 의식이 여전히 깨어 있다는 것. 이 때문에 최면술사와의 대화가 가능하다. 변영돈 박사는 “최면상태에 들어가면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기 쉬워지면서 최면술사의 암시와 유도를 받아 잊은 줄 알았던 예전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최면수사를 통해 얻은 진술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과수의 강덕진 범죄심리과장은 “사람들은 객관적 사실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므로 기억이 왜곡되거나 오염되기 쉽다. 최면상의 진술은 현실에서 다시 확인해야 100% 신뢰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최면수사는 단서만 제공할 뿐 당연히 증거가 돼주지는 않는다는 것. 국과수가 연간 150여건의 최면수사를 실시하고 있으나, 그중 10건 정도만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됐다는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더구나 모든 사람이 최면에 걸릴 수 없다는 것도 최면수사의 걸림돌이다. ‘최면에 걸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뚜렷하거나, 최면 감수성이 높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최면상태에 빠질 수 없다. 고통을 겪은 피해자에게 최면을 걸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고통스러운 상황을 떠올리기 싫어하는 인간의 심리 때문이다.

    학술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으나, 현재 ‘안구(眼球) 회전신호’는 최면 감수성을 측정하는 가장 보편적 척도로 사용된다. 피최면인은 최면술사의 손짓에 따라 안구를 움직이는데 눈에 흰자위가 많은 사람일수록 최면에 잘 걸린다. 반면 최면술사의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거나 의심이 많은 사람은 최면에 잘 걸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 최면수사를 전담하는 곳은 국과수 범죄심리과의 최면수사부서다. 현재 강덕진 범죄심리과장의 지휘 하에 4명의 검사관들이 최면수사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심리학 또는 사회학을 전공한 석사 이상의 사람들로, 최면수사에 가장 정통하다. 현재는 일선 경찰서가 의뢰하면 국과수 검사관들이 최면수사를 실시하고 있다. 아직 경찰에는 ‘최면수사 전담요원’으로 활동하는 경찰관이 없어 수사와 최면수사가 이원화돼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1999년 1월부터 국과수가 대한최면수사연구회와 공동으로 40여명의 경찰에 대해 최면수사 교육을 해오고 있어 곧 ‘최면수사 전담 경찰관’도 탄생할 전망이다. 교육을 마친 20여명의 경찰관 들은 서울, 인천 등 전국 14개 지역의 지방경찰청에 배치돼 ‘인턴 최면수사 경찰관’으로 활동 중이다. 아직 전문가 타이틀을 붙이기엔 이르지만 이들은 일선 경찰서에서 발생한 사건에 최면수사가 필요한지 여부를 판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면수사를 전담하는 곳은 국과수지만, 상황에 따라 최면에 정통한 정신과 전문의들이 최면을 돕기도 한다. 이에 대해 국과수의 한 관계자는 “최면은 누구나 걸 수 있지만 최면수사는 그렇지 않다”며 “정보를 끌어내는 기법 자체가 다르므로 최면수사는 수사에 정통한 사람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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