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3

2001.12.13

‘사랑의 여신’ 흉내낸 ‘승리의 여신’

  • < 노성두/ 미술사가·서울대 미학과 강사 > nohshin@kornet.net

    입력2004-12-02 15:0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사랑의 여신’ 흉내낸 ‘승리의 여신’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고대 유물관으로 이어지는 계단참에는 목이 달아난 여신이 하나 서 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반가운 전령이다. 가까이 다가서면 날개 깃털 사이로 바람소리가 요란하다. 푸른 하늘을 헤집으며 들썩이는 날갯짓을 보면 대리석으로 빚은 조형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니케는 마침 뱃머리에 내려섰다(사진 1, 2). 앞발은 안착했지만 뒤꿈치는 아직 닿지 못했다. 파도를 가르며 위아래로 요동치는 뱃머리에 착지하면서 몸의 균형을 잡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깨 뒤에 붙은 두 날개가 기우뚱하다. 니케는 두 다리를 크게 벌리고 섰다. 바닷바람이 옷자락을 못살게 굴면서 질투를 부린다. 발 아래 뱃머리가 삐걱거리는 대로 여신의 사지는 발 끝에서 날개 끝까지 덩달아 흔들린다. 도마뱀처럼 허리가 미끈한 조각을 보고 있노라면 여신의 신성한 날개바람에 홀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랑의 여신’ 흉내낸 ‘승리의 여신’
    독일 시인 릴케도 1902년 니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혼을 쑥 빼놓는 아름다움에 들떠 쓴 편지글이 남아 있다. 릴케는 “사모트라케의 니케를 보면 예술의 진정한 기적, 새로운 세계를 직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찬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니케가 처음부터 루브르가 자랑하는 헬레니즘 조각의 얼굴마담은 아니었다. 1863년 프랑스 영사 샹푸아소가 사모트라케 섬에서 카비로이 성소를 발굴하다 캐낸 니케는 100토막이 넘게 산산조각난 돌무더기에 불과했다. 곧장 나무궤짝에 담겨 루브르 복원실에 도착한 돌무더기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자태를 뽐내며 눈부시게 부활한다. 3년 뒤, 프랑스 정부는 2차 발굴단을 파견한다. 그러나 부근에 흩어진 건축 파편과 입상의 명문 토막 따위를 긁어왔을 뿐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니케 여신이 뱃머리에 올라선 자세로 서 있었다는 사실은 1873년과 1875년 콘체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발굴팀이 최초로 밝혀냈다. 대리석 뱃머리를 조각상과 붙여보았더니 꼭 들어맞았던 것이다. 체계적인 학술 발굴이 거둔 성과였다. 그 뒤에도 어딘가 파묻혀 있을 여신의 머리를 찾느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눈에 불을 켰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사랑의 여신’ 흉내낸 ‘승리의 여신’
    니케의 높이는 2.45m. 머리와 두 팔은 떨어져나가고 없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목과 어깨 언저리만 만져보면 눈 감고도 사지의 자세를 읽어낸다. 머리는 약간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위로 젖혔을 것이다. 또 오른팔은 앞으로 쭉 내뻗고 왼팔은 뒤로 젖히면서 아래로 늘어뜨렸을 것이다. 요행히 손목부터 손가락까지의 오른손 토막이 발견되었다. 여신의 손가락은 무언가 대롱처럼 긴 물체를 가볍게 감싸고 있는데, 아마 승리의 나팔 살핑크스를 입에 대고 불고 있었던 모양이다(사진 3).

    ‘사랑의 여신’ 흉내낸 ‘승리의 여신’
    뱃머리에 니케를 세우는 전통은 기원전 306년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를 살라미스에서 물리치고 찍은 주화 그림에 처음 등장한다(사진 4). 다리를 앞뒤로 벌린 자세, 승리의 트럼펫을 오른손에 쥐고 부는 모습이 사모트라케의 니케와 똑같다. 펄럭거리는 옷자락도 닮았다. 날개는 조금 처졌지만 날개 안쪽이 보이도록 펼쳤다.

    에피다우로스의 아스클레피오스 성역에서도 니케를 세웠던 뱃머리 조형물이 발견되었다. 또 린도스에서도 같은 형식의 기념물 받침부가 나왔다. 그러니까 적어도 기원전 260년까지는 뱃머리에 올라선 니케가 승리의 여신을 표현하는 주요 도상 형식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이러한 전통은 로마 시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키레네의 아고라에는 지금까지도 뱃머리와 니케 조형물이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 기원전 1세기에 무적 장군 폼페이우스가 연근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나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물리친 옥타비아누스도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의 승리를 기념해 주화를 찍었는데, 여기에도 뱃머리에 니케가 우뚝 서 있다. 이 가운데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가장 양식적으로 성숙한 사례로 보인다.

    ‘사랑의 여신’ 흉내낸 ‘승리의 여신’
    니케는 원래 신전 지붕 처마 끝이나 높직한 기둥 위에 세우는 게 관례였다. 이처럼 높은 전시 장소는 햇살을 등에 업은 승리의 여신이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쏜살같이 하강하는 속도감을 연출하기에 그만이었다.

