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7

2003.08.14

줄잇는 사건, 꼬리무는 ‘음모론’

굿모닝게이트·양길승 파문에도 어김없이 등장 … 노대통령 측근 386에 의혹 어린 시선

  • 김기영 기자 hades@donga.com

    입력2003-08-06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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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잇는 사건, 꼬리무는 ‘음모론’

    정대철 대표(왼쪽 사진 맨 오른쪽)에 대한 검찰수사의 배후에 대통령의 386 측근들이 있다는 음모론이 제기됐다. 신주류의 신당 추진 움직임의 배후에도 386 책사들의 전략이 숨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노무현 대통령은 유난히 ‘음모론’과 인연이 많은 정치인이다. 노대통령은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경선 때 한바탕 음모론에 시달렸다. 그 후로도 노대통령은 잠시도 음모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정당정치에서 손을 뗐다”는 노대통령의 선언과 관계없이 정치권에 일이 터질 때마다 대통령의 측근들이 개입됐다는 음모론이 춤을 췄다.

    음모론은 소수파 정권이 겪어야 할 당연한 통과의례일까. 청와대의 주장처럼 일부 언론이 음모론을 양산하고 있을 뿐, 실상은 공개된 장소에서 투명하게 정치행위가 이뤄지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반론만으로는 음모론으로 날이 새고 가는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음모론을 탄생시키는 토양과 그 정치적 배경은 무엇일까. 그리고 노대통령이 음모론에서 해방될 방법은 없을까.

    대선후보 경선 땐 ‘청와대 음모론’으로 반사이익

    지난해 3월 이른바 ‘노풍(盧風)’이 일자 대선후보 경선 직전까지 당내 여론조사 1위였던 이인제 후보는 갑작스런 노후보의 약진을 “배후에 청와대의 음모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보측이 제기한 음모론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음모론을 거론할수록 이후보의 표는 달아났고 노후보의 승리만 굳어졌을 뿐이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 이후 노대통령이 겪어온 음모론은 그 양상이 다르다. 후보 시절에는 음모론이 약자였던 노대통령의 입지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했다면 대통령이 된 뒤의 음모론은 노무현 정권의 취약점을 더욱 크게 부각시키는 작용을 했다. 마침내는 정권의 이미지에 타격을 줄 정도로 음모론의 양상은 공격적이고 집요하다.

    굿모닝시티 윤창열 대표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는 민주당 정대철 대표측은 이 사건의 배후에 노대통령과 가까운 ‘386’ 청와대 인사들이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른바 ‘정대철을 죽이려는 청와대 386들의 음모’가 ‘굿모닝게이트’의 본질이라는 것. 이 같은 정대표측의 주장은 7월 중순 동아일보가 여권 고위인사의 전언을 근거로 5명의 현직 여야 정치인이 굿모닝시티 비자금을 수수했다는 보도를 내보내면서 더욱 힘을 받았다. 동아일보에 문제의 기사내용을 확인해준 여권 인사가 386세대로 분류되는 박범계 민정2비서관인 것으로 전해지면서 청와대 386이 이 사건에 개입했다는 의혹은 날개를 달고 퍼져나갔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정정보도를 하고 대(對)국민 사과를 하면서 음모론은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정대표측은 여전히 사건 배후에 청와대 386이 있다는 설에 무게를 두고 있다.

    줄잇는 사건, 꼬리무는 ‘음모론’

    노무현 대통령 측근 386의 대표격인 안희정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각종 음모설이 나돌때마다 그를 비롯한 대통령 측근들이 음모설의 주역으로 거론된다.

    여권의 한 인사는 “정대표와 노대통령 측근 386인사들 사이에 정치개혁과 신당을 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특히 청와대 386들은 오래 전부터 정대표의 처신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생각해왔다. 기회주의자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386인사들은 5월16일 결성된 신당추진모임을 신당 창당의 원동력으로 삼으려 했다. 당시 강하게 신당을 밀어붙였다면 오늘날과 같은 혼란은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당시 신당 추진 움직임에 결정적 제동을 건 인물이 정대표라는 게 이들 386의 판단이다. 신당추진모임 결성 직후 정대표가 나서 ‘통합을 모색해보겠다’고 하는 바람에 신당모임이 주춤했고 결국 오늘날의 혼란이 초래됐다는 것이다. 386세대를 비롯한 신당 추진 인사의 시각에서 정대표는 사실상 신당의 걸림돌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시각은 386인사들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국가전략연구소의 386세대 한 고위인사의 말이다.

