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2

2004.02.19

“너 죽고 나 살자” … 安風 폭탄 돌리기

1995~96년 신한국당 940억원 규명 원점 … 증인이 된 YS ‘치명적인 상처’ 불 보듯

  • 김기영 기자 hades@donga.com

    입력2004-02-12 14: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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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죽고 나 살자” … 安風 폭탄 돌리기

    2월6일 안풍사건 항소심 재판에서 “940억원은 YS로부터 받은 돈”이라고 진술한 직후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강삼재 의원.2월8일 서울 상도동 배드민턴장에서 최근의 언론보도에 불만을 토로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 2월6일 ‘안풍’ 사건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 고등법원에 출두하고 있는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 (왼쪽 부터).

    한나라당과 김영삼 전 대통령(YS) 진영의 정치생명을 건 ‘폭탄 돌리기’가 서서히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

    2월6일 안기부 예산 횡령사건, 이른바 ‘안풍(安風)’사건 항소심 재판에서 강삼재 의원은 “1995~96년 신한국당 사무총장으로 있을 당시 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 집무실에서 940억원을 받았다”며 1심 재판 때와 달리 940억원의 출처가 YS라고 주장했다.

    강의원은 “(돈을 건네 받을 때)이 돈이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이하 안기부) 자금이 아니라고 확신했으며 재판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동안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돈의 출처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설명은 없었다”며 “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받은 돈이기 때문에 선거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강의원이 사건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중대발언을 했지만 같은 사건의 피고인인 김기섭 당시 안기부 운영차장은 고집스럽게 돈의 출처가 안기부라고 주장했다. “김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에 정치자금을 받지 않아 선거를 앞둔 당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판단해 당에 돈을 지원했다”는 것이었다.

    돈의 출처를 두고 강·김 두 피고인의 진술이 엇갈리면서 안풍사건 재판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됐다. 재판 직후 검찰은 “이미 계좌추적 등을 거쳐 안기부 예산에서 돈이 나온 게 확인된 이상 추가 조사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이었지만 진실을 밝히라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강의원과 김 전 차장에 대한 추가 조사를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항소심 재판부도 또 다른 당사자로 거론된 YS를 3월12일 열릴 재판의 증인으로 채택함으로써 ‘실체적 진실규명’에 나서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사건 자체만 놓고 봐도 안풍사건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건이다. 940억원이라는 거금이 1995~96년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이던 강의원을 통해 신한국당에 입금됐고, 이 돈은 96년 총선자금으로 사용됐다는 것이 이 사건의 큰 줄기. 검찰은 안기부측에서 이 돈을 조달한 사람, 즉 ‘돈의 입구’가 김 전 차장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 돈을 받아 정치자금으로 쓴 사람, 즉 ‘돈의 출구’가 강의원이었고, 두 사람이 공모해 1000억원에 가까운 안기부 예산을 횡령했다는 것이다.

    “너 죽고 나 살자” … 安風 폭탄 돌리기

    정치적 부자관계였던 YS와 강삼재 의원(오른쪽)이 안풍자금을 놓고 맞서고 있다.

    하지만 1심 재판 과정에서 강의원과 김 전 차장은 몇 가지 핵심 쟁점에 대해서 끝내 입을 다물었다. 김 전 차장은 문제의 돈이 안기부 계좌에서 인출된 돈이라는 점을 시인했다. 하지만 “안기부 예산을 빼돌려 누구에게 전달했느냐”는 검찰의 추궁에는 “구체적 전달경로나 누구에게 전했는지는 답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전 차장은 “(전달 경로를)밝혀봐야 나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당시 전달자에게 죽어도 죄를 지을 수 없고, 죽을 때까지 피해를 입힐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라고도 말했다.

    강의원도 “940억원의 돈을 누구에게서 받았느냐”는 검찰 질문에 “우리 당에 도움을 준 사람들이 많다. 15대 총선을 이끌었던 사무총장으로서 당시 우리 당을 도와준 사람과 당 자금의 출처에 대해서 자세한 내역을 밝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검찰 수사와 계좌추적 결과 940억원이라는 돈이 안기부 계좌에서 빠져나가 당시 신한국당으로 흘러 들어가 총선에 쓰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돈의 전달자와 수령자인 두 피고인은 한결같이 누구에게 줬는지, 누구로부터 받았는지에 대해 입을 다무는 상황이 1심 재판 내내 계속됐던 것. 다만 “전달자에게 죽어도 죄를 지을 수 없고, 죽을 때까지 피해를 입힐 수 없다”는 김 전 차장의 진술이나 “우리 당을 도와준 사람과 자금 출처를 밝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는 강의원의 진술을 근거로 두 사람 모두 의리를 저버릴 수 없는 ‘모종의 인물’이 가운데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했다.

    1심 재판 때 검찰은 “돈을 건넨 사람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아니냐”는 취지로 강의원과 김 전 차장을 몰아붙였으나 그럴 때마다 피고인들은 물론 서정우 이주영 안상수 변호사까지 나서 “검사가 비본질적인 질문을 한다”며 제동을 거는 등 소란이 일기도 했다.

