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4

2003.10.09

‘孟母’도 강남으로 갔을까

무리한 강남 이사 ‘득보다 실’ 많아 … 자녀는 학교 적응 힘들고, 부모는 돈 대느라 ‘허리 휘청’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3-10-01 13:5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孟母’도 강남으로 갔을까

    서초구 구반포의 밀집 학원가. 대치동과 더불어 ‘반포’는 또 다른 사교육 1번지다(왼쪽). 올해 3월,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시교육청 민원실에서 자녀들의 강남 전입 서류를 접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학부모들.

    제주도에서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J고등학교로 전학 온 고3 수험생 Y양(18). 그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언니를 따라 2년 전 대치동의 월세 아파트로 이사 왔다. ‘대치동 교육산업’도 ‘강남 파워’도 잘 몰랐던 그의 눈에 비친 서울 친구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요지경 속’. 그는 서울로 이사 오며 ‘세상 보는 눈이 넓어졌다’고 자부하지만 ‘강남 생활’의 개운치 않은 뒷맛에 씁쓸함을 느낀다.

    오후 4시 수업이 끝나면 서울 친구들은 곧장 학원으로 달려간다. Y양은 제주도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며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강남 친구들은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학교에선 ‘학원 숙제’를 한다. 친구들과 사귀기 위해 학원도 다녀봤지만 학원 수업이 도통 맞지 않아 지금은 혼자 공부하고 있다. 제주도 친구들은 “넌 서울 강남의 학교에 다니니 연·고대는 가겠다”고 쉽게 말하는데, 제주도에서 공부할 때에 비해 수능점수는 썩 나아지지 않고 있다.

    성적 압박 심해지고 자신감 잃기 십상

    ‘강남 고등학교의 축제’는 Y양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한다. 축제를 편하게 즐기기 위해 바지를 입고 나타난 그에게 친구들은 “축제 땐 예쁘게 치마를 입고 주변 학교의 멋진 남학생을 초대해야 한다”며 타박이다. 친구들이 입고 나온 옷은 하나같이 ‘명품 브랜드’란다. ‘옷의 브랜드’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도 아닌데, 친구들의 핀잔은 은근히 스트레스다. 제주도에선 문예반 활동을 하며 시화전을 열기 위해 선배들과 작품을 놓고 갑론을박하며 토론도 벌였다. 하지만 서울의 문예반은 정말 다르다. 작품에 대한 토론은커녕 대강 만든 문집을 어떻게 팔아 뒤풀이 자금으로 이용할 것인지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 “이번 축제엔 ‘세븐’이나 ‘플라이 투 더 스카이’ 정도는 와줘야 대박난다”고 이야기하는 걸 보니 학교 축제의 성공 여부는 초대된 ‘연예인’으로 판가름나는 모양이다. 부모님에게 끌려다니며, 풍부한 물질을 향유하는 친구들에게 ‘비판적 사고’는 도통 보이지 않는다. ‘소비문화’에 매몰된 친구들이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진다.

    서울 강남지역은 명실상부한 ‘교육 1번지’ ‘경제 1번지’다. 오늘도 강북지역의 많은 부모들은 ‘자식교육’을 위해, ‘재테크’를 위해 강남 이사를 심사숙고한다. 일단 무리해서 강남에 집을 사두면 집값이 몇 배씩 뛰는 것은 물론이요, 아이들은 보다 다양한 사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덤으로 상류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이웃사촌이 되며, ‘강남에 산다’는 강한 프라이드도 생긴다. 그야말로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강남에 살지 않는 게 바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강남으로 진입하는 것만이 능사인가. 독특한 강남의 교육현장이 강북에서 강남으로 진입한 일부 사람들에게 오히려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모 언론사 간부의 딸인 A양(18)은 지난해 더 나은 교육환경을 찾아 서초구 반포동의 아파트 단지로 이사했다. 많은 학생들이 명문대에 진학하는 ‘S여고’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강북에서 공부를 곧잘 했던 A양은 좋은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리라 맘먹었지만 막상 학교생활에 적응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자신보다 뛰어난 학생들을 보며 성적에 대한 압박감이 심해졌고, 점차 자신감을 잃으면서 방황하기 시작했다. 결국 A양은 다시 강북의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단을 내렸다. 올해 배화여고로 전학 간 A양은 “비록 집에서 먼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강남에 있을 때보다 훨씬 숨통이 트인다”고 털어놓았다.

    ‘孟母’도 강남으로 갔을까

    강남구 도곡동타워팰리스 인근의 고층 아파트촌.

