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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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함과 매력에 ‘두 번 미칠 뻔’

  • 김남용/ 여행작가 kimstravel@joins.com

    입력2003-07-24 1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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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긋지긋함과 매력에 ‘두 번 미칠 뻔’

    해발 523m에 위치한 치비텔라 인 발 디 치아나 전경.

    ‘이탈리아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토스카나 지방을 자전거로 한창 여행중이던 며칠 전, 나는 이번 여행기를 이렇게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제 여행을 마치고 피사에서 로마행 기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토스카나는 사람을 두 번 미치게 만든다. 도착할 때와 떠날 때.’

    이것이 바로 ‘문화적 충격’

    8일 전 뮌헨에서 베네치아행 야간열차로 갈아타면서 나는 문화적 충격에 빠졌다. 권태로운 표정의 승객들, 큰 소리로 승객과 말다툼하는 역무원, 최고 10배를 호가하는 관광지 물가…. 독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풍경들이다. ‘그래, 여기는 이탈리아지. 그동안 독일에서 너무 환대받은 거야.’



    토스카나의 중심 도시인 피렌체로 자리를 옮겨 아레쪼, 시에나 등의 도시를 거점으로 삼아 이동하는 동안 놀랄 일은 끊이지 않았다. 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거가 마구 뒤엉켜 달리는 거리, 신호를 아예 무시하는 운전자의 운전 매너, 자전거길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도로구조…. 자연조건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35℃를 넘나드는 무더운 날씨와 머리 위로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끊임없이 반복되는 오르막과 내리막길, 그늘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도시의 거리….

    산 지미냐노에서 만난 한국 여행객에게 이런 불안을 털어놓자 그는 놀라워했다. “그래요? 저는 이탈리아가 너무 좋은데…. 그러면 로마에 가보세요. 여긴 고작해야 중세도시잖아요.”

    그렇다. 여행을 통해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그가 감동해 마지않던 로마에 대해 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소매치기를 조심하느라 바짝 긴장한 여행객들이 넘치는 대도시보다는 자전거를 묶어두지 않아도 별일 없는 토스카나 시골길이 더 좋은 것이다.

    토스카나 지방은 이탈리아 중북부의 아펜니노 산맥과 티레니아 해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역사적으로는 고대 에트루리아 문명의 발상지다. 에트루리아 문명은 기원전 7세기에 로마에 왕조를 세울 정도로 번성했으나 그 후 로마제국과의 수십 년에 걸친 전쟁에서 패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누군가 내게 토스카나의 깃발을 만들라고 하면 나는 황토색과 녹색, 쪽빛을 사용해 삼색기를 만들 것이다. 지루하지 않을 만큼의 규모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황토흙, 밝은 금빛의 밀밭과 해바라기밭, 그리고 이 지방 특유의 석회석으로 만든 집 ‘파토리아’가 빚어내는 황토색, 하늘 높이 솟은 실편백나무들과 올리브나무의 녹색, 여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비를 뿌리지 않은 푸른 하늘의 빛깔…. 자전거를 타고 가로지르는 토스카나의 언덕과 평야에 그 세 가지 색이 녹아 있다.

    지긋지긋함과 매력에 ‘두 번 미칠 뻔’

    토스카나를 구성하는 선명한 ‘원색’. 해바라기, 황토, 실편백나무(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피렌체를 출발해 아레쪼와 시에나를 여행하는 3일 동안 초반 10~20km 구간은 항상 오르막길이었다. 어떤 구간은 몇 km씩 오르막길이 계속돼 오전부터 체력이 바닥나기도 했다. 햇볕보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지열이 더 뜨거운 한낮부터는 자전거 타는 게 힘에 부쳤지만 쉴 만한 곳이 없었다. 치비텔라 인 발 디 치아나와 산 지미냐노를 만나지 못했다면 오랫동안 이탈리아에서의 힘들었던 기억을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치비텔라 인 발 디 치아나는 아레쪼에서 시에나로 가는 지방도로 20km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15km 지점을 지나면서부터 저 멀리 높은 산 꼭대기에 있는 무너진 성과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집들이 보였다. 나는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저 마을로 향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멀리서 보기에도 높은 곳이라면 오르막이 보통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17km 지점부터는 오르막길에서 자전거를 끌고 갔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경사가 그리 심한 곳이 아닌데도 시작을 그렇게 했더니 새삼 자전거를 타고 갈 수가 없다. 한번 내려오면 다시 올라타기 힘들고, 한번 올라타면 다시 내려오기 힘든 게 자전거다.