    문제의 ‘모종의 인물’에 대해 두 사람이 입을 다물자 검찰은 두 피고인을 직접 연결하려고 했다. 그러려면 강의원과 김 전 차장의 ‘공모’를 뒷받침할 정황증거와 증인이 필요했다. 검찰은 사건 당시 안기부의 김 전 차장 보좌관실에 근무했던 여직원 주모씨를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를 벌였다. 검찰 진술에서 주씨는 “차장님실에는 하루에도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오는데 강삼재씨가 일주일에 두 번, 김현철씨가 일주일에 두 번, 이원종 정무수석이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전화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이 진술을 근거로 두 사람이 안기부 예산횡령을 위한 사전모의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지난해 5월, 증인인 주씨의 사건 당시 신분이 국정원 직원인 까닭에 비공개로 진행된 재판에서 재판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는 진술이 터져나왔다. 서정우 홍준표 정인봉 변호사 등의 집요한 추궁을 받던 증인 주씨가 눈물을 흘리며 “정기적으로 두 사람의 전화를 연결한 기억이 없다”며 검찰 진술을 뒤집어 검사를 당혹스럽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장기욱 변호사는 “주씨가 검찰 진술을 번복하면서 적어도 강의원은 무죄라고 판단했다. 안기부측과 공모해 그쪽 예산을 빼냈다는 정황을 설명할 결정적 증인이 사라진 이상 재판부도 무리하게 공모로 몰아가지 않을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강의원측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지난해 9월1일, 1심 재판부는 특가법상 국고 등 손실죄와 국가정보원법 위반을 인정, 강의원에게 징역 4년에 추징금 731억원을, 김 전 차장에겐 징역 5년에 추징금 125억원을 각각 선고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법정 다툼을 벌였음에도 실형선고와 천문학적 추징금을 선고받자 강의원은 그때부터 누군가를 향해 구조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1심 판결 직후인 지난해 9월, 강의원은 경남 마산 지구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52세의 ‘젊은’ 나이에 5선 관록을 자랑하는 강의원의 돌연한 은퇴선언을 두고 정가 인사들은 “‘정치적 자살’을 선택했다”고 놀라워했다. 강의원의 정계은퇴 선언은 곧, 상도동을 향해 모종의 구조 요청 표시였다는 해석도 이어졌다.

    하지만 YS는 묵묵부답이었다. 상도동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그러자 강의원의 변호인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홍준표 의원과 정인봉 변호사가 국회 안팎에서 “940억원은 사실상 YS의 대선잔금”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돈의 성격에 대한 논쟁을 유도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변호인단 가운데 장기욱 변호사는 상도동 담당이었다. 장의원은 “1심 판결이 난 뒤 거듭 YS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하지만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YS의 일정을 봐서 면담을 잡아주겠다’던 비서진들이 최근에는 ‘그 문제(안풍)에 대해서 어른은 누구와도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사실상 접견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꼭 집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YS는 몇 차례 자신의 속내를 우회적으로 내비치기는 했다. 1월14일, 정인봉 변호사의 “안풍자금은 YS비자금”이라는 주장이 나온 직후 YS는 공개강연장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나는 (안풍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한번 안 한다고 했으면 말 안 한다”고 말했다. 이는 곧 YS가 강의원과 김 전 차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해석됐다. 즉 자신의 가신이었던 두 사람 역시 “한번 말하지 않기로 했으면 끝까지 입을 다물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는 얘기다.

    여기서 남는 의문 몇 가지. 과연 940억원의 출처는 어디일까. 강의원의 주장대로 YS가 이 돈을 건넨 장본인일까. 그렇다면 1995년 지방선거 직전 김덕룡 당시 민자당 사무총장에게 건네진 257억원을 포함해 1200억원에 이르는 이 돈은 어디서 나온 걸까.

    ‘실체적 진실’ 총선 정국 주요 변수로 등장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그 돈이 1992년 대선잔금일 것으로 보고 있다. 대통령 취임 직후 “재벌로부터 정치자금을 전혀 받지 않겠다”고 한 YS의 선언에 비춰, 당선축하금이거나 대통령 재임시절 조성한 통치자금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검찰의 재수사도 안기부 계좌로 옮겨가기 전 이 돈의 성격을 밝히는 쪽으로 맞춰질 전망이다.

    만약 이 돈이 YS의 대선잔금으로 확인되면 어떻게 될까. 정치자금법의 공소시효가 3년인 까닭에 그렇게만 된다면 사건 당사자 모두가 사법처리를 면할 수도 있다. 한나라당도 국고 환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누군가는 ‘정치적 상처’를 피할 수 없다. 구체적으로 YS가 입을 ‘정치적 내상’은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이미 정치 일선을 떠난 YS여서 정치적 상처를 입는다고 그의 입지에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YS는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왜일까. 강씨 변호인단의 한 관계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해석했다.

    “안풍자금이 YS의 통치자금, 또는 대선잔금이라면 누군가 그 돈의 모금에 관여했을 것이다. YS 자신일 수도 있고 핵심 측근 중 누구일 수도 있다. 만약 그 핵심 측근이 아들 현철씨라면 어떻게 될까. 현철씨는 지금 경남 거제에서 17대 총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불행했던 과거를 떨치고 정치인으로 새롭게 출발하려는 현철씨 입장에서 아버지 YS가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에 휩싸인다면 선거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YS가 입을 열지 않는 진짜 이유는 아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2월8일 아침 평소 운동삼아 찾는 상도동 배드민턴장에서 기자들과 만난 YS는 “요즘 방송에서 내가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떠들던데, 나는 매일 이곳에 나와서 운동을 하고 있다. 제대로들 알고나 보도하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이어 YS는 “강의원에게 940억원을 직접 준 게 사실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무엇인가 말을 할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동안 망설이다가 손을 내저은 뒤 승용차에 올랐다.

    과연 이날 아침 YS의 입안을 맴돌았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강의원의 진술 번복으로 새 국면을 맞게 된 안풍사건은 이번에는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것인가. 3월12일 증인으로 채택된 YS가 재판정에 나올 것인가. 나온다면 어떤 진실을 국민에게 들려줄 것인가. 안풍사건은 총선정국의 또 하나의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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