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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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아시아’ 잔치 분통터진다

차별 설움 ‘코시안’들이 보는 아시안게임 … “배타적 행동·‘삐딱한 시선’ 먼저 거둬라”

  • 입력2002-10-12 1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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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아시아’ 잔치 분통터진다

    인도네시아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로 이뤄진 코시안 가정.

    9월29일 오후,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는 부산아시아경기대회 개막식이 한창이었다. 가야제국의 시조 김수로왕과 아유타국(인도)의 공주 허황옥(김해 허씨의 조상)이 만나는 장면은 개막식 행사의 백미였다. 북방의 김수로왕과 남방의 허황옥이 싹틔운 ‘국경 없는 사랑’은 ‘하나의 아시아’와 아시아의 영원한 번영을 표현한 것. 김수로와 허황옥의 만남을 노래한 조수미의 ‘사랑의 아리아’에 이어 아시아 대륙 곳곳에서 채화된 42개의 불꽃이 남북한의 성화와 합쳐져 타오르며 ‘아시아의 번영과 화합의 축제’ 아시아경기대회의 막이 올랐다.

    불법체류자 단속 소문 외출 꺼려

    비슷한 시각, 경기 안산시 미얀마인 바웅씨(35)의 집. 9월 초 딸을 출산한 한국인 아내와 함께 텔레비전을 통해 개막식을 지켜보던 바웅씨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만남을 보면서 2년 동안의 고단한 결혼생활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그도 허황옥처럼 ‘국경 없는 사랑’을 꽃피웠지만, 21세기 한국에선 냉대와 차별을 피할 수 없는 미얀마 국적의 이방인일 뿐이다. 바웅씨는 “아내가 한국 사람인데도 피부색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국적은커녕 취업비자도 내주지 않는 한국과 한국인들이 싫다”고 말한다.

    부산아시아경기대회의 공식 슬로건은 ‘One Asia Global Busan’이다. 그러나 한국에 거주하는 35만명의 코시안들(한국인과 아시아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가리키는 신조어로 최근엔 아시아계 이주노동자, 한국인과 결혼한 아시아인을 부르는 말로 폭넓게 쓰인다)에게 이런 슬로건은 한국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공허한 메아리일 따름이다. 코시안들에겐 이번 대회가 자국 선수들을 응원하며 향수를 달랠 좋은 기회인데도, 불법체류자라는 신분과 열악한 노동환경 탓에 아시아경기대회에 관심을 둘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단속이 강화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아시아계 노동자들은 나들이조차 꺼리고 있는 상황이다.

    10월3일 오후 경기 안산시 원곡동 ‘국경 없는 마을’. 이곳은 중국 파키스탄 베트남 몽골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 아시아 각국의 노동자들이 모여 산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됐다. 매캐한 동남아시아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찌르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90% 가량이 중국과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까무잡잡한 피부의 이주노동자들이다.



    ‘하나의 아시아’ 잔치 분통터진다

    외국인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차별과 따돌림을 받으며 자라야 하는 자녀들의 미래다.

    “아시안게임이요? 응원할 시간이 없어요. 인도네시아 선수들은 TV에 나오지도 않던데요.”

    한 인도네시아인 이주노동자는 “휴일도 없이 12시간씩 교대근무를 하고 있는데 응원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월드컵 때 제2의 조국인 한국을 목이 터져라 응원했는데, 사장이 아시안게임엔 관심이 없는지 계속 일만 시킨다”고 했다.

    한국에 온 지 올해로 10년이 된 방글라데시인 호센씨(40)는 “다른 아시아인들을 게으르고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여기는 한국 사람들은 아시안게임을 개최할 자격이 없다”면서 “유럽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동료들은 모두 영주권이 나왔는데, 10년 동안 한국을 위해 일했는데도 아무런 보상이 없다”고 원망을 내비쳤다.

    다른 이주노동자들과 달리 중국인들에게선 아시아경기대회의 열기가 어느 정도 느껴진다. 중국 선수단의 성적이 좋아 TV에서 중국 선수들의 활약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술집과 식당 등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스포츠 중계를 보는 중국인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송리강씨(39)는 “중국 선수단의 좋은 성적에 절로 힘이 난다”며 “월드컵 때는 솔직히 배가 아팠다”고 말했다.

