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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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바다’에 빠져 죽어도 좋아!

영화에 허기진 마니아들 부산국제영화제서 포식… 숙식 최소화 “한 편이라도 더 봐야죠”

  • 부산=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2-11-21 12: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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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바다’에 빠져 죽어도 좋아!

    11월15일 오전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남포동 영화의 거리에서 관람객들이 표를 사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11월15일 아침 8시30분경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PIFF·11월14~23일)가 열리고 있는 부산 남포동 영화의 거리는 매서운 날씨 속에서도 ‘영화의 바다’에 빠져 하루 종일 헤엄칠 준비가 된 마니아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아침 6시 부산역에 도착한 대학생 서경미씨(23·경기대 경영학과)와 친구 김미진씨(22·다중매체학과)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영화 마니아들. 마침 이들이 온다는 얘기를 듣고 부산국제영화제를 즐기기 위한 인터넷 동호회 ‘러브 피프(PIFF)’ 운영자인 이동욱씨(23·경성대 연극영화과)와 권기원씨(21·경성대 경영학과)가 길 안내를 자처했다.

    이들은 부산역에서 곧바로 영화제 주요 극장인 대영시네마 쪽으로 이동해 매표소 앞에 줄을 섰다. 아침도 굶고 추위에 떨면서도 이들의 마음은 이미 따뜻한 영화관 안, 현실과는 다른 영화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듯 잔뜩 들떠 있었다.

    서씨와 김씨는 결국 두 시간 넘게 기다려 이날 상영되는 영화(정가 5000원) 가운데 각각 세 편의 할인표(각 3500원)를 샀다. 할인표는 영화관 앞 줄 두 자리에 배정된 좌석으로 현장에서만 살 수 있으며, 올 들어 처음 도입된 제도. 두 사람은 정신적 초월의 가능성을 탐구한 세 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 ‘도박 신 그리고 LSD’(오전 10시30분)는 함께 보기로 했지만 나머지는 각자의 취향대로 골랐다.

    예술영화에 관심이 많은 김씨는 클레어 드니 감독의 사랑 영화 ‘금요일 밤’(오후 5시 상영)과 제59회 베니스영화제 관객상을 받은 ‘기차를 타고 온 남자’(오후 8시)를 골랐다. 표를 받아 든 김씨는 “영화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아끼던 모직 코트를 경매 사이트에 절반 가격에 팔아 치웠지만 전혀 아깝지 않다”며 환하게 웃었다.



    코트 팔고 아르바이트로 경비 조달

    삶의 현장을 담은 동남아시아 드라마류를 좋아하는 서씨는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바보들의 배’(오후 2시)를 택했고, 이씨와 권씨는 소매치기로 살아가는 부부의 삶을 그린 ‘소매치기’(오전 11시) 할인표를 구입했다.

    10시30분께, 전날 밤 충남 보령에서 온 조영주씨(21·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재관리학과)는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으로 예매한 28장의 표를 들고 부산극장 앞에서 첫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에도 영화제 기간 동안 부산을 찾아 14편의 영화를 보았다는 조씨는 학교의 영화동아리 회장까지 지낸, 전국의 영화제란 영화제는 모두 가야 직성이 풀리는 열성파. 이날부터 영화제 폐막 전날인 22일까지 영도 함지골 청소년 수련원에 머물 조씨는 현장에서 10여편의 표를 추가로 구입해 이번 영화제에서 모두 40여편의 영화를 볼 생각이다.

    ‘영화바다’에 빠져 죽어도 좋아!

    부산영화제를 찾은 일본 영화팬 아유미 노나카 (왼쪽)와 아카네 미구치 (왼쪽 사진).영화 관람을 위한 전략을 짜고 있는 권기원, 이동욱, 김미진, 서경미씨(오른쪽 사진 왼쪽부터).

    “영화에 빠지지 않은 친구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영화를 보게 되면 현실과 환상이 혼동되지 않겠느냐고 묻곤 해요. 그러나 영화가 결국 현실의 반영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현실을 반추할 수 있어 그런 걱정은 집어치우라고 말합니다.”

