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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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엔 지금 ‘경선 동원령’

與 대선주자 일부 진영 ‘내 사람 모으기’ 한창 … ‘국민 뜻 반영’ 당초 의미 퇴색

  • < 제주=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4-10-28 14: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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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엔 지금 ‘경선 동원령’
    지난 2월15일 아침 8시30분 제주시 연동 C호텔. 민주당 한 대선주자 진영에서 일하고 있는 A씨가 바쁜 걸음으로 커피숍에 들어서자 여종업원이 곧바로 구석진 자리로 안내한다. 커피숍이 제공한 일종의 전용석이다.

    자리를 잡은 그는 바로 뒤따라온 현지인 B씨와 수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시작했다. 경선 취지, 특정 후보 약력과 대선 전망 등 20여분에 걸쳐 브리핑을 끝낸 A씨는 B씨에게 국민경선단 응모원서를 내밀었다. B씨가 응모원서를 작성하고 일어서자 A씨는 곧바로 옆자리에서 기다리던 또 다른 사람을 자기 자리로 청한다. 그 사이, 낯이 익은 종업원이 웃는 얼굴로 와 테이블을 새로 세팅했다. 두 번째 현지인도 별말 없이 응모에 동의했다.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들이라 비교적 ‘작업’은 쉽게 끝났다. 두 사람을 만나 응모원서를 받아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50분 정도.

    A씨가 이렇게 하루를 30분 단위로 쪼개 사람을 만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연말부터. 민주당 쇄신안이 결정되고 국민경선 원칙이 가닥을 잡자 곧바로 선발대로 제주로 날아와 표밭 관리에 나선 것. 밤 10시에 하루 일과가 끝날 때까지 그가 만나는 사람은 보통 25명 내외다.

    관광도시 특급호텔의 커피값은 만만치 않다. 하루에 10만원대는 기본이고 최고 28만5000원을 커피값으로 지불한 일도 있다. 당연히 커피숍에서는 그에게 가능한 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려 애쓴다. 50여일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해 지루할 때도 있지만 A씨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공교롭게도 같은 호텔 커피숍에서는 작년 연말부터 유력 경쟁주자의 참모가 같은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

    인척·지인 등 연결 … 조직적 입당 운동?



    A씨는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상 못 본 척할 수가 없다”며 경쟁주자 진영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한다. 경쟁주자 진영 역시 30, 40분 단위로 사람을 만나며 응모를 권유하는 눈치다. A씨와 경쟁주자 참모는 서로 얼굴을 보며 인사를 나누지만 ‘작업’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최근 A씨는 상대후보측이 참모를 보강해 작업을 강화하고 있는 점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제주도에 선거 열풍이 상륙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 3월9일 민주당 경선을 대비, 국민경선단을 모집하는 A씨 같은 사람이 제주 유명 호텔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곧잘 눈에 띈다. 대선주자들도 4, 5차례 제주를 방문해 경선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정치인들도 수시로 제주를 오간다. 택시 기사들은 “제주공항에 가면 관광객만큼이나 정치인들이 많다”며 신정치 1번지 제주의 정치 열풍을 설명한다. 지역 신문들은 ‘제주가 한국의 뉴햄프셔’라며 대선주자들의 인터뷰 기사에 지면을 할애해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76명의 초미니 대의원을 가진 제주에 이처럼 대선주자 진영이 총력을 기울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인제 고문의 사조직인 21세기산악회 박수현 사무총장(40)은 “제주는 지역색이 약해 경선 결과는 곧 ‘전국 민심의 표준’으로 해석된다”고 말한다. 제주에서 1위를 하는 것이 곧 전체 경선 1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

    제주도는 또 선거 때마다 예측불허의 결과를 곧잘 만들어낸다. 이번 선거도 이변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유력 후보는 추격자를 무력화하거나 중도 탈락케 하는 대세론을 강화할 수도 있고, 반대로 군소 후보가 ‘치고’ 나가 새로운 스타 반열에 오를 가능성도 열려 있다. 각 주자들의 캠프는 “제주도에서 3등 이내에 들지 못하면 이후 레이스에서 따라잡기 힘들다”(김근태 고문 측근)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 제주 성적에 따라 동서연대, 개혁연대 등 각 후보간의 합종연횡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마디로 민주당 7룡(龍)의 우열이 제주에서 판가름나는 것.

    때문에 기선을 잡으려는 대선주자들의 경쟁은 치열하다. 우선 국민 ‘동원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A씨와 같이 호텔에서 투표인단 응모를 유도한 것도 같은 배경이다. 일단 많은 숫자를 등록시켜야 선거인단 추첨에서 지지자의 당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선주자들 대부분이 제주지역 내 자파 인사들을 공모에 동원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국민’이 동원되고 있는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지난 1월부터 제주에 가 모 대선주자의 득표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C씨. 그는 일주일 가운데 2~3일은 제주에서, 또 이틀은 서귀포에서 활동하느라 수시로 한라산 5·16도로를 넘는다. 택시를 타면 한 시간 거리인 서귀포를 향하면서 C씨는 항상 앞자리에 앉는다. 택시기사를 국민경선단에 응모시키는 공작을 펼치기 위해서다. 여론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택시기사의 특성을 알고 있는 C씨는 이 과정에 10여명의 택시기사로부터 응모원서를 받는 개가를 올렸다.