    아시아 각국의 노동자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국경없는 마을에서 중국인들을 제외하면 ‘아시아경기대회’의 들뜬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리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코시안들도 상당수였다. 외국인들에게 배타적이고 이중적인 한국인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만 싹트고 있을 뿐이었다.

    한국인들의 배타성에 분노하기는 한국 여성과 결혼한 아시아인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의 한국 국적 취득은 별 어려움이 없는 반면,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의 한국 국적 취득은 매우 어렵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면 3000만원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한국에서 결혼한 뒤 2년 이상 주소지가 확실한 상태에서 생활해야 한다. 언뜻 쉽게 국적을 획득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3000만원의 자산을 보유하기도 어려운 데다, 중학교 수준의 언어구사 능력과 상식을 요구하는 필기 및 면접시험도 이들에겐 쉽지 않은 관문이다.

    코시안 가정의 가장은 취업비자를 받는 것도 만만찮다. 외국인만으로 이뤄진 코시안 가정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인과 외국인의 결혼으로 이뤄진 코시안 가정의 경우도 취업비자를 받는 것이 매우 어렵다. 인도네시아 식품점에서 만난 필리핀 출신 코시안 칼릭씨(34)는 “한국 국적은 바라지도 않는다. 한국인 아내를 생각해서라도 취업비자는 내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문화·다인종 사회 준비해야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들은 취업을 할 수 없는 F1비자와 취업을 할 수 있는 F2비자 중 하나를 받게 된다. 본국과 한국에 혼인신고를 하면 F2비자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불법체류자 신분인 탓에 혼인신고를 위해 출국하기 위해선 수백만원에 이르는 벌금을 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다시 들어올 수 있다는 보장조차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취업비자를 얻는 것을 포기하고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의 아시아’ 잔치 분통터진다

    방글라데시 출신 코시안 부부. 임신 9개월째인 마르칸씨(25)는 “불법체류자 신분인 탓에 하루하루가 불안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파키스탄 상점에서 이슬람식 식료품을 구입하던 이모씨(27)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인 남편을 둔 그는 두 살짜리 딸을 키우고 있는데, 아이가 비뚤어지지 않고 잘 자랄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다. 이씨는 “왜 외국인과 결혼했느냐는 친구들의 비아냥거림은 참을 수 있지만, 딸이 다른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거라는 생각에 늘 괴롭다”고 말했다

    자녀 양육 문제도 코시안 부부들을 힘들게 하는 것들 중 하나다. 외국인만으로 이뤄진 코시안 가정은 아이들을 교육시킬 방법이 거의 없다. 외국인 학교에 보내면 되지만 비용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외국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으로 이뤄진 가정은 어머니의 호적에 자녀를 올린 경우엔 학교 입학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외국인 가정과 별반 다른 것이 없다.

    코시안 노동자들을 위한 상담소 ‘코시안의 집’ 김영임 원장은 “한국인과 아시아인들의 국제결혼이 최근 급증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10년 내에 안산 인천 등의 각급 학교 학생들의 상당수를 코시안들이 차지할 것”이라고 말한다. 관련된 정부 통계는 없지만 시민단체들은 현재 국내 코시안 2세의 수가 5000명~1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김원장은 “국적이나 비자 제도가 개선되지 않으면 커다란 사회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며 “코시안 가정이 한국사회에 자리잡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코시안들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은 경제력과 피부 색깔을 기준으로 외국인을 구별해 대우하는 ‘이상한 나라’다. 코시안들이 한국인들에게 분노하는 것은 산업연수생 제도나 까다로운 국적취득 절차보다는 한국인들의 배타적인 태도 탓이 더 크다. 인도네시아인 줄리어스씨(38)는 “구타하거나 임금을 체불하는 업체는 이젠 거의 없다”면서 “외국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멸시하듯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삐딱한 시선”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박천응 목사는 “한국인들도 지금부터 서구와 싱가포르 같은 다문화, 다인종 사회를 준비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배타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지구촌시대를 준비할 수 없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아시아인의 잔치가 아닌 우리들만의 잔치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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