    매표 행렬에는 외국인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부산 EEC학원 영어강사 애덤 존스(23)는 단편과 다큐멘터리 영화를 소개하는 ‘와이드 앵글’ 부문 영화에 관심이 많다. 영화제 기간에 10여편의 영화를 보겠다는 존스는 “아시아권 영화를 두루 볼 수 있다는 게 부산영화제의 장점”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후쿠오카에서 온 아유미 노나카(21)와 아카네 미구치(21)도 “부산영화제는 일본에서도 꼭 가봐야 할 영화제로 손꼽힌다”며 “특히 한국 영화에 관심이 많아 부산을 찾았다”고 말했다.

    이번 영화제는 출품작이 58개국 226편으로 사상 최대 규모인 데다 기간도 예년보다 1, 2일 길어 영화 마니아들의 욕심도 그만큼 커졌다. 여관비 등을 아껴 가능하면 더 많은 영화를 보려는 욕심에 찜질방이나 PC방 등에서 밤을 보내는 이들도 많다. 이들은 대개 배낭족들처럼 커다란 가방을 둘러메고 다니며, 영화가 상영되기 전 짬을 내어 인근 ‘먹자골목’ 등에서 국수나 순대, 패스트푸드 등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한다. 점심시간에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난 회사원 정영훈씨(24)는 “며칠 휴가를 내고 부산을 찾았다”며 “전날 찜질방에서 잤는데 생각보다 편안했다”고 말했다.

    남포동 극장가에서 버스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영도 함지골은 큰 방에 20여명이 단체 투숙하는 곳이지만 하루 숙박비가 5000원밖에 안 되고 주변 경치가 수려해 영화 마니아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관계자에 따르면 영화제 기간에 이곳을 찾을 인원은 700여명으로 대개 4~5일 묵는 단기 투숙객이며, 영화제 기간 내내 이곳에서 머물겠다고 예약한 사람도 10여명이나 된다. 주로 대학생, 영화 관계자 등이 이곳을 이용하지만 주말에는 직장인들도 상당수 이곳을 찾고 있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는 12만여명이 몰려들었다. 부산영화제 관계자에 따르면 이 가운데 상당수는 영화 마니아들이다. 영화 마니아의 원래 의미는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반복적으로 보거나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를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컬트(cult)족’을 의미한다. 넓은 의미에서는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보려는 이들이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그들은 영화를 통해 자신들의 남다른 취향을 즐기고, 그것에서 선민의식을 느끼며, 반복적으로 그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영화바다’에 빠져 죽어도 좋아!

    영화제 기간에 일반에게 숙소로 제공되고 있는 영도 함지골 청소년 수련원.

    이들 존재는 영화계의 큰 밑거름이 되고 있다. 새로운 영화 트렌드를 조성하거나 지나간 고전을 끄집어내 새로운 유행을 창출하기도 한다. 또한 상업적 평가와는 별도의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유지하기도 한다. 최근 ‘하녀’ 등으로 유명한 김기영 감독을 새롭게 부각시킨 것이나 록영화 ‘헤드윅’에 대한 열광 등은 바로 이들이 주도한 현상이다.

    크고 작은 마니아 모임이 있지만 이번 영화제를 계기로 부각된 동호회는 ‘러브 피프(cafe.daum.net/PIFF)’와 ‘부시맨과 팝콘’. 전국적으로 500여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러브 피프’는 16일 밤 외국인 배낭족이 많이 찾는 부산 ‘게스트하우스’에서 ‘번개 모임’을 가져 전국에서 모인 20여명이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 ‘교사형’ 비디오를 보았다. 시원한 맥주도 곁들여졌다.

    지난해 12월 온라인상에서 결성된 영화동호회 ‘부시맨과 팝콘’(회장 박종길)은 부산지역 영화 시사회 동아리로 회원 수만 850여명에 이른다. 영화배급사나 홍보대행사들에게 이들은 VIP 손님. 이들의 반응이 결국 이 지역 흥행 여부의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맞이해 이들의 움직임도 더 활발해졌다. 이들은 홈페이지(www. bupop.com) 첫 화면을 ‘영화제 때 다들 한번 미쳐봅시다. 죽어봅시다’라는 문구로 장식했고, 사이트를 통해 회원들이 추천하는 영화부터 매진된 영화표 구하는 법 등의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마니아들은 영화제를 찾으면서 도대체 무엇을 얻는 걸까. 3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나온 김미진씨는 “많은 영화를 보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고정관념이 깨지는 것에서 커다란 희열을 느낀다”고 말한 뒤 다음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 문 안으로 총총이 사라졌다. 그의 어깨엔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그의 꿈만큼이나 커다란 가방이 메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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