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5

2003.07.31

순례자 줄잇는 ‘반세계화의 성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무장봉기 10년 … 지도자 ‘마르코스’ 서구 젊은이들에게까지 추앙받아

  • 글·사진/ 멕시코 치아파스=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3-07-24 1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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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자 줄잇는 ‘반세계화의 성지’

    복면을 한 ‘마르코스’(가운데)와 EZLN 지휘부 모습.

    1994년 1월1일, 사람들은 이날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한 날로 기억한다.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를 한데 묶는 지역경제체제의 등장은 경제단위의 블록화와 자유무역의 상징이다. 바로 그날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의 식민도시 산크리스토발은 검은 복면을 한 무장 게릴라에게 점령당했다. 그들은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투쟁을 계속할까.

    산크리스토발은 생각보다 멀었다. 서울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까지 비행기로 11시간, 다시 멕시코시티까지 3시간을 가고도, 과테말라와 국경을 맞댄 치아파스의 주도(州都) 뚝스뜰라까지 2시간을 더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러고도 버스를 타고 3시간을 해발 2000m가 넘는 고봉준령을 넘어서야 산크리스토발에 도착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은 바로 10여년간 이 치아파스 주를 근거로 무장투쟁을 벌여왔다. 뚝스뜰라에서 시작해 산크리스토발을 거쳐 과테말라까지 뻗어 있는 ‘라칸도나 정글’이 검은 스키용 복면으로 널리 알려진 마르코스의 본거지다.

    마르코스가 누구인가.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비견되는 거사로 칭송받았던, 2001년 봄 3000km 행군을 이끈 인물이 아니던가. 3월11일 그가 반군과 함께 멕시코시티로 입성하자 소칼로(중앙광장)에 운집한 수십만 군중은 ‘마르코스’를 연호하며 취임 99일째의 폭스 대통령을 잔뜩 긴장시켰다. 스키용 복면을 한 채 연방의회 연설까지 마친 마르코스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정글로 돌아갔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는 이후 양심수 석방 등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올 4월 멕시코 지식인들과 함께 이라크전 반대 집회를 한 EZLN이 새로운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산크리스토발로 가기 전 뚝스뜰라에서 만난 택시운전사는 “원주민 출신이라면 당연히 사파티스타를 지지한다. 이들은 우리에게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했다”고 말했다.

    사파티스타란 1911년 농민을 이끌고 멕시코 혁명에 참가한 농민혁명군 지도자 사파타의 뜻을 지지하고 이어받고자 모인 그룹이다. 사파타는 농민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한다는 멕시코 헌법 제27조의 기초를 다져놓은 농민의 우상이다. 이런 연유로 산크리스토발은 이미 전 세계 좌파들에게 ‘반세계화의 성지’로 추앙받고 있다.



    산크리스토발로 가는 버스는 해발 2000m의 고봉준령을 헤치며 밀림지역으로 향했다. 치아파스의 가난이 한눈에 들어왔다. 총을 멘 멕시코 정규군을 태운 군용 트럭도 자주 눈에 띄었다. 동행한 안내인이 “사파티스타와 마르코스라는 말을 함부로 꺼내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는 무장봉기가 일어난 후 10년 동안 수백명의 원주민 반군 동조자들이 정부군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일부는 무참히 학살됐다고 귀띔했다. 이곳은 마약 재배와 종교를 둘러싼 갈등까지 더해져 세계적 분쟁지역으로 떠올랐다.

    순례자 줄잇는 ‘반세계화의 성지’

    원주민의 사회 문화 중심지 ‘아과스깔리엔떼스’에 모여 국기 게양식을 하고 있는 EZLN. 치아파스에서는 총을 든 군인과 경찰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한 초칠족 농부 가족. 원주민들은 마르코스 인형을 만들어 판다(왼쪽부터).

    경쾌한 마림바 소리가 산크리스토발 중앙광장에서 흘러나왔다. 시청에는 이 도시의 역사가 475년이나 된다는 내용을 담은 표지판이 내걸려 있다. 이 도시는 사파티스타에게는 매우 특별하다. 500년간 멕시코에서 가장 풍요로운 치아파스 주 일대를 수탈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했고, 한때는 원주민은 발도 못 들이게 했던 이 도시에 원주민 반란군이 진입했기 때문. 신자유주의를 제국주의의 연장으로 보는 남미의 현실에서 이곳은 당연히 반세계화의 성지가 됐다.

    밀림의 한가운데, 멕시코의 변방에 위치한 이 작은 마을은 놀랍게도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이들 대부분은 ‘마르코스 신화’에 이끌려 이곳으로 왔다. 거리에는 마르코스 사진이 인쇄된 티셔츠와 엽서, 마르코스 인형이 즐비하고 ‘레볼루션(혁명)’이라는 카페와 ‘레볼루션나리오(혁명가)’라는 타코(멕시코 음식)도 있다.