    델로스에서 발굴된 아케익 니케도 그랬다(사진 6).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케익 특유의 미소를 지으면서 두 팔과 다리를 바람개비처럼 돌린다. 몹시 날랜 자세다. 그런데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무거운 옷 주름에서는 움직임의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깨 뒤에 두 날개를 달고 있지 않았다면 꼭 메두사 같은 괴물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사랑의 여신’ 흉내낸 ‘승리의 여신’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동쪽에 서 있던 니케도 높이 9m의 삼각 기둥 위에 올라서 있다. 기원전 420년 메세니아와 나우팍토스가 스파르타를 누르고 봉헌한 승전기념물이다. 고전기 올림피아의 니케는 아케익 시대보다 팔다리의 움직임이 자연스럽다. 그 대신 마파람이 여신의 옷자락을 잡아끈다. 덕분에 전나무처럼 미끈한 두 다리와 보드라운 아랫배 윤곽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왼쪽 가슴은 아예 훌렁 벗겨져 속살이 다 보인다. 햇살 아래 니케를 올려다본다면 옷 주름 사이에 박힌 그림자가 몸 자세의 배경으로 깔리면서 공간적 효과를 더했을 것이다.

    이런 니케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전형적인 도상이다. 그런 점에서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조금 다르다. 전령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승리의 목표를 향해 함께 진군하는 미더운 동료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젖가슴을 드러내지 않고 어깨만 살짝 내렸다. 한쪽 가슴을 다 드러낸 올림피아의 니케와 다른 점이다. 겨드랑이까지만 보여주는 감질나는 모티프는 어디서 나왔을까? 이런 맛뵈기 패션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처음 선보인 것이다. 일찍이 파르테논 신전 박공부에서 어깨를 슬쩍 걷어내린 뒤, 뭇 사내의 한숨을 자아내게 하며 그리스 전역에서 유행했다. 그러니까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승리의 여신이 사랑의 여신을 흉내내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읽어도 좋다.

    실제로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아프로디테하고 너무 닮았다. 바닷바람에 소리치며 달아나는 옷자락, 가슴 아래 바짝 졸라맨 허리띠와 잔뜩 부풀어오른 젖가슴, 흔들리는 뱃머리 위에서 멋대로 출렁이는 여체와 주춤대는 날갯짓이 흩어내는 곡선들은 머리가 핑글 돌 만큼 관능적이다. 더구나 맨살에 착 달라붙은 홑겹의 키톤은 상체의 능선을 압박하고, 두껍게 소용돌이치는 겉옷은 가파르게 소용돌이치면서 하체의 휘어질 듯한 탄력을 부추긴다.

    그렇다면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누가 언제 세운 것일까? 어떤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파로스 대리석으로 깎았다. 최상급 대리석이다. 그런데 받침부의 뱃머리는 로도스의 대리석으로 밝혀졌다. 조각과 받침부에 서로 다른 재질을 쓴 것이다. 그런데 로도스는 소아시아 서쪽 해안의 남단에 위치한 섬이다. 그리고 사모트라케는 거의 북단 대척점에 자리하고 있다. 그 까마득한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무거운 석재를 배에 실어 가져왔다는 사실이 고고학자들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로도스 주민들이 사모트라케에 니케 신상을 선물했다고 보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헬레니즘 시대의 사모트라케는 작은 섬나라였다. 그러나 대국 트라키아의 코앞에 자리잡은 탓에 역사의 고비마다 전란에 시달렸다. 고전기 후기인 기원전 340~339년부터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 치하에 들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후계 시대에는 리시마코스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 뒤에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왕조에 번갈아가며 종속되었다. 마침내 기원전 196년, 안티오코스 3세가 트라키아를 접수하면서 사모트라케도 명운이 위태로워졌다. 안티오코스는 지중해 해상권을 틀어쥐려는 야심을 품고 팽창정책의 전초기지로 사모트라케를 점찍었다.

    당시 지중해 반대쪽에서는 로마가 바다의 왕자로 군림하며 동진하는 중이었다. 셀레우코스 왕조로서는 로마와 일전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로도스가 나섰다. 기왕에 로마와 손잡고 동맹국 지위에 올랐던 로도스는 전함에 관한 한 지중해 최고의 건조 기술을 보유한 조선 강국이었다. 해전에서도 단연 발군이었다. 로도스는 로마의 비호를 업고 사모트라케 선점을 위한 대리전쟁을 치른다. 기원전 190년 시데 해전에서 안티오코스 3세와 정면으로 맞붙었던 것이다. 여기서 참패한 안티오코스 3세는 야심을 접고 아파메이아 평화조약에 조인한다.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는 로마에 공물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하면서 급격히 시들고 만다.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시데 해전을 기념하려고 로도스 시민들이 멀리 사모트라케에 세운 전승 기념물이었다. 정치 선전의 의도가 다분했던 셈이다. 시기는 시데 해전 직후였을 테니 기원전 2세기 초로 잡으면 된다.

    니케의 전시 장소는 조개껍데기처럼 생긴 노천극장 위쪽으로 정했다. 오랫동안 카비리 숭배가 있었던 성역에 자리를 만들었다. 비탈을 따라 인공 석축을 쌓고 계곡 물을 모아 분수대를 조성했다. 그리고 분수대 복판에 전함 뱃머리를 조각 받침부로 세우고 그 위에 날개를 펄럭이는 니케 신상을 올렸다. 분수대 석축에 부딪치는 물살은 해안을 두드리는 파도소리를 연상케 하지 않았을까?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