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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퀼스

‘광기의 작가’ 사드, 스크린 환생

  •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

‘광기의 작가’ 사드, 스크린 환생

‘광기의 작가’ 사드, 스크린 환생
사드에 대한 오래된 기억 하나. 내가 다닌 여학교에는 아주 큰 도서관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모두 독파할 작정으로 어느 휴일에 이곳을 찾아 서가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 ‘위대한’ 작품들이란 게 다들 지루하고 고리타분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모든 역사가 찬양하고 국어선생님도 늘 ‘필독’이라고 강조한 셰익스피어니까 반쯤은 의무감으로 졸린 눈을 비벼가며 ‘맥베스’를 얼마쯤 읽고나서였다. 혹시 좀 재밌는 건 없을까 하고 이 책 저 책 꺼내보던 중에 ‘소돔 120일’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소돔? ‘소돔과 고모라’의 그 소돔인가?’ 지은이 ‘사드’ 역시 수업시간에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무심코 펼쳐든 그 책이 어린 마음에 어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지는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날 나는 ‘소돔 120일’을 독파하느라 하루를 다 보냈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해서 한동안은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발설할 수 없었다. ‘사드’라는 인물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다른 저서들을 접한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이었다. 그의 이름이 ‘사디즘’의 어원이기도 하다는 걸 알았을 때 인간 ‘사드’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는 어떤 철학자들의 말처럼 ‘가장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자 ‘간과된 천재’일까. 아니면 신이 버린 ‘사악하고 음란한 악의 전도사’일까. 셰익스피어의 사생활이 궁금했던 사람들은 ‘셰익스피어 인 러브’라는 영화를 만들었고, ‘사드’는 이제 ‘퀼스’(Quills·깃털 펜이라는 뜻)라는 영화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문제적 인간을 다룬 문제적 영화. ‘퀼스’는 19세기 프랑스의 실존 인물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후작이 샤렝텐 정신병원에서 보낸 마지막 10년의 삶을 그린 영화다. 프랑스 최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황제의 아들과 함께 자라는 등 최고의 명예와 부를 지녔던 그는 왕정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근대 국가가 태동되던 프랑스 대혁명의 격동기를 살면서, 왕정을 반대하고 인간의 절대 자유를 추구하는 반체제적 인물이 되었다. 그의 욕구는 인간의 욕정과 성적 집착에 대한 글로써 나타났다. 당시로서는 위험천만한 ‘광기의 작가’로 악명을 떨치게 된 그는 덕분에 근 30년의 세월을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광기의 작가’ 사드, 스크린 환생
일반에는 가학적인 변태성욕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사드는 ‘작가’였다. 영화에는 신체의 자유로움을 감금당한 채, 오직 글로써 세상과 교우하고 절대권력에 대항한 사드의 작가적 정체성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점차 욕구의 유일한 표현수단을 빼앗기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더욱 광적인 행로를 걷게 된다.

‘샤인’의 연기파 배우 제프리 러시가 열연한 ‘사드’는 매우 복합적이고 모순된 성격을 가진 인물. 총명하고 교만한가 하면 때로는 사랑스럽고 감성적이다. 또 악마적 충동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적에게도 관대한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로 그려져 보는 이를 당황스럽게 한다.



사드는 낭만적인 꿈을 꾸는 세탁부 마들렌을 통해 자신이 쓴 음란소설을 밖으로 몰래 빼내 출판하면서 나폴레옹 정부의 요주의 대상이 된다. 결국 모든 집필도구를 압수당한 사드는 침대 시트와 자신의 몸, 그리고 병원의 벽에 포도주로, 피로, 배설물로 온갖 외설적인 말들을 써 갈기며 저항한다. 드디어는 동료 정신병자들의 도움을 받아 최후의 소설을 입에서 입으로 마들렌에게 전달하고 그녀는 이를 종이에 옮겨 적는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을 전달하다 그 충격적인 내용으로 인해 자극을 받은 한 정신병자가 병원에 불을 지르고, 아비규환 속에서 마들렌은 성도착 환자에게 살해되고 만다. 병원의 사제 쿨 미어는 사랑하던 마들렌의 죽음 앞에서 사제의 본분을 잊고 증오심에 불타 사드의 혀를 빼는 참형을 가한다. 죽어가는 사드 앞에서 마지막 회개를 종용하는 쿨 미어. 그러나 사드는 십자가를 씹어 삼키며 끝까지 신에게 저항하고 눈을 감는다.

제프리 러시뿐 아니라 쿨 미어 역의 조아킨 피닉스, 마들렌 역의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가 모두 뛰어나 잠시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조아킨 피닉스는 고귀한 영혼을 지닌 사제가 억압된 자아 속에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타이타닉’의 케이트 윈슬렛은 순수하면서도 도발적인 아름다움으로 성인배우로서의 신고식을 탈없이 치렀다. 감독은 ‘프라하의 봄’ ‘헨리밀러의 북회귀선’ 등을 통해 금기의 선을 넘나드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냈던 필립 카우프만. 끔찍하지만 너무나 매혹적인 이 작품에 대해 누군가는 ‘셰익스피어 인 러브’와 ‘양들의 침묵’의 만남이라고 평했다.



주간동아 2001.03.22 276호 (p80~80)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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