    “국가전략연구소를 중심으로 신당에 관한 치밀한 전략을 만들어왔다. 전략은 흠잡을 데 없었다. 그런데 리더십의 부재가 결정적으로 일을 꼬이게 했다. 아무리 좋은 전략을 만들어줘도 신당 핵심인사들이 소화를 못하니 우린들 어떻게 하겠나.”

    구체적인 인물을 지명하지는 않았지만, 이 말에는 정대표 등 신당추진세력 리더를 향한 노골적인 불만이 묻어 있다. 정대표가 검찰의 소환장에 시달리고 있을 때 안희정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이 한 시사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신당의 사무총장을 하고 싶다”고 발언한 것도 문제가 됐다. 더 이상 기성세대에게 정치판을 맡겨둘 수 없다는 현정권 386 진영의 심경이 안부소장의 발언을 통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런 386세대의 볼멘소리가 ‘정대철 제거 음모론’의 근거가 됐던 것이다.

    시스템 자리잡으면 음모론도 사라질까

    하지만 아직까지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다. 민주당 주변에서도 “특정 인사를 제거하는 데 고도의 음성적 정치적 술수를 동원할 만큼 386세대가 정치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양길승 청와대 제1부속실장 향응 사건에도 음모론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사건 초기, 음모론은 청와대 내부의 권력암투라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양실장은 지난해 경선 무렵 노무현 캠프에 합류한 인물로 광주·전남지역 노풍 점화에 상당한 역할을 한 인물. 그 공을 높이 산 노대통령이 경선 이후는 물론, 청와대 입성 뒤에도 양실장을 가까이 두면서 중용했는데 이 때문에 오랫동안 노대통령과 고락을 함께 해온 측근 386들이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게 음모론의 배경이다. 그러니까 청와대 386들이 양실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청주 향응 사건이 언론에 크게 부각됐다는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음모의 배후인물로 K대 출신 행정관과 Y대 출신 비서관의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구체적 근거를 찾지 못한 채 음모론은 또 다른 양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번 사건이 불거지는 과정에서 특정 세력이 집요한 언론플레이를 했는데, 그 수법이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는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이번 사건의 배후에 특정 정치세력이 개입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 구체적으로 고영구 국가정보원장(이하 국정원장) 취임에 반대해온 국가정보원 일부 세력이 개입했다는 설에서부터 노대통령에게 치명적 타격을 가하기 위한 여권 비주류의 공작이라는 설까지 다양한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번 사건을 대하는 노대통령의 대응도 의혹을 키우는 원인이 됐다. 양실장의 사표를 받는 등 즉각적인 사태 수습을 유보한 채 몰래카메라 촬영 세력을 밝히는 쪽으로 검찰수사의 초점이 옮겨간 것은 곧 대통령 스스로 사건의 배후에 ‘불순세력’의 음모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냐는 분석이다.

    물론 이런 주장들을 뒷받침할 물증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은 청주지역 유흥가 상권을 둘러싼 내분으로 좁혀지고 있지만 이 사건과 관련, 시중에 나돈 음모설을 잠재우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듯하다.

    그러면 왜 중요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음모론이 춤을 출까. 이에 대해 노대통령과 가까운 한 전직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 정권에서 권력의 핵심은 크게 네 사람이었다. 청와대 비서실장과 국무총리, 국정원장과 여당 대표가 그 장본인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4곳의 핵심 포스트에 자신의 측근을 심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 결과 여당과 국회, 청와대와 정부가 대통령의 의중대로 막힘 없이 돌아갔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의도적이다 싶게 이 네 포스트의 힘을 뺐다. 문희상 비서실장은 더 이상 청와대의 2인자가 아니다. 장관급 인사만도 문실장 외에 이정우 정책실장과 나종일 국가보좌관이 있다. 책임총리제를 도입하겠다고 했지만 고건 총리를 책임총리로 보는 사람은 없다. 국정원장은 어떤가. 고원장은 임명 당시부터 노대통령이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한 인물이다. 정대표는 허울뿐인 당대표가 됐다. 이렇게 권력의 요직이 무력해지면서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 쏠렸고 대통령의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측근 386들에게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정치적 사건이 터질 때마다 386음모론이 뒤따르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 때문이다.”

    이 인사의 주장대로라면 노무현 정권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음모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듯하다. ‘시스템이 다스리는 나라’를 표방한 이상 앞으로도 주요 포스트 4인방이 두드러질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노대통령의 바람대로 시스템이 자리를 잡으면 음모론도 사라질까. 장담하기에는 이르다. 우리 국민 누구도 시스템이 다스리는 나라를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기에 음모론도 기승을 부리는 것 아닐까.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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