    상대적으로 불리한 내신 때문에 강남으로 이사 온 것을 후회하는 학부모도 있다. 3년 전 딸 J모양을 데리고 강북에서 강남구 역삼동으로 이사 온 김모씨는 “딸이 강북에 있었다면 연·고대는 족히 갔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고 있다. 강남구 역삼동 J여고로 전학 온 후 강북지역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던 J양의 내신등급이 뚝 떨어졌다. 그래도 ‘수능성적’은 오를 거라 기대했던 김씨의 바람과 달리 수능성적도 기대 이하였다. 반면 강북지역에서 J양과 1, 2등을 다투던 친구들은 수시모집에 합격해 명문대에 입학했다. 김씨는 자신의 욕심이 오히려 딸에게 해가 된 게 아닌가 해서 가슴을 치는 중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동덕여고(서초구 방배동) 전상용 교사는 “강남의 교육효과는 실질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며, 자녀들이 부모의 욕심을 따라가지 못해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당장 다른 지역에서 강남으로 전학 온 학생의 경우 배우는 과목도, 학습 진도도 달라 학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전교사는 “지방에서 1등을 하던 학생이 서울로 전학 온 후 자신의 등수에 충격을 받고 줄곧 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도 봤다”며 잘못된 강남 집중 현상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서울교대의 박명기 교수는 “강남에 전학 온 학생이 과도한 경쟁과 학습 부담으로 잘 적응하지 못할 경우 심리적·정신적 성장에 타격을 받기 쉽다”고 설명한다. 학원이 경쟁적으로 학생에게 요구하는 ‘과도한 학습량’이 학생들의 학습욕구를 반감시킬 뿐더러 학업에서 성취감을 맛보지 못한 학생들에게 불안감을 고조시키기 때문이다.

    학업 성취도뿐 아니라 가치관 형성에 있어서 강남지역의 교육을 고민하는 시각도 있다. 부부 교사인 30대의 이모씨는 강동구 고덕동의 30평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초등학생인 아들을 강남의 한 초등학교에 보내고 있다. 아들이 최근 학교에서 돌아와 던진 말에 이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엄마, 우리 집이 그렇게 가난해? 우리 반 애들 모두 강남에 집이 있는데, 우리 집만 강동구에 있다고 아이들이 가난하다고 놀려요.”

    이씨는 “초등학생들의 머릿속에 뿌리내린 ‘강남 중심주의’가 자칫 잘못된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다”며 아이들의 맹랑한 대화에 대해 우려했다.

    부산에 살다가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로 전학 온 Y모군은 강남 아이들의 텃세에 심한 마음고생을 겪었다. 유군이 옷을 허름하게 입었다며 서울 친구들은 그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나물과 김치가 들어 있는 도시락통에 침을 뱉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선생님은 유군의 부모에게 “아이에게 깨끗한 옷을 입혀 보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유군은 갖은 수모를 참으며 서서히 강남 생활에 적응했지만 당시 입었던 마음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고 있다.

    무리하게 강남으로 진입한 학부모들의 재테크 실패도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다. 강북지역에 있는 집을 팔고 강남지역에 전세 든 학부모에게 재테크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강남에 집을 구입해 이사 온 학부모의 경우 두세 배로 뛴 집값으로 실속을 차릴 수 있지만, ‘전세족’들은 계속 상승하는 전셋값을 치르기도 벅차다. 그나마 강북지역에 집이라도 갖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전세족’은 아파트와 연립주택을 전전하며 자녀의 사교육비를 대느라 헐떡거린다. 자녀교육을 위해 집을 팔고 저축은커녕 매달 지출할 돈을 벌어들이기도 바쁜 상황인 것이다. 올해 중구 중림동의 집을 팔고 서초구 서초동의 아파트 단지에 전세 든 이모씨(41)는 “판 집의 가격이 수천만원씩 오르는 것을 보며 무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닌지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맞벌이 부부가 고정적인 수입을 기대하며 강남의 아파트에 월세로 진입한 경우 부부 중 한 사람이 실직하게 되면 역시 어려움에 직면한다. 매달 50만~ 60만원의 월세와 자녀의 사교육비까지 감당하려면 이들 부부가 재테크를 할 여유란 거의 없다. 강남구 대치동 아파트의 전세금을 빼 연립주택으로 이사 간 한 어머니는 파출부 일을 하며 자녀들의 학비를 대고 있다. 아이들이 성공하면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그는 끝 모를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학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보았을 강남 진출의 환상. 성공적으로 자녀를 대학에 보내고, 오른 집값에 기뻐하는 ‘해피한 강남족’의 이면엔 ‘버둥대는 강남족’의 신음소리가 숨어 있다. ‘함께하는 교육 시민의 모임’의 김정명신 대표는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무리하게 강남에 산다는 것은 오히려 부모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강남 브랜드’를 무조건적으로 신봉하기에 앞서 강남 진출이 당신과 자녀에게 가져올 이해득실을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을 위한 선행작업인지 모른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