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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칼럼

예술에 ‘書券氣’가 문제더냐

  • < 우 찬 규 / 학고재 대표 >

예술에 ‘書券氣’가 문제더냐

예술에 ‘書券氣’가 문제더냐
영화 ‘취화선’은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 현혹한다. 주인공은 조선 말 화가 오원 장승업이다. 화가의 일생을 다뤄서 그런지 영상미가 빼어나, 그 강렬한 주제의식은 차치하고라도 상영시간 내내 수려한 화면에 눈길을 빼앗긴다. 이쯤 되면 스크린이 화폭이고, 화폭이 스크린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동양에선 시와 그림이 한 뿌리라는 뜻으로 ‘시화동원’(詩畵同源)이라 했다. ‘취화선’을 보고 나니 ‘영화(映畵)동원’이라는 말을 써도 좋을 듯했다. 영화와 그림이 한 뿌리라는 얘기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한자로 ‘비추는 그림’이라 풀이한 것도 무리는 아닐 성싶다.

이 영화에서 오원은 통제하기 힘든 인물로 그려진다. 좌충우돌이다.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마음 가는 대로 쏘다니고 붓길 따라 춤춘다. 가히 뇌락한 기질이요, 호방한 처신이다. 그림은 사람을 닮는다. 천성이 그러할진대, 오원의 그림은 활달할 수밖에 없다. 데데한 격식이나 꽉 막힌 법칙을 넘어선다. 중국의 화본을 본따 그리기도 했지만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변동해내는 조형능력은 일품이다. 능숙하면서도 천진함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으니, 오원이야말로 타고난 화가임이 분명하다.

기득권 유지 위해 화가의 천재성 폄훼는 부당

그런 오원의 그림을 두고 동시대 사인과 대부들은 뒷공론을 폈다. “솜씨는 봐줄 만한데 속기를 벗지 못했다”며 쑥덕거렸다. 오원은 저잣거리에서 굴러먹은 고아 출신이고, 글줄이나 꿰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니 조선조 양반계급의 성에 차는 교양을 쌓았을 리도 만무하다. 한마디로 그의 그림은 문기가 없어 기예의 천박함만 보인다는 비판이었다. 물론 영화에서 오원은 만만찮게 대응한다. 되레 큰소리치는 장면도 나온다. “제발(題跋·자기가 쓴 제목이나 남이 쓴 품평)이 들어 있어야 그림인가, 세상이 뭐라 하든 나는 나고 그림은 그림이다.” 그러나 그 고함은 조선의 완악한 선비계층 앞에서 초라한 변명에 머물 뿐, 비판자를 설득하는 공명으로 이어지지는 못한 것 같다.

선비화가들이 경멸했던 오원의 ‘속기’란 대체 무엇인가. 속기는 ‘시속기’(市俗氣), 곧 시정의 속된 기운을 일컫는다. 그것의 반대말이 ‘서권기’(書券氣)다. 숱한 글을 읽고 난 다음에야 얻게 되는 기운을 말한다. 동양화의 교과서로 불린 ‘개자원화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필묵은 속기에 물들어선 안 된다. 속된 기운을 없애는 데 다른 방법이 없다. 독서를 많이 하면 서권기가 올라가고, 시속기가 내려간다.’ 조선의 문인들은 그림의 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서권기를 꼽았다. ‘그림이란 글의 지극함이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화론까지 횡행할 지경이었으니 그림에 변변한 한시 한 줄 못 넣은 오원은 멸시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다.



비교적 출신계급을 가리지 않고 교유했다는 추사 김정희도 이 서권기에서는 양보가 없다. 그는 “난초 치는 법은 예서 쓰는 법과 가까워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며 못을 박았다. “인품이 고고해야 화품도 높아지는 것인데, 비록 구천구백구십구 분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나 나머지 일 분의 경지는 누구나 다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말로 화가에게 겁을 주기도 했다.

‘거속’(去俗)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추사가 한걸음 더 나아가 화가의 인품을 걸고 넘어지는 대목은 적이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

실제로 속기를 탓하는 사대부 화가들의 흉중에는 서권기를 빙자해 은근한 선민의식을 드러내고자 한 혐의가 있다. 숙종의 어진을 그린 사대부 출신 조영석도 처음 임금의 명을 받았을 때는 “내가 어찌 화공들과 더불어 천한 기예로 외관을 더럽힐 수 있겠나이까” 하며 사양했고, 세종 때 사인화가 강희안은 “서화는 천박한 재주이니 후세에 남는 것은 욕된 이름 뿐”이라며 자조하기도 했다. 서책을 끼고 살면서 개결한 성품을 함양하는 자세는 비단 화가에게만 머무는 덕목이 아닐 것이다. 어느 직분에서나 권면할 일이다. 그러나 분출하는 화가의 천재성이 당대 귀족 선민들의 지배적 이념 아래 폄훼되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다. 더구나 그것이 지배층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논리가 된다면 부당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속기’는 볼 줄 알았지만 ‘근기’(根氣)는 읽지 못한 선비들에게 오원은 쓴소리 한마디를 내뱉는다. “저놈들은 저들이 보고 싶은 것만 그림에서 보는데, 거기에 발목 잡히면 영원히 저놈들 손에 놀아나는 거야.” 연습해서 얻는 경지(習而得之)가 나면서부터 얻는 경지(生而得之)를 나무랄 순 없는 법이다. 예술혼은 남이 다듬지 못한다. 그럼에도 학의 긴 다리를 자르고 매화의 늙은 가지를 쳐내야 할 것인가.



주간동아 341호 (p96~96)

< 우 찬 규 / 학고재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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