    제주엔 지금 ‘경선 동원령’
    지난 1월 말 민주당 제주 모 지구당에 지역 산악회원 20여명이 단체로 입당을 희망했다. 지구당 간부가 이 산악회 간부와 대화를 해보니 그는 차기주자 D씨의 캠프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는 모 인사의 인척이었다.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민주당 도지부 한 관계자는 “지구당별로 하루 수십건씩 입당 문의전화가 걸려오지만 각 후보 진영과 연고가 있거나 후원회 등에 가입한 인물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조직적인 입당운동이 벌어지는 듯하다는 것이 그의 진단.

    민주당 제주시 한 관계자는 “대의원 수가 늘었지만 여전히 지구당위원장이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장악할 수 있는 수준”이라며 선거가 과열될 경우 동원과 줄서기 행태가 나타날 것을 우려했다. 각 캠프가 조직적으로 선거인단 공모 참여를 유도할 경우 국민의 뜻을 경선에 반영한다는 국민참여경선제의 의미가 퇴색할 것은 뻔한 이치.

    그럼에도 각 대선주자 진영은 사조직 등을 동원한 선거인단 공모 참여를 부추기고 있다. 특정 캠프는 1만명이 목표고 또 다른 캠프는 1만5000명을 동원할 것이라는 등의 소문이 제주 전역에 흘러다닐 정도로 동원전은 치열하게 전개된다. 17일 제주를 방문한 정동영 고문은 보다못해 “현행 국민참여 경선방식은 자발적인 일반인 참여를 유도하는 게 아니라 누가 조직적으로 자신의 지지자를 많이 동원하는지를 시험하는 동원 경쟁 체제”라며 “선거인단 선정방식을 선 응모, 후 추첨에서 선 추첨, 후 응모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의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구당위원장은 물론 도지부 간부들 역시 대선주자들의 구애로 인해 정상적인 업무를 보지 못할 정도다. 제주 출신 고진부 의원(남제주`-`서귀포)의 경우 이미 한화갑 고문의 계보로 분류돼 타 후보의 구애 타깃에서 벗어났지만, 성향을 밝히지 않은 장정언 의원(북제주) 정대권 위원장(제주시)의 경우 대선주자들로부터 잦은 러브콜을 받는다. 중립을 표방하며 구애를 뿌리치고 있지만 끝까지 중립을 지킬지는 알 수 없다.

    제주도 도지부 간부인 E씨도 대선주자 및 캠프 인사들로부터 “잠시 만나자”는 구애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요즘 전화를 피하느라 휴대폰을 꺼둘 때가 많다. 지구당 개편대회가 열린 지난 14일에는 한꺼번에 두 명의 대선주자 진영에서 전화를 해 “후보와 인사나 하라”는 연락을 받고 이를 거절하느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동원전이 1차 기싸움이라면 선거인단이 결정된 26일부터 3월8일까지는 매수 등과 관련한 과열양상이 우려되는 시점이다. “우리가 추천했다고 100% 우리 후보를 찍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는 말에서 읽을 수 있듯, 명단이 공개되면 동원전에 이어 또 한번 대의원 잡기 전쟁을 치러야 한다. 밖에서는 알아볼 수 없는 수면 밑의 움직임은 이미 조금씩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40여일 동안의 경선을 치르기 위해서는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1백억원이 넘는 돈을 써야 할 것이라고 당사자들이나 참모들은 추산한다. 이들은 그 자금 상당부분을 신정치 1번지 제주 경선에 쏟아부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누구는 그 돈을 마련했다더라’ ‘누구는 그 이상을 쓸 것이다’는 등의 소문이 무성한 상태. 최근 정치개혁 바람 등으로 금품 경선 방지 움직임도 있지만 대의원 명단이 공개될 경우 금권을 앞세운 매수 가능성이 공공연히 거론된다. 제주 시민단체 한 관계자는 “경선 투표인단 수가 760명에 불과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매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선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지만 정작 제주도민들은 담담한 표정이다. 시내 중심가 연동을 지나는 시민 10여명 중 절반 가량은 국민경선제가 제주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택시기사 한모씨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며 귀찮다는 투다.

    반면 우려의 시각도 있다. 16일 제주시 연동에서 만난 김모씨(40·제주시 연동)는 “지연 학연 혈연이 서로 엉켜 있는 지역 특성상 후유증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청정지역 제주가 중앙정치의 때로 얼룩질 것을 염려한 것. 그럼에도 제주를 향한 정치인들의 구애 열정은 식지 않고 있다. 16일 제주도를 방문한 이인제 고문은 “내 이름 끝자를 소개할 때 항상 제주도 제(濟)라고 설명한다. 막내딸은 귤을 하도 많이 먹어 얼굴이 노래졌다”며 제주 찬가(讚歌)를 부르기도 했다.

    노무현 고문은 “언젠가 꼭 한번 제주도에 살아보고 싶다”며 제주 찬가 대열에 동참했고 유종근 전북지사는 “제주도를 싱가포르처럼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겠다”며 제주도민을 향한 구애 의지를 피력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대선주자들의 우열도 점차 드러나고 있다. 2월17일 현재 경선 판도는 ‘1강 2중 4약’(상자기사 참조). 그러나 대선주자들의 막판 공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여 경선 당일까지 변화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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