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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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 벌금 내라!”

고 다이애나 왕세자비 전 집사 폴 버럴 사건 계기로 비난 여론 거세

  • 안병억 / 런던통신원 anpye@hanmail.net

    입력2002-11-21 10: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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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여왕 벌금 내라!”

    11월1일 무혐의 선고를 받고 밝은 표정으로 법정을 나서는 폴 버럴. 지난 2년간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다이애나 비 집기 절도 사건’은 이로써 종결됐다.

    올해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즉위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6월을 전후해서 영국 전역에서는 대규모 축하행사가 벌어졌다. 여왕은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기념식수를 했고 2만여명의 국민을 버킹엄 궁 정원으로 초청해 성대한 음악회도 개최했다. 화려한 불꽃놀이가 음악회의 피날레를 장식할 때 영국인들은 하나가 됐다고 각 언론은 앞 다투어 보도했다. 역시 왕은 국민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해준 계기였다.

    그런데 요즘 영국 언론은 여왕, 나아가 왕실을 비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1997년 교통사고로 숨진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집사였던 폴 버럴 사건으로 인해 여왕과 왕실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여왕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데다 여왕이 엄청난 혈세를 낭비했다는 비난도 거세지고 있다.

    2000년 1월 영국 경찰청은 고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집사 폴 버럴을 절도 혐의로 체포했다. 그의 집에서 다이애나 비가 쓰던 그릇과 옷, 기념품 등 300여 가지의 집기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폴 버럴은 81년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와 결혼할 때부터 왕세자 부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모셔왔다. 96년 다이애나 비가 이혼한 뒤에도 그녀를 따라가 극진히 시중든 충복 중의 충복이었다. 생전의 다이애나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품목 1호는 폴 버럴’이라고 주저 없이 말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영국인들의 놀라움과 분노는 더욱 컸고 사건은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지난 2년간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여왕 늑장 해명으로 30억 혈세 낭비

    폴 버럴은 자신이 16년간 모셔왔던 왕세자비를 기념하고 그녀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집기를 가져왔으며, 그중 일부는 생전의 다이애나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여왕에게도 이를 알렸다고 경찰과 검찰 조사에서 일관되게 진술했다. 그러나 버럴이 여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 시기와 내용 등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함구했기 때문에 검찰은 그의 발언이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초 여왕이 폴 버럴과 대화한 내용을 기억해냈고 버킹엄 궁이 이를 검찰에 통보했다. 이 일로 재판은 종결되었고 절도 혐의로 구속이 확실시되던 버럴은 무혐의로 풀려났다. 하지만 이 사건을 둘러싼 의문은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고 여왕과 왕실의 구태의연한 답변은 의혹만 증폭시키고 있다.

    이 사건은 지난 2년간 영국 언론에 집중적으로 보도됐다. 그렇다면 버킹엄 궁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여, 여왕이 사건 초기에는 영연방을 순방하는 등 업무에 바빠 이 사건을 몰랐다 하더라도 버킹엄 궁의 비서진은 그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찰스 왕세자도 그때까지 이 사건을 모르고 있었을까? 97년 12월 폴 버럴이 특별 면담을 요청해와 업무 이외의 시간에 개인적으로 그를 만나, 그로부터 다이애나의 집기를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는 여왕이 왜 진작 검찰에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에 대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고 있다.

    가장 유력한 설명은 여왕이 왕실의 비밀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사건을 은폐하려 했고 그 때문에 계속 소송에 개입했다는 설이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폴 버럴이 왕실의 비밀을 폭로할까봐 막판에 그를 구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동 음모자로 찰스 왕세자가 지목되고 있다. 또 왕실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다이애나 비의 친정 스펜서 가(家)와의 갈등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아울러 그간 경찰과 검찰의 수사, 소송에 들어간 비용도 큰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사건에 들어간 비용은 150만 파운드(약 30억원)에 이른다. 여왕이 말 한마디만 했으면 이 혈세를 낭비하지 않았을 터인데 여왕은 법 위에 있느냐는 야유가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폴 버럴이 무혐의로 풀려난 날, BBC 방송의 인터뷰에 응한 한 시청자는 “여왕의 태도에 너무 실망했다. 그동안 지녀왔던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여왕은 본인 때문에 불필요하게 혈세가 낭비된 데 대해 사과하고 벌금을 내라”고 요구했다. ‘더 타임스’와 ‘가디언’ 등 주요 신문에도 비슷한 내용의 독자투고가 잇따르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전국민적 관심사를 노동당과 보수당, 자유민주당 등 정당이 좌시할 리 없다.

    3개 정당 가운데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표명한 당은 소수 야당인 자유민주당이다. 폴 버럴이 무혐의로 풀려난 후, 자유민주당은 여왕이 소송에 개입한 의혹을 풀기 위해 독립적인 진상조사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도 왕이 국가의 수반으로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는 현행 조항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그러나 52개 의석을 보유하고 있는 소수 야당의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다(전체 678개 의석 가운데 여당인 노동당은 413석, 보수당은 166석을 보유하고 있다).

    평소 열렬한 왕정 지지자임을 자처해온 토니 블레어 총리는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여왕의 행동은 적절했다”며 진상조사위원회의 설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야당이긴 하지만 소속 국회의원 절반 정도가 사립 중·고교 출신 상류층인 보수당 의원들도 여왕을 지지하는 분위기다. 영국에서 여왕과 왕실을 비판하면 비애국자라고 눈총을 받는다. 또 1848년에 제정된 반란법은 왕실의 폐지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면 대역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선’과 ‘미러’ 등 일부 타블로이드 신문의 추측기사 때문에 확대 해석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석연치 않은 태도로 일관하며 계속된 의혹제기에도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않는 왕실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이번 사건으로 인해 왕실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게 떨어졌다. 최근 BBC방송의 전화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3분의 2가 엘리자베스 여왕과 찰스 왕세자가 이번 소송에 개입했다고 여기고 있으며 여왕은 여전히 법 위에 군림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보수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지난 2월 말 3000명의 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24%의 응답자만이 왕실 폐지를 지지했다. 절반이 넘는 53%가 왕실의 존속은 지지하되 좀더 시민에게 친근하고 민주적인 왕실을 원한다고 답했다. 이처럼 영국 국민 대다수는 왕실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나 좀더 공개적이고 서민과 함께하는 왕실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변화에 둔감한 영국 왕실은 이런 국민의 요구를 쇠귀에 경 읽기 식으로 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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