    다행히도 20km 지점에서 도로는 더 이상 산꼭대기 마을로 향하지 않았다. 직진을 하면 시에나행 내리막길이고, 좌회전을 하면 치비텔라로 가는 오르막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마음은 편한 직진길로 향하는데, 몸은 계속 자전거를 끌고 좌회전해 오르막을 오른다. 그렇게 자전거를 끌고 해발 523m 지점의 치비텔라까지 갔다.

    이 도시는 관광지도에서도 찾기 어려운 작은 마을이다. 무너진 성곽이 산 정상에 있지만 그 기원도, 역사도 알 수가 없다. 치비텔라는 무너진 성곽 아래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죽 늘어선 집들의 현관과 창문마다 예쁜 꽃이 장식돼 있다.

    이 마을의 한 레스토랑에서 ‘토스카노’라는 음식을 먹었는데, 이탈리아에서 처음 본 ‘보기 좋은’ 음식이었다.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더불어 유럽에서 맛있는 요리를 즐길 수 있는 국가로 손꼽힌다. 그러나 실제 여행을 하다 보면 왜 사람들이 이탈리아 음식을 찬미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피자를 주문하면 딱딱한 밀가루 위에 다 식어버린 치즈가 얹혀 나오는 게 고작이다. 스파게티의 경우에도 ‘미트 소스 스파게티’를 주문하면 그야말로 붉은 고기 소스를 얹은 스파게티,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를 주문하면 고기와 양념을 죄다 빼버리고 토마토 소스만 얹은 볼품없는 스파게티가 나온다.

    치비텔라에서도 스파게티가 먹고 싶어서 메뉴판을 봤는데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어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터득한 방법은 이럴 때 그 지방 이름을 딴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다. 대개는 대중적이고 값도 싼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날도 별 기대 없이 ‘토스카노’라는 음식을 주문했다. 마늘빵 4조각에 각기 다른 토핑을 얹은 아주 예쁘게 생긴 음식이 나왔다. 여행중에 이렇게 뜻밖에 만난 좋은 음식은 가난한 여행자에게 여행할 힘을 준다.

    지긋지긋함과 매력에 ‘두 번 미칠 뻔’

    토스카나에서 만난 맛있는 음식들인 리보르노의 스파게티(위 왼쪽)와 치비텔라의 토스카노.중세의 탑이 솟아 있는 산 지미냐노 전경(아래).

    토스카나 여행 4일째, 시에나를 거쳐 산 지미냐노로 향했다. 38km에 불과한 이 여행길이 지금껏 경험한 여정 중 가장 힘들었다. 첫 20km 구간은 아름다운 산길이다. 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 벨기에 청년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달리는데 갑자기 오른쪽 페달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독일 로텐부르크에서 페달이 빠진 적이 있었는데, 페달과 앞 기어 축대의 이가 맞지 않은 것을 억지로 조여둔 게 탈이 난 것이다. 스패너로 페달을 조이자 뜨거운 날씨 탓인지 축대 안쪽의 나사선이 모두 꺾여져 나가 아예 쓸 수 없게 됐다. 앞 기어 전체를 바꿔야 할 것 같다. 이탈리아에서는 좀처럼 자전거포를 찾기 어렵다. 더구나 일요일이었다.

    자전거를 타면서 스스로에게 매일 하는 말이 있다. ‘힘들면 걸어도 돼. 그래도 힘들면 쉬었다 가고…. 다만 포기하지는 마.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어.’ 그래, 걷자.

    7km 정도를 걸으니 포지방시라는 도시가 나왔다. 길가의 한 남자에게 사정을 말하니, 2km만 돌아가면 자전거포가 두어 곳 있단다. 오늘은 일요일이니 여기서 자고 내일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충고한다. 내가 가려는 산 지미냐노는 앞으로 7km를 더 가야 하는데 거기에 자전거포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단다.

    2km의 확실함과 7km의 불확실함…. 나무그늘에 앉아 물을 들이켜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포지방시에서 머물면 산 지미냐노는 내일부터 ‘불확실하게’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 산 지미냐노에 가면 산 지미냐노를 파악한 후, ‘확실한’ 일정을 짤 수가 있다. 또 다른 사람은 산 지미냐노에도 자전거포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가자.

    포지방시에서부터 해발 324m에 위치한 산 지미냐노까지는 내내 오르막길이다. 힘들면 50m, 더 힘들면 몇 발짝마다 쉬었다. 다음날 산 지미냐노에 있는 자전거포에 들렀는데 내 자전거에 맞는 부품이 없다고 해 결국 버스를 타고 포지방시에 다녀와야 했다. 하지만 내 선택은 옳았다. 아름다운 산 지미냐노에서 이틀을 묵을 수 있었으니까.

