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2

2002.09.19

실세들 입김에 빗나간 ‘정도 세정’

99년부터 각종 청탁의혹에 삐걱… 특정 기업에 엄격, 권력엔 약한 모습 ‘두 얼굴의 국세청’

  • < 허만섭 기자 > mshue@donga.com

    입력2003-12-23 1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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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세들 입김에 빗나간 ‘정도 세정’
    김영삼 정부 때의 세무비리는 ‘지방 세무서’가 중심 무대였다. 세무서 중하위 세무공무원들이 주체가 되어 집단적으로 서로 봐주면서 뇌물을 받고 감세청탁을 들어주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서는 양상이 달라졌다.

    지방 세무공무원의 대규모 비리는 거의 적발되지 않았다. 대신 국세청장 등 세무기관의 최고위층이 여권 핵심 실세로부터 직접 청탁받아 ‘하명’하는 이른바 ‘권력형 세무비리’ 의혹들이 끊이지 않고 불거져 나왔다. ‘고공전’이 펼쳐지니 실상의 전모가 드러나기 더 어렵게 됐다. 특히 안정남 전 국세청장의 극단적 언행불일치, 해외도피(2001년 11월), 그리고 끝내 그가 송환되지 않고 있는 현 상황은 현 정권의 세무 난맥상을 상징한다.

    1999년 7월15일 오후 안정남 신임 국세청장은 전국 세무서장들을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32개 실천과제가 담긴 요란한 ‘국세청 제2개청’ 선언식을 가졌다. 그가 밝힌 ‘정도세정’의 핵심은 ‘일체의 청탁 배격’. 그러나 구호를 선창한 청장 자신은 이미 한 달 전 ‘4대 게이트’ 주인공 중 한 명인 이용호씨로부터 취임 축하 난을 받았었다. 이씨에게 축하용 난을 보내라고 권유한 사람은 도승희씨. 그는 ‘권부의 핵심’으로 통했던 아태재단 주변 인물들 사이를 오가며 각종 이권사업의 브로커 역할을 해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차남 홍업씨(아태재단 부이사장)에 이은 아태재단의 2인자 이수동 상임이사도 이 무렵부터 주변에 자신과 안정남 청장과의 친분을 과시했다고 한다. 국세청장은 취임과 동시에 권부의 브로커들과 얽혀들고 있었던 셈이다. 정도 세무행정 선언이 말뿐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이유와 무관치 않다.

    과거와 달리 국세청 최고위층 상대로 청탁



    국세청은 이미 1999년부터 각종 청탁 의혹에 휘말렸다. 당시 여권 출신 K장관 동생 소유의 벤처기업은 1999년 말 수십억원대 허위매출·매입신고를 한 사실이 적발됐지만 소액의 세금만 추징당한 채 종결되어 의도적 사건 축소라는 의혹을 받았다. 국세청은 2000년 들어서면서 각종 권력형 비리에 본격적으로 말려들기 시작했다. 정현준 한국디지털라인 사장은 2000년 중순 “세금부과 편의를 봐달라”면서 서울지방국세청 관계자에게 1000만원을 준 혐의를 받았었다.

    현 정권 들어 권력형 비리 게이트의 주인공 치고 세무공무원과 이러저러한 끈이 없는 사람은 드물었다. 특히 국세청 최고위층과 직접 상대한다는 것이 과거와 다른 점이었다. 이는 비리 주모자들이 국세청 최고위층과 친분이 있는 여권 실세와 끈을 갖고 있어, 여권 실세의 소개를 받았을 개연성을 높인다.

    실세들 입김에 빗나간 ‘정도 세정’
    이용호씨로부터 취임 축하용 난을 받은 안정남 당시 청장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이씨측 수첩에 기록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용호씨 계열사 KEP전자는 1999년 10월 마포세무서에 수십억원대 회계조작 사실을 적발당하고도 2000년 5월 관할 금천세무서로부터 1억4000만원을 납세하라는 명령만 받았을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KEP전자는 “뇌물을 뿌리라”는 요지의 ‘마포대처방안’이라는 문건을 만들어 이용호씨에게 보고했다. 안 전 청장은 이 과정에서 청탁을 받고 세무조사를 무마해줬다는 의혹을 샀다.

