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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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전 사진 때문에… 피셔 장관은 괴로워

‘시위중 경관 구타’ 장면 공개로 정치공세 시달려… 살인사건까지 연루 의혹 ‘설상가상’

  • 입력2005-03-14 14: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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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년 전 사진 때문에… 피셔 장관은 괴로워
    헌칠한 키와 독특하고 인상적인 눈매, 강한 호소력을 담은 뛰어난 연설로 좌중을 사로잡는 정치가, 동안(童顔)의 얼굴 뒤에 숨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유럽외교의 중심이 되고 있는 인물. 또한 고교 중퇴, 택시 운전사, 독일 헤센주 환경장관, 그리고 외무장관이라는 남다른 경력의 주인공. 30kg의 체중을 감량함으로써 자신과의 싸움에 성공하고 새로운 삶을 얻은 인물, 순식간에 베스트 셀러가 된 ‘나는 달린다’의 저자, 숱한 결혼과 이혼으로 화제를 뿌리고 또다시 파격적인 결혼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은 오십 문턱의 청춘. 그가 바로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 요시카 피셔 외무장관이다.

    이처럼 독일 국민의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 돼온 피셔 장관이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고 있다. 26년 전 그의 행적 때문이다.

    “헬멧을 쓰고 장갑을 낀 4명의 시위자들이 한 경찰관을 에워싼다. 그들은 그 경찰관을 때려눕히고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를 짓밟는다.”

    이것은 독일 적군파 테러리스트였던 울리케 마인호프의 딸이며 현재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베티나 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누구든지 곧바로 만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녀가 제공한 이 다섯 장의 사진은 1973년 4월 프랑크푸르트에서 벌어진 건물점거 시위 과정에서의 구타사건을 담고 있다. 문제가 된 것은 경찰을 구타하고 있는 젊은 시위자들 중 한 사람이 바로 현재의 독일 외무장관 요시카 피셔라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피셔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60년대와 70년대의 좌파 학생운동 당시 자신이 ‘전투적’ 행동가였음을 공공연히 고백했다. 그는 70년대 초 거리의 투사 시절 프랑크푸르트 운수조합의 승차요금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경찰관을 구타하고 건물을 점거했으며, 그를 포함한 시위대가 방어용으로 돌을 투척하는 등 ‘격렬하게 덤벼들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를 ‘혁명적 폭력’으로 몰아갔던 것은 베트남 전쟁, 비상사태법, 루디 두취케의 암살사건, 서독 민주주의의 국가사회주의와의 연계성 의혹과 같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이었다. 피셔는 과거의 폭행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현재는 그가 폭력과 결별한 상태임을 명백히 밝혔으며 당시 피해자인 경찰관에게 용서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26년 전 사진 때문에… 피셔 장관은 괴로워
    외무장관 피셔의 이러한 ‘전투적’ 과거가 알려진 뒤 오래지 않아 80년대에 벌어진 한 살인사건과의 관련설이 또다시 터져나왔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미궁으로 남아 있는 자민당 헤센주 경제장관 하인츠 헤르베르트 카리의 암살사건인데, 카리는 1981년 정체를 알 수 없는 혁명당원들에 의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자신의 침실에서 저격됐다. 그때 사용된 무기가 피셔의 자동차로 운반됐다는 옛 동료의 발언으로 피셔는 이 암살 사건의 연루자가 아니냐는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클라인이 피셔의 자동차를 빌려 무기를 운송한 것은 사실이나 피셔 자신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이미 결론이 난 사건이다. 그럼에도 피셔의 전투적 과거가 독일 국내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살인사건 연루설까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야당은 지금까지도 그러한 의혹을 버리지 않고 있다.

    과거의 폭력행위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 피셔는 1월16일 그의 옛 동료이며 후에 적군파(RAF) 테러리스트로 활동했던 한스 요아힘 클라인의 소송에 증인으로 나섰다. 1975년 빈에서 열린 OPEC 회의 습격사건에서 세사람을 저격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클라인은 23년 동안 가명으로 프랑스 어딘가에 잠적해 살다가 1998년 체포당해 독일로 인도됐다. 프랑스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저명한 정계인사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점에서도 피셔는 의혹을 받고 있다. 물론 피셔는 클라인을 후원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현재 독일 정계나 여론은 피셔의 폭력적 과거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쪽에서는 과거의 피셔와 현재의 피셔를 엄밀히 구분해 현재의 정치적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피셔의 과거 행적을 문제삼으며 그의 외무장관직 사퇴까지 요구하고 있다. 그의 사퇴를 종용하고 있는 기민-기사 연합에서는 피셔의 전투적 과거가 형법상으로는 시효가 지났다 할지라도 독일이 과거의 폭행자를 외무장관으로 두고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 피셔의 젊은 시절 행해진 좌익폭력은 극우폭력과 투쟁해야 하는 오늘날의 현실에 장애가 되며, 그의 행적은 폭력적인 극우파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피셔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26년 전 사진 때문에… 피셔 장관은 괴로워
    반면 사민당과 녹색당측은 이미 25년 이상 민주주의를 신봉해 온 피셔의 과거를 문제삼는 것은 부당하다는 견해다. 그들이 중시하는 것은 피셔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항상 반성적 입장이었고 지금은 과거와 결별했으며 자신의 개인사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왔다는 사실이다. 피셔의 오랜 동료 다니엘 콘-벤디트 녹색당 의원은 “우리는 피셔가 30년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가 아니라 현재 외무장관으로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고 그를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인의 과거와 현재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하는가. 정치가에게 ‘도덕적 동정녀’임을 요구할 수 있는가. 그런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70년대에 테러와 인종주의에 환멸을 느낀 요시카 피셔는 자신의 지난날 폭력과의 대결은 ‘막중한 실수며 커다란 오류’임을 인식했다. 그는 좌익 계열의 동지들이 테러리즘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투쟁했고 그 후 현재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일해왔다. 보수적 언론들도 과거의 저항운동가가 독일 민주주의의 전사로 변신한 사실은 바람직한 일이라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심지어 피해 당사자인 경찰관조차도 외무장관의 과거를 용서하고 그의 정치적 업적을 인정했다. 피셔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는 26년 전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또한 나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것이 나의 인생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나의 퇴진을 요구할 것이다”고 피셔는 말한다.

    달리는 것으로 일상을 바꾸고 자신의 삶 자체를 재정립한 사람, 변화에 대한 갈망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개혁을 이루어 가는 사람 요시카 피셔에게 어두운 과거는 오히려 오늘을 빛나게 만드는 귀중한 체험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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