    산 지미냐노는 중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다. 주민이 7000명 정도인 작은 마을 곳곳에 수십m 높이의 탑들이 솟아 있다. 교황파와 황제파로 나뉜 봉건 영주들의 대립과 경쟁이 나은 결과물이다. 14세기에는 72개의 탑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13개만이 남아 있다. 하늘 높이 솟은 직육면체의 탑들은 ‘왜 저 정도에서 멈췄을까?’ 싶을 정도로 견고한 모습이다.

    또 산 지미냐노에는 괜찮은 캠핑장이 있다. ‘산타루치아 캠핑장’이라는 캠핑장은 나무그늘 속에 텐트를 칠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다. 이탈리아의 캠핑장을 이용하다 보면 이탈리아 사람들의 문화적 역량을 의심하게 될 정도로 시설이 열악한 곳이 많다. 캠핑장 전체를 경사면으로 해놓거나, 캠핑장에 자갈을 잔뜩 깔아놓은 곳도 있다. 그러나 이 캠핑장은 다소 비싼 사용료 10.80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쾌적하다. 인근에 깨끗한 수영장이 있는 점도 장점이다.

    지긋지긋함과 매력에 ‘두 번 미칠 뻔’

    여행 도중 만난 자전거 여행에 나선 벨기에 청년들.

    토스카나 여행 막바지에 바다가 보고 싶어서 해안마을 리보르노로 향했다. 그런데 50km나 달렸을까? 출출하다는 생각이 들어 피잣집을 찾았다. 하지만 문을 연 곳이 없다. 이곳의 피잣집들은 더운 날씨 때문에 대부분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문을 닫는다고 한다. 어렵게 찾은 한 마을의 레스토랑에서 미트소스 스파게티를 시키는데 아주머니가 못 알아듣는다. 내 팔뚝살을 만져 보이며 설명하자 “토마토 껍질은 빼고 달라는 뜻이냐?”고 이탈리아어로 묻는다. 주방 냉장고를 뒤져 고기를 가리키며 이걸 섞어달라고 하자, 짜증 섞인 얼굴로 안 된단다. ‘아니, 아무리 말이 안 통해도 그렇지 손님에게 짜증을 내나?’ 나도 그만 짜증이 난다. “그래요, 아무거나 주세요.”

    그렇게 실랑이 끝에 나온 스파게티 맛이 그러나 일품이다. 따뜻한 토마토 소스에 치즈가루가 엉기는 맛이 담백한 게 그만이다. 역시 맛있는 음식점은 숨어 있는 법. 아주머니가 ‘입맛에 맞느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비로소 아주머니가 활짝 웃는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1.5ℓ병에 물까지 가득 담아준다.

    생각해보니, 토스카나에서 만난 이탈리아의 모습 중에는 우리와 닮은 것이 참 많다. 그중 하나가 쌀이다. 피렌체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쌀’을 사서 밥을 해 먹으려다 포기하고 쌀을 버렸다. 쌀알은 익힐수록 벌레처럼 커지는 데다 타지도 익지도 않은 채 물렁물렁하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쌀이 아니라 파스타의 일종인 것 같다.

    그런데 산 지미냐노에서 우연하게 ‘우리 쌀’을 발견했다. 유럽여행을 시작한 후 처음 본, 작고 찰진 쌀이다. 리보르노에 와서 밥을 해보니 밥이 제대로 되었다. 생산지를 보니 볼로냐산 쌀이다.

    쌀말고도 우리와 닮은 것이 있다. 독일사람들은 대부분 탄산수를 마시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우리가 먹는 ‘순수한’ 물을 마신다. 또 서양 사람들이 마늘을 싫어한다는 소문과 달리 스파게티 위에는 두꺼운 마늘쪽이 곰살맞게 얹혀 있다. 지형도 비슷하다. 아펜니노 산맥이 태백산맥처럼 국토의 등줄기를 이루고 있고, 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남자들이 우리나라 남자들과 똑같다’는 말도 사실일까? 잘 웃지 않고, 불친절하고, 매너 없고, 그러면서도 약간은 수다스럽고, 예쁜 여자들을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원칙보다는 융통성을 중시하는…. 8일 전 내가 지긋지긋해했던 이탈리아와의 첫 만남은 어찌 보면 우리와 닮은 데가 있다.

    지금 나는 로마에 와 있다. 리보르노에서 30km를 달려 피사로, 피사에서 다시 4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로마로 내려오면서 누군가 독일과 이탈리아 중 어느 나라에 다시 가고 싶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하고 생각해본다. 에어컨도 없이 굉음을 내며 토스카나를 달리는 이탈리아 기차 안에서 나는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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