    마르코스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백인에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엘리트인 그가 원주민 무장단체를 이끌고 있다는 것부터 세인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신비로움과 남미의 신비주의 작가를 빼닮은 우화적 필치가 더해져 더욱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이 도시에는 사파티스타에 관련된 인권단체와 정치단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모두 정부의 감시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다. 마을 변두리에 위치한 ‘ENLACE CIVIL’이라는 국제인권단체는 ‘외국인 사파티스타’ 라고 불린다. 구성원 대부분이 무장투쟁을 지지하는 서구에서 온 백인 대학생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원주민 마을을 오가며 정부군의 탄압을 감시하고, 때론 사파티스타의 연락병 역할까지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를 빌려 타고 산크리스토발 인근 원주민 마을 순례에 나섰다. 아르만도(21)라는 젊은 운전사는 마르코스에 대한 질문에 “10년이 지났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며 자신은 사파티스타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는 원주민이 진입할 수 없었던 도시 근처의 빈 땅을 점거해서 살고 있으니 그들의 도움을 받은 셈이다.

    순례자 줄잇는 ‘반세계화의 성지’
    마리화나를 재배해 사파티스타로부터 배제당한 챠물라라는 마을로 향했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다 문제가 발생했다. 원시종교와 가톨릭이 혼합된 주술적 형태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장례식장을 찾아 사진을 찍다 삽시간에 원주민들에게 둘러싸였다. 이들은 사진을 찍는 대가로 기부금을 내놓으란다. 순간 지갑에 손이 갔지만 안내인이 돈을 보이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말렸다. 10여분의 실랑이 끝에 담배를 나눠주고야 겨우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곳은 반(反)사파티스타 정서가 강했다. 군사지역과 가까워 사파티스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기 때문. 한 농부는 가족의 소득이 월 1000페소(약 12만원) 정도라며 자신이 청년이었을 때와 비교해 달라진 게 없다고 푸념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릴 적부터 자신을 탄압했던 PRI(제도혁명당)를 지지해왔다고 말했다.

    마야유적이 즐비한 빨렌께로 향했다. 산크리스토발에서 버스로 무려 6시간을 들어가야 하는 오지이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대표적 마야유적지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가는 길에 ‘오꼬싱코’라는 도시가 나오는데, 이곳은 94년 1월1일 벌어진 전투에서 원주민의 희생이 가장 많았던 주요 격전지다. 멕시코군은 이곳에서 소총으로 무장한 반군을 학살했다.

    순례자 줄잇는 ‘반세계화의 성지’

    산크리스토발로 향하는 영국인 대학생들. 이들은 앞으로 원주민 인권 감시자 역할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빨렌께의 마야문명은 찬란했다. 위대한 유적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이곳 원주민에게는 큰 자부심이다. 첼딸족 젊은이 안토니오(22)는 처음 보는 한국인에게 자신이 사파티스타임을 선언했다.

    “나는 사파티스타다. 우리들의 문화, 자랑스런 마야족의 전통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NAFTA를 통해 원주민의 자원과 땅까지 팔아넘기려 한다.”

    초등학교 3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그의 입에서 ‘NAFTA 반대’를 비롯한 정치성 짙은 주장들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는 부근 마을 사람들이 사파티스타를 지지하고는 있지만 최근 들어 그 수가 급격하게 줄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파티스타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인수르헨세라고 불리는 3000명에 달하는 정규군, 밀리시아노라 불리는 숫자를 파악하기 힘든 비정규군, 그리고 바세데아뽀요라는 단순 지지층이다. 그는 약간이나마 군사훈련을 받은 비정규군으로 보였다. 그의 무기는 검은 스키용 마스크와 원주민 전통칼이 전부였다.

    그를 따라 마을로 가봤다. 50년 전 원주민들이 이주해 와 산을 개간해서 20ha씩 나눠 가졌다는 이른바 소규모 에히도(부족농장)였다. “옛날에는 치아파스의 커피가 유명했지만 지금은 가격이 폭락했다. 심지어 옥수수는 1kg에 90센타보(100원)밖에 하지 않는다. 중간상인들의 횡포가 정말 심하다.” 안토니오의 말이다.

    얼마 전만 해도 이곳은 주민의 절반 정도가 무장투쟁을 지지하면서 정기적인 회합도 했지만 지금은 조직이 붕괴된 상황. 대신 봉기의 효과는 다른 측면으로 나타났다. 마을에 병원과 중학교가 생긴 것. 1700명의 마을주민을 위해 위성전화까지 설치했다. 무장봉기에 당황한 정부의 회유책인 셈이다. 다만 사파티스타는 원주민 언어를 가르칠 이중언어학교를 설립해줄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정부가 이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까시께’라 불리는 원주민 지역유지와 ‘코요테’라 불리는 중간상인의 횡포는 변함이 없었다. GNP 6000달러의 멕시코 사회의 원주민에게는 어떠한 희망도 남아 있지 않다.

    안토니오는 기자가 마르코스에 대해 궁금해하자 이렇게 말했다.

    “마르코스를 만나고 싶은가. 얼굴 없는 마르코스는 이제 없다. 우리 모두가 마르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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