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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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포악해진 한국 영화가 불안하다

  • < 조희문 / 상명대 교수·영화평론가 >

    입력2004-10-29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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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격 포악해진 한국 영화가 불안하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는 말을 믿는다면, 요즘 한국 영화가 그리는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개판’이다. 욕이 빠지면 말이 안 된다는 듯 패악하고 천박한 욕이 난무하며 난폭한 삿대질과 주먹질, 불륜,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누가 더 사납고 난잡한지 경쟁이라도 하듯 극한을 향해 치닫는 모습을 보노라면 영화가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해체하거나 전복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 정도다.

    올해 한국 영화 중 흥행 기록 선두를 차지한 ‘공공의 적’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가 악당이고 선인인지 가리기 어렵다. 최고라고 자부하는 엘리트가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사람 죽이는 데도 이유가 있나?’라며 빈정거리고, 경찰은 온갖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면서도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버틴다. 그러면서 말끝마다 욕이다. 개봉중인 ‘정글쥬스’에서도 그대로 따라 하기도, 옮겨 적기도 민망한 욕이 일상 언어처럼 튀어나온다.

    폭력과 욕설 난무… 사회적 영향과 책임 생각할 때

    한국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친구’에서는 정상적인 도덕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혹스러울 정도의 욕설과 은어가 등장하고, 조폭들이 목욕탕에서 용 문신을 드러내며 난장판을 벌이듯 거친 폭력을 섬뜩하게 과시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다른 영화들에 비해 욕은 거의 없는 수준이지만 체제와 이념에 대한 ‘다른’ 시선을 드러냈다.

    청소년들의 일탈을 그린 ‘눈물’의 주인공들은 그들의 부모와 사회에 대해 극단적인 증오와 적개심을 보였다. 등급 부여 문제로 논란을 빚었던 ‘거짓말’은 중년 남자와 미성년(?) 여자의 변태적인 사랑을 적나라하게 담았고 ‘해피엔드’는 가정 주부의 불륜을 노골적인 성애 장면에 담아냈다. ‘엽기적인 그녀’나 ‘조폭 마누라’는 남녀의 역할 전복을 과장해 보여준 경우다.



    영화 속에 ‘욕’이나 비정상적인 행동과 습관을 가진 캐릭터가 등장한 것은 오래된 일이다. 이런 것들이 극의 재미를 더하고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 사용돼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개별 작품의 개성을 표현하는 수준을 넘어 일상적 수준으로까지 번진 작금의 현상은 걱정스럽기만 하다.

    영화 속에서 쓰이는 말이 험하고 거친 만큼 각각의 인물이 지닌 관계 또한 서로가 서로에 대해 공격적이며 부정적인 경우가 일반화되어 정상적 판단력과 도덕적 가치를 지닌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세이 예스’나 ‘복수는 나의 것’에 등장하는 폭력 행위들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보편적 가치나 질서, 법을 지키려는 인물은 무능하거나 수구적이며 심한 경우 반사회적인 존재로 격하되고, 세상은 파괴하거나 뒤집어야 할 공격의 대상으로 설정된다. 영화를 보며 편안한 위안을 얻고 거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기대하는 것은 물정 모르는 낭만이거나 호사스러운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눈길 끄는 부분은 이런 영화들이 대부분 한국 영화의 주류를 이루는 영화사나 감독들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비주류나 마니아 영화들에서 다룰 만한 표현들이 주류 영화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영화의 중심을 지켜주어야 할 작품들이 오히려 주류적 가치나 의식을 해체하는 데 앞장서는 역설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미국 영화가 유지하고 있는 일반적인 모습과 다른 점이다. 미국 영화들은 현실도피적이며 미국 우월 의식을 지나치게 앞세운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적어도 지키고 보호해야 할 가치에 대해서는 함부로 침범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법과 질서를 가치 규범의 중심에 두며 가족적 유대 등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유지하고, 국가적 정체성에 대해서도 완고하다 할 정도로 보수적이다.

    9·11 테러 사건이 나자 비슷한 소재를 다룬 ‘콜래트럴 데미지’란 영화의 개봉을 미루기까지 했던 사례는 미국의 영화인들이 영화의 사회적 영향과 책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행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더라도 영화가 사회적 통합과 공동체적 유대를 증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오늘날의 영화들에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해체, 저급한 자기 학대와 부정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영화가 사회적 영향력과 책임을 소홀하게 다루어도 좋다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덩치는 커졌지만 성격은 포악해지고 있는 한국 영화가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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