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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 ‘비밀’

아내의 영혼이 딸의 몸 속으로?

  • 김시무/ 영화평론가 kimseemoo@hanmail.net

아내의 영혼이 딸의 몸 속으로?

아내의 영혼이 딸의 몸 속으로?
이 영화는 장르적으로 비극적 사랑을 다룬 멜로물이 아니라 일종의 로맨틱 코미디에 가깝다. 사실 교통사고가 일어나는 영화의 도입부 시퀀스만 제외한다면, 이 영화는 코믹한 분위기로 일관한다.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 이후 많은 일본 영화들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지만 이른바 ‘대박’을 터뜨린 영화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세계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구로사와 아키라, 오시마 나기사 같은 유명 감독들의 걸작들도 흥행이라는 벽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 작품성과 대중성 간의 괴리를 실감케 해주는 단적인 사례였다.

일본에서 전대미문의 흥행을 기록했던 ‘화이트 아웃’ 같은 이른바 블록버스터들도 우리 관객들로부터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우리와 일본 관객 간의 정서적 차이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물론 몇 편의 영화는 예상했던 대로 관객몰이에 성공했다. 이와이 순지 감독의 ‘러브레터’와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철도원’이 그랬다. 이 두 작품이 관객에게 어필했던 이유가 있다. 전자는 연인간의 사랑, 후자는 가족애라는 보편적 정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국경을 초월한 공감대를 얻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두 작품은 모두 일본적인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부감 없는 영적 교류 같은 것은 그 단적인 예라 하겠다. 일본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초자연적 현상을 유난히 좋아한다. 또한 두 작품은 모두 일본의 빼어난 설경(雪景)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시각적 즐거움도 만만찮았다.

결국 관객들은 보편성과 이국풍의 결합에 큰 관심을 보였던 셈이다.



위의 두 작품을 합쳐놓은 듯한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 편의 일본 영화가 우리 관객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다키타 요지로 감독이 1999년에 만든 ‘비밀’이 바로 그 영화다. ‘비밀’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그 비밀의 베일을 벗기는 것이 영화의 주된 얼개지만, 여기서 그 결말을 발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는 관객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략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렇다. 어느 날 아내 나오코(기시모토 가요코)가 남편 헤이스케(고바야시 가오루)만을 남겨둔 채 딸 모나미(히로스에 료코)를 데리고 친정에 다니러 가다 그만 교통사고를 당한다. TV속보를 통해 사건 소식을 접한 남편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내는 사망하고 딸만 살아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시작되는가? 천만의 말씀. 이 영화는 장르적으로 비극적 사랑을 다룬 멜로물이 아니라 일종의 로맨틱 코미디에 가깝다. 사실 교통사고가 일어나는 영화의 도입부 시퀀스만 제외한다면, 이 영화는 코믹한 분위기로 일관한다.

아내의 영혼이 딸의 몸 속으로?
우선 상황설정 자체가 다소 황당한 코미디로 갈 수밖에 없다. 아내의 영혼이 살아남은 딸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두 사람의 영혼이 하나의 몸 속에 같이 살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의 몸 속에 여러 인물이 동거하는 현상을 다중인격이라 하는데, 이는 일종의 귀신들림 즉 ‘빙의(憑依)’다. 이 현상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핵심 화두이자 맥거핀으로 작용한다.

아내가 딸의 몸을 빌려 다시 살아 돌아왔다! 이렇게 황당한 일이 벌어졌으니 그것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질 수밖에 없다. 마흔 줄에 들어선 남편은 여고생 같은 아내와 살게 되었으니 참으로 복도 많다고 좋아해야 할까? 아내는 남편에게 평소처럼 잠자리를 요구한다. 그러나 부부관계를 가지려던 남편의 눈앞에는 아내 나오코가 아닌 딸 모나미가 누워 있다. 결국 남편은 아내의 영혼과 딸의 몸 사이에서 번민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러한 설정을 통해서 감독이 노리는 것은 따로 있다. 합리적으로 근친상간의 경계를 넘어보자는 계산이 아니겠는가. 그 추이를 쫓아가보는 것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우리가 이 영화 속에서 주목할 배우는 물론 남녀 주인공이다. 딸 역과 딸의 몸 속에 들어간 아내 역을 연기하며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히로스에 료코는 ‘철도원’에서도 주인공 딸의 혼령으로 나와 해맑은 미소를 선사한 바 있다. ‘비밀’에 와서 좀더 성숙해진 모습이지만 예의 그 해맑은 미소와 청순미는 여전히 깊은 인상을 남긴다. 딸을 아내로 알고 살아야 하는 기막힌 운명의 남자 헤이스케 역의 고바야시 가오루는 강인한 인상에 귀염성을 갖춘 독특한 마스크로 일본 개봉 당시 뭇여성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한다. 그에게서 최민수의 터프함을 연상하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다키타 요지로 감독은 아직 우리에게는 낯설다. 1985년에 만든 영화 ‘코믹잡지 같은 것 필요 없어!’가 뉴욕영화제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감독의 입지를 굳힌 후 많은 화제작을 발표했지만, 아쉽게도 우리에게 소개된 것은 ‘비밀’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비밀의 실체가 많은 관객들에게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의 다른 작품에 대한 기대감은 증폭될 것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미지의 감독들을 하나씩 사귀어보는 것도 뜻있는 일일 것이다.





주간동아 355호 (p92~93)

김시무/ 영화평론가 kimseem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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