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0

2003.06.26

아메리칸 드림 ‘조마조마’

강화된 이민정책 한인 사회 고전 … 삶의 터전보다 장기체류 허가받는 게 급선무

  • 뉴욕=홍권희 특파원 konihong@donga.com

    입력2003-06-18 16: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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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리칸 드림 ‘조마조마’

    5월14일 미국 방문 중 워싱턴 D.C에서 교민 대표들과 만난 노무현 대통령.

    5월20일 자정 무렵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피드로 연방구치소측은 독방에서 목을 맨 한 재소자를 발견했다. 즉시 병원으로 옮겼으나 재소자는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6월10일 세상을 떴다. 한국계 이민자 정관씨(46)였다.

    그는 살상무기에 의한 폭행죄로 캘리포니아 교도소에서 복역한 뒤 지난 3월3일 이민 당국에 신병이 인도됐다. 중범죄 전과자를 미국 땅에서 쫓아낸다는 1996년 개정 이민법에 따른 절차였다. 9·11 테러 이후 엄격히 집행되기 시작한 이 이민법 때문에 한국으로 추방될 위기에 처한 정씨는 “한국으로 보내지면 갈 곳도 없다”면서 몹시 두려워했다고 한다. 추방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한 그는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는 이민 당국의 추방정책이 만들어낸 첫 자살자로 기록됐다.

    2000년 현재 ‘서류 미비’ 한국인 20만명 이상 추정

    미국이 1990년 제정한 범법 이민자의 추방 관련 법은 초기엔 중범죄만 대상으로 했으나 현재는 항목이 부쩍 늘어났다. 또 탈세범의 경우 종전 10만 달러 이상에서 1만 달러 이상으로, 강력범 실형기간은 종전 5년 이상에서 1년 이상으로 각각 기준이 강화되면서 범위가 크게 확대됐다.

    10년 전 한국을 떠나 뉴욕에 정착했던 김모씨 가족은 올해 초 짐을 꾸려 한국으로 돌아갔다. 큰딸(19)은 대학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꿈을 가꾸기 시작했고 둘째 딸(16)도 미국생활에 전혀 어려움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서류 미비자’라는 신분은 그와 그 가족의 꿈을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주위사람들은 “한국말을 잘 못하는 둘째 딸이 한국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뉴욕에 사는 Y씨(23)는 올해 대학을 졸업했지만 직장을 잡을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서류 미비자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미국에 온 그는 고교시절에야 자신의 처지를 알았다. 네일 숍에서 일하는 홀어머니가 “영주권을 신청해놓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문제는 대학 때부터 시작되었다. 공립학교(주립대학)의 경우, 등록금이 시민권자의 두세 배인 데다 서류 미비자에게는 장학금이나 학자금 신청 기회도 없다.

    서류 미비자라는 말은 미국에서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따지 못하고 적법한 신분이 없이 사는 경우를 ‘좋게’ 표현한 것이다. 2000년 미국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서류 미비자는 총 870만명. 그중 한국인은 18만여명으로 집계됐지만 센서스에 참여하지 않았을 사람을 감안하면 20만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관광비자 등으로 입국, 금지된 취업을 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비자를 발급받을 때와 조건이 다르게 취업하는 경우 등 불법체류자가 되는 길은 너무나 많다.

    뉴욕 일원의 45만 한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미국의 강화된 이민정책 때문에 고전하고 있다. 더구나 9·11 이후 미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좁아져 이민이 어려워지고 미국에 둥지를 튼 사람 가운데서도 미국의 정책 방향에 맞지 않는 사람은 쫓겨나는 상황이다. 적법한 신분을 갖추지 못한 이민자들은 당국의 단속을 걱정하느라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한다.

    외국인에 대한 미국 입국심사가 강화되면서 과거에 불법체류한 사실이 드러나거나 범죄기록이 발견돼 공항에서 추방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국토안보부 산하 이민서비스국(BCIS)에 따르면 2002년 10월부터 2003년 2월까지 5개월간 입국심사 과정에서 추방된 한인은 모두 59명으로 미국 내에서 단속에 걸려 추방된 한인 32명보다 훨씬 많았다. 이에 앞서 2002 회계연도(2001년 10월∼2002년 9월) 기간중 입국하려다 서류 미비 등의 이유로 입국이 저지되거나 추방된 한인은 269명으로 전년보다 74% 급증했다. 미국 당국은 ‘VISIT’라는 이름의 외국인조회시스템을 구축중이다. 올해 말부터 가동될 예정인 이 시스템이 가동되면 훨씬 많은 정보를 조회할 수 있어 추방 대상자도 그만큼 늘어날 전망이다.

    아메리칸 드림 ‘조마조마’

    한인교회에서 예배중인 재미교포들과 한인 상점의 모습(위 부터).미국 내 한인 불법 체류자는 2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뉴욕의 이민법 전문 수지 김 변호사는 “과거엔 합법적인 장기체류 비자와 관계없이 영주권을 따내면 미국에서 살 수 있었지만 2001년 4월30일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2001년 이전에만 하더라도 비자는 나중 일이고 현지에서 삶의 터전을 잡는 게 중요했으나 이젠 유학이나 취업 또는 방문비자의 연장 등 세 가지 종류의 비자를 통해 장기체류를 허가받는 것이 급선무가 됐다”고 말한다.

    방문비자를 받아 미국 땅을 밟은 유학 희망자들의 앞길도 험난하기만 하다. 뉴욕에서 어학원에 다니는 최모씨(26)는 방문비자를 유학생비자로 바꾸려고 뛰어다니고 있지만 기각될 것이 뻔하다면서 울상이다. 같은 학원에서 공부하는 동료들도 기각당해 이미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기각당한 뒤 어물어물하다간 불법체류자가 되고 훗날 입국거부 사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제 날짜에 귀국하는 데도 신경을 써야 한다.

    수지 김 변호사는 “종전에는 방문비자를 유학생비자로 변경하는 경우 기각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면서 “예를 들어 어학연수를 한다면서 유학생비자를 신청하면 ‘다른 사람은 한국에서 영어를 배우는데 당신은 왜 미국에 왔다가 귀국 한 달 전에야 갑자기 영어를 배우겠다고 하느냐’는 둥 하면서 ‘아픈 곳’을 찔러대다가 신청자가 이를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하면 대부분 기각 판정을 내린다”고 전했다. 수지 김 변호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멕시코로 나가서 유학생비자를 신청했다가 기각되면 미국 입국까지 거부되는 등 사후관리도 강화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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