    김대중 대통령 차남 홍업씨는 2000년 11월 한국미스터피자 정우현 대표로부터 “서울지방국세청의 특별세무조사를 무마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이수동 당시 아태재단 상임이사를 통해 안정남 당시 국세청장에게 부탁한 의혹이 제기됐다. 이수동씨의 ‘국세청 관리’가 빛을 발한 셈이다.

    청탁 대가는? 돈인가 승진약속인가

    권력 실세의 ‘집사’급까지 국세청장을 ‘직접’ 상대했다. 현 정부의 실세들 앞에서 국세청 ‘문턱’은 너무 낮았으며 국세청은 권력의 요구를 비굴할 정도로 잘 수용해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사례다. 홍업씨의 친구 김성환씨는 삼보판지 대표 유모씨가 등급이 높은 모범납세자상을 받아 일정 기간 세무조사를 면제받게 한 대가로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이 외에도 김씨는 안정남 당시 청장에게 두세 가지 세금 감면 청탁을 더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안 전 청장은 2001년 신승남 검찰총장의 동생으로부터 사채업자 세금 감면 청탁을 받고 성사시켜주기도 했다. 또한 올해 들어 ‘최규선 게이트’ 수사에서도 검찰은 정부 고위인사가 최규선, 김홍걸씨(대통령 3남)와의 금전거래 흔적이 있는 회사의 세금감면 청탁에 개입했다는 정황을 포착했었다.

    여러 유형의 권력실세 그룹과 국세청 최고위 인사 간 세금감면 청탁·수용 매커니즘이 이렇게 ‘맨투맨’ 식으로 간단하고 거침없었다는 것은, 실제로 청탁에 가담한 권력층이 훨씬 광범위했을 수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이행된 세금 감면 행위가 검찰수사에 의해 드러난 것보다 훨씬 많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갖게 한다.

    국세청이 조세정의실현의 대표적 사례로 발표해온 언론사 세무조사에서도 권력 실세-기업가-국세청의 유착 의혹은 어김없이 불거져 나왔다. 이러한 의혹은 최근의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까지 이어졌다. 8월27일 청문회에서 한나라당은 장대환 총리서리와 청와대 실세와의 친분설을 제기했다. 한나라당 안택수 의원은 “2001년 언론사 세무조사에서 매일경제는 얼마를 납부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장대환 총리서리는 “말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안의원은 “추징금액은 130억~140억원인데 정부와 뒷거래를 해서 30억원을 냈다는 얘기가 있다”고 추궁했다. 장 총리서리는 “사실과 다르다”고 답했다. 안의원이 “세무조사 결과로 나온 세금추징액과 납부액을 공개한 언론사도 많다”면서 “매경도 공개해보라”고 추궁했지만 장 총리서리는 끝내 공개를 거부했다.

    안정남씨 후임의 손영래 국세청장은 2001년 11월 국회에서 홍걸씨의 3억원 입금계좌에 대한 조사를 촉구받자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국세청은 검토 결과를 밝히지 않았다. 홍걸씨는 이후 세금 2억2400만원을 포탈한 혐의로 구속됐다. 국세청이 특정 기업엔 추상같지만, 또 한쪽에는 나긋나긋하기 이를 데 없다는 인상은 아직 지워지지 않고 있다.

    현 정권의 국세청 관련 의혹들은 여러 게이트의 전체 그림으로 봤을 땐 ‘주 메뉴’가 아닌 ‘끼워팔기 상품’ 정도였다. 권력 실세와 비리기업주 간의 본 게임은 따로 있었고 세금 감면은 실세가 기업주에게 시혜하는 ‘보너스’ 형식이었다. 특정 연고, 특정 그룹에 소속된 실세는 국세청에 세금 부탁하는 정도는 ‘일도 아닌 것’으로 여긴 셈이다.

    과연 무엇이 권력 실세들로 하여금 국세청 공무원들에 대해 이토록 당당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 실세들의 청탁은 일부 사실로 드러났으니, 이제는 청탁을 들어준 대가로 국세청측에 제공한 반대급부가 무엇이었는지가 중요하다. 검찰수사에서 안정남씨 등 국세청 고위관료들이 청탁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얘기는 아직 없다. ‘돈’이 아니라면 ‘요직 보장’이나 ‘승진’이 아니었을까라는 추론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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