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6

2003.05.29

절경에 취해 세상 번뇌도 잊고…

  • 양영훈 / 여행작가 www.travelmaker.co.kr

    입력2003-05-21 15: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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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경에 취해 세상 번뇌도 잊고…

    월악산 송계계곡에 활짝 핀 매발톱꽃.

    석가탄신일인 사월 초파일은 전국의 모든 사찰이 가장 분주한 날이다. 이름 있는 대찰은 물론이거니와 첩첩산중의 작은 암자조차도 저잣거리처럼 북새통을 이룬다. 때문에 산사의 고즈넉함을 즐기려는 이들에게는 가장 피하고 싶은 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부처님 오신 날에 맞춰 문경 봉암사를 찾았다. 봉암사는 석가탄신일에만 산문(山門)을 개방하기 때문이다.

    아침 7시30분에 서울을 출발한 관광버스가 괴산 쌍곡계곡과 저수리재, 불란치재를 거쳐서 경북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30분. 봉암사까지는 다시 4km를 더 들어가야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절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거나 걸어가야 한다. 봉암사 초입의 상괴리에서 봉암사까지 가는 동안에는 거대한 바위봉우리 하나가 줄곧 시야에 들어온다. 백두대간의 허리를 이루는 여러 준봉 가운데 하나인 희양산(998m)이다. 옛날부터 ‘절이 없으면 도적떼의 소굴이 들어설 자리’로 알려진 산이다. 그 산자락에 천년고찰 봉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신라 헌강왕 5년(879)에 지증 대사(824~882)가 창건한 봉암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희양산문의 종찰이다. 전성기에는 3000여명의 선승들이 머물 정도로 큰 사찰이었고, 당시의 희양산문은 중국 당나라에까지 명성을 날리던 선도량이었다고 한다. 그런 선맥(禪脈)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오는데, 성철을 비롯해 청담, 자운, 일타 등의 내로라하는 선승들도 한때 이곳에서 수행했다. 또한 조계종 특별선원으로 지정된 1982년부터는 아예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돼 이 땅에서 가장 조용하고 깨끗한 선원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렇듯 유서 깊은 전통 선원이지만 오늘날의 봉암사에서는 예스러운 맛을 느끼기 어렵다. 제법 너른 절터에 가득한 건물들이 대부분 근래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절은 창건 직후부터 여러 차례 수난을 당했다. 문경 일대가 왕건과 견훤 세력 간의 격전장이 되었던 후삼국시대에 이미 봉암사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태조 때는 정진 대사의 중창 불사 덕택에 옛모습을 잠시 되찾기도 했지만 이후 임진왜란 등의 전란과 큰 화재가 거듭되는 와중에 옛 목조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역사적 유물·전설도 많아





    그래도 봉암사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옛 문화재가 적지 않다. 금색전 앞의 삼층석탑(보물 제169호), 창건주인 지증 대사의 부도(보물 제137호)와 부도비(보물 제138호), 중창주인 정진 대사의 부도(보물 제171호)와 부도비(보물 제172호), 그리고 대웅보전 앞마당에 놓인 2기의 노주석 등과 같은 석물(石物)이 곳곳에 남아 있어 영화롭던 옛 시절을 짐작케 한다. 그중 야간행사 때 관솔불을 피워 올렸던 돌받침대인 노주석은 여느 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유물이고, 원형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은 조형미가 뛰어나다. 게다가 지증 대사 부도의 몸돌에는 무릎을 꿇은 채 합장하는 보살과 구름 위에서 비파를 타는 천녀(天女)가 매우 정교하게 조각돼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봉암사 경내는 줄줄이 내걸린 하얀 연등과 몰려든 관광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특히 식당 주변은 점심 공양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서둘러 경내를 벗어나 백운대로 향했다. 봉암사 계곡의 여러 절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백운대는 일명 ‘옥석대’로도 불린다. 울창한 숲과 편편하고 너른 바위, 연못과 폭포를 이루며 흐르는 계류, 그리고 단아한 인상의 마애불이 한데 어우러져 선경을 이루는 곳이다. 마애불 옆의 바위에 고운 최치원이 썼다는 ‘白雲臺’라는 글씨도 새겨져 있다. 여기까지 올라와보지 못하고 봉암사를 떠났다면 무척 아쉬웠을 뻔했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오후 2시30분쯤 봉암사 동구의 가은읍 상괴리를 출발한 일행은 문경 하늘재로 향했다. 문경에는 새재, 이화령, 하늘재라는 유서 깊은 고갯길이 세 개나 있다. 그 가운데서도 하늘재는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뚫린 고갯길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 3년(156)에 북진을 위해 계립령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계립령이 바로 오늘날의 하늘재다. 하늘과 맞닿아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지만, 실은 해발 525m의 나지막한 고개에 지나지 않는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는 문경새재나 이화령보다도 훨씬 수월하게 넘어 다니던 고갯길이다.

    절경에 취해 세상 번뇌도 잊고…

    봉암사 대웅보전 앞마당에 내걸린 연등(위).울창한 솔숲을 가로지르는 하늘재 고갯길.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 대사의 부도. 몸돌의 섬세한 조각이 인상적이다.봉암사 계곡 백운대의 마애불.(아래 왼쪽부터)

    그러나 오늘날 하늘재를 넘는 과객(過客)은 거의 없다. 아예 차량이 진입할 수 없도록 길 양쪽 입구를 막아놓은 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훨씬 빠르고 편안한 이화령터널이 뚫려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걸어다니기에는 아주 운치 있는 고갯길이 되었다. 울울창창한 솔숲 사이 조붓한 산길을 천천히 걷노라면, 청신한 솔 향기와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누긋하게 한다. 특히 고갯마루에서 충주 미륵리로 가는 내리막길은 경사가 적당해서 하염없이 걷고만 싶어진다. 하지만 미륵리까지는 20여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늘재 아래의 미륵리에는 신라 말과 고려 초 사이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옛 절터가 있다. 드물게 북향으로 자리잡은 이 절터에는 원래 미륵대원(彌勒大院)이라는 석굴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우(堂宇)는 모두 사라지고 석불입상(보물 제96호), 오층석탑(보물 제95호), 삼층석탑, 석등, 당간지주, 돌거북 등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중 석불입상이 눈여겨볼 만하다. 네 개의 커다란 화강석으로 이뤄진 이 석불은 높이가 10.6m에 이르는데, 자비로운 미소가 얼굴에 가득해서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 절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신라가 망하자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아들과 딸인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는 망국의 한을 품은 채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길을 떠났다.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월악산 기슭에 다다른 남매는 각기 미륵사와 덕주사를 세웠다. 덕주사를 창건한 덕주공주는 남향한 바위에 마애불을 새겼고, 미륵사를 세운 마의태자는 불상을 북쪽으로 두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했다.

    역사 깊은 곳 가운데 아름다운 전설 하나쯤 없는 곳이 드물지만, 허허로운 옛 절터에서 되새겨보는 두 남매의 전설이 애틋하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서는 이곳에 아로새겨진 전설이 무엇이든, 사람 사는 세상의 흥망성쇠와 희로애락이 어떻든,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녹음 짙은 월악산의 영봉 위로 한 조각 구름이 무심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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