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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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때문에 상처받기 싫어!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입력2002-11-07 1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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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때문에 상처받기 싫어!

    성불능자인 진웅과 사랑에 빠진 인혜와 정신분석을 통해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세진. 연극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엇갈리면서 진행된다.

    연극을 보러 가는 길은 어린 시절 동물원에 가는 것처럼 설렌다. 좁은 무대 위에서 낱낱이 해부되는 인간의 삶을 지켜보는 것은 일견 고통스럽지만, 그 속에는 어떤 통쾌함이 있다. 연극배우의 대사가 내 이야기로 겹쳐지면서 어느 순간, 가슴속 깊숙한 곳에 뭉쳐 있던 슬픔이 토할 듯 쏟아져 나온다.

    극단 산울림이 꾸준히 공연하고 있는 ‘여성연극’-사실 산울림의 공동대표인 연출자 임영웅과 불문학자 오증자는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을 본 여성관객 대다수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7개월 장기공연에 관객 5만명을 돌파한 ‘위기의 여자’를 비롯해서 ‘하나를 위한 이중주’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 등등은 모두 여성들이 삶에서 맞닥뜨리는 아픔을 형상화한 연극들이다. 남편의 외도에 절망하는 아내, 성장해가는 딸을 바라보는 엄마, 죽은 엄마를 추억하는 딸…. 연극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은 하나같이 평범하지만 그 속에는 감동적인 울림이 있다. 그리고 그 울림은 중년의 여성관객들로 하여금 객석 수 100석의 소극장 산울림을 찾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임이 분명하다.

    한번쯤 겪어본 ‘자아찾기’ 그려

    김형경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연극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도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분명 여성연극이다. 그러나 그동안 산울림의 연극에 등장한 여성들이 어머니나 아내, 딸이었다면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의 두 주인공 세진과 인혜는 약간 남다르다. 서른일곱 동갑내기로 여학교 동창인 이들은 각기 건축설계사와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라는 세련된 직업을 가진 독신여성이다. 이항나와 박지오가 각각 분한 세진과 인혜의 첫인상은 예쁘고도 빈틈이 없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이들이 안고 있는 고통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여느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슬픈 가족사로 얼기설기 얽혀 있는,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결코 헤어날 수 없는 그 묵은 된장 같은 아픔들.



    극의 중심축은 세진과 정신과 의사 강문규의 정신분석에 놓여 있다. 불면의 고통에 시달리던 세진은 마지막 수단으로 정신분석을 선택한다. 어린 시절 이혼한 부모에게 버림받다시피 하고 하숙과 자취를 전전하며 성장한 세진은 대학교 2학년 때 남자 선배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외양으로는 결벽증에 가까운 완전주의자인 그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과 성폭행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남자친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랑 때문에 상처받기 싫어!

    여학교 동창인 인혜(박지오 분·위)와 세진(이항나 분·아래). 연출자 임영웅은 “두 사람은 별개의 인물이 아니라 동일한 사람의 외향과 내면에 가깝다”고 말했다.

    반면 성불능자인 남편과 이혼한 인혜는 세진과는 반대로 자유롭게 성을 탐닉한다. 여러 남자를 거치며 연애행각을 벌이던 그는 헤어진 남편과 마찬가지로 성불능자인 이진웅과 사랑에 빠진다. 아내와 별거하고 있던 이진웅은 인혜의 애정으로 인해 성적 능력을 회복한다. 그러나 이진웅의 아내가 헤어질 것을 요구하자 인혜는 단호하게 그의 곁을 떠난다.

    연출자 임영웅은 “세진과 인혜는 별개의 인물이 아니다. 세진이 내면이라면, 인혜는 그의 외양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관객의 공감은 세진 쪽에 더 깊숙하게 쏠린다. 세진에게 부모의 애정이란 ‘아버지가 버스터미널에 실어다준 쌀가마니’ 같은 것이다. 세진은 결국 가져갈 방법이 없는 쌀가마니를 쌀집에 가서 팔았다고 강문규에게 털어놓는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세진은 스스로를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보잘것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같은 연약함을 숨기기 위해 더욱 치밀하고 완벽해 보이려 애쓴다. ‘어릴 때는 애늙은이처럼, 나이가 들어서는 늙은 애처럼 살고 있다’는 세진의 고백에 관객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세진은 강하고 능란한 척하지만 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여성들의 심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임영웅이 연출한 무대는 항상 그렇듯이 차분하다. 성폭행, 굿 중에 신이 내리는 경험, 교통사고 등 충격적인 사건들을 다루면서도 무대는 시종일관 안정감을 잃지 않는다. “나는 항상 연극적인 연극, 전통적인 연극을 하려고 했다. 관객 각자가 무대 위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떤 대본을 사용하더라도 나는 이 관점을 놓치지 않았다.” 임영웅의 설명이다.

    한 언론은 이 연극을 ‘섹스를 좋아하는 여자와 섹스가 싫은 여자가 사랑을 찾는 이야기’라고 자극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제목처럼 특별한 이야기도,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도 아니다. 이 연극이 던지는 진정한 메시지는 고통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세진은 극의 결말에 이르러서야 ‘생의 비밀은 자기를 알아가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들 생의 비밀은 어디에 있는가. 날카로운 칼날을 잡듯 건드리면 아픈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 고통의 기억을 포용하고 용서하는 것은 삶의 여정 어딘가에서 결국 한 번은 거쳐야 할 과정이다. 세진의 울음이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은, 아마도 이 용서가 그토록 힘들었기 때문이리라. (12월29일까지, 문의 02-334-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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