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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읽기는 ‘원초적 본능’

최근 그리스 신화 열풍은 실존 위기감 반영…이야기 수준의 ‘신화 편식’서 벗어나야

신화 읽기는 ‘원초적 본능’

신화 읽기는 ‘원초적 본능’
박물관이라는 영어단어 ‘뮤지엄’은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 뮤지엄은 뮤즈, 즉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의 아홉 여신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이니 방대한 예술의 창고이자 인류의 기억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박물관이 이들 자매의 집이라는 어원은 상당히 시적(詩的)이다.

그리스 신화를 읽어본 독자는 이 외에도 상표 ‘나이키’가 승리의 여신 니케의 영어식 발음이며 프랑스 파리의 거리 ‘샹젤리제’가 그리스 신화의 극락인 엘뤼시온에서 유래했음을 알 것이다. 신화의 세계에 좀더 침잠한 독자라면 신화 속에서 단순한 지명이나 말뜻뿐만 아니라 서양 문명을 지배하는 합리적 개인주의와 현실주의까지도 읽어낼 것이다.

그리스 신화가 서점가에서 꾸준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 ‘천의 얼굴을 한 영웅’ 등은 소리소문 없이 스테디셀러로 군림해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눈에 띄는 변화라면 이러한 신화 서적의 저자가 한국 작가들로 대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윤기씨의 ‘그리스 로마 신화’ ‘뮈토스 1, 2, 3’을 비롯해서 이주헌씨의 ‘신화 그림으로 읽기’, 강응천씨의 ‘문명 속으로 뛰어든 그리스 신들 1, 2’ 등이 그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몇 천년 전의 이야기, 그것도 서양의 이야기인 그리스 신화에 열광하는가. 이윤기씨는 많은 서양신화 중 유독 그리스 신화가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를 ‘인간을 닮은 신화’라는 데에서 찾는다.

“삼신할매가 결혼했다든가 웅녀가 환웅과 결혼해서 어떻게 살았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우리 신화에는 없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는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뿐만 아니라 인간들처럼 체계적인 족보까지도 갖추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은 인간 못지않게 질투하고 갈등하며 애욕에 몸부림친다. 신이라는 이름을 빌리고 있지만 그들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존재들이다. 이처럼 인간적인 신들의 면모가 한국 독자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는 해석이다. 반면 단군신화, 주몽신화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신화는 서양의 거대한 신화체계와 비교했을 때, 다양한 삶의 체계를 담아내기에는 너무 적고 산발적이라는 점에서 독자들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데 역부족이다.

또 해외여행과 외국문화의 유입으로 자주 경험하게 되는 서구문화의 기원이 곧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자각도 서양 신화 읽기 붐에 자극이 됐음에 틀림없다.

이윤기씨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다는 김영숙씨는 “여러 종류의 책, 특히 외국 작가의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저변에 그리스 신화가 연계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스 신화를 알지 못하고서는 책의 내용은 이해하지 못한 채 글자만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인터넷 서점 알라딘 독자서평)고 말한다. 그리스 신화는 서양을 제대로 알기 위해 결국은 한번 넘어가야 할 산인 것이다.

그러나 문학평론가 도정일 교수(경희대 영문학)는 현대인의 신화 읽기 붐의 근저에 실존의 위기감이 깔려 있다고 설명한다.

“철학자 리비에르는 실존적 위기의 시대에 사람들은 신화로 돌아간다고 했다. 잘 먹고 잘 살 때가 아니라 전쟁과 같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할 때, 혹은 자기 소멸의 위기에서 사람들은 잊었던 질문을 다시 떠올린다는 것이다. 나는 뭔가, 어디서 왔는가, 자기 존재의 기원과 목적에 대한 질문을 하다 보면 자기가 속한 문화의 핵심인 신화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근 불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열풍은 무엇보다도 그리스 신화를 우리 식으로 다시 쓴 탁월한 이야기꾼들의 등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우리 이야기꾼들이 해석한 그리스 신화는 더 이상 낯설고 어색한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가 고대 로마를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했듯이 우리 정서로 쓰인 그리스 신화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윤기씨의 ‘그리스 로마 신화’다. 이윤기씨는 그리스 신화에서 신발, 뱀, 기억, 노래 등 인류의 보편적인 상징들을 끌어냈다. 그는 동서양의 신화들을 솜씨 있게 엮어내 결국 인간은 하나의 갈래에서 나온 존재임을 보여준다.

또 한 사람의 입담 좋은 이야기꾼 이주헌씨는 ‘신화 그림으로 읽기’에서 서양 고전의 이미지들을 신화를 통해 설명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유럽의 여러 미술관에 넘쳐나는 수수께끼의 그림들, 벌거벗은 채 포즈를 취하거나 여자를 잡아가는 반인반마 등이 그리스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어온 것들임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그리스 신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웅들의 투쟁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으로 꼽힌다. 열두 가지의 난관을 넘는 헤라클레스, 온갖 풍상을 겪으며 귀향길을 재촉하는 오디세우스 등 그리스 신화 속의 영웅들은 갖가지 고난을 헤쳐나가면서 삶에 대한 투쟁을 계속한다. 영웅들에게 투쟁은 곧 삶이며 스스로의 자존을 지키는 길이다. 이 부분에서 신화는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고단한 삶의 고개를 넘는 현대인들의 이야기가 된다.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대가로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뜯어먹히는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는 ‘고난에 굴하지 않는 영웅’의 대표주자로 손색이 없다. 제우스의 처벌은 누가 보기에도 잔인하고 부당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형벌을 꿋꿋하게 견딘다. 종국에는 또 다른 영웅 헤라클레스가 나타나 프로메테우스를 끝없는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다. 여기서 신화가 상징하는 것은 운명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인 인간의 비극과 그럼에도 비극을 견뎌나가는 의지다. 그리고 현실에서 인간은 자주 가혹한 운명에 맞닥뜨린 프로메테우스가 된다. 그리스 신화는 지금껏 우리에게 중요시됐던 겸손과 절제의 미덕을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그리스 신화는 당신에게 말해줄 것이다. 운명에 맞서 싸우는 자만이 운명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가 그리스 신화에서 새롭게 발견하고자 하는, 그리고 읽고 싶어하는 새로운 삶의 키워드라 하겠다.

신화는 최근 불어닥친 팬터지 문학 열풍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실 그리스 신화의 많은 부분들이 팬터지 문학을 연상시킨다. 바람둥이 제우스는 금빛 빗줄기로 변해 탑에 갇힌 미녀 다나에에게 접근하며, 아폴론은 다프네를 뒤쫓지만 손이 닿는 순간 다프네는 월계수 나무로 변신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 1권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해리 포터는 우연히 뱀의 이야기를 알아듣고 자신이 마법사임을 깨닫는데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예언자 멜람포스가 뱀이 귀를 핥는 순간 동물들의 말을 알아듣는 예언의 능력을 갖게 됐다는 부분을 연상시키며 팬터지 문학에 무한한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화 읽기 현상에 대해 우려의 시선도 적지 않다. 우선 신화학의 전통과 신화학자가 없는 한국에서 신화 읽기가 자칫 문학적인 영역으로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셉 캠벨은 신화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이야기 그 자체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펼쳐 캠벨식 신화 읽기를 퍼뜨렸다. 국내에서 출판된 책들은 대부분 캠벨식으로, 신화에 대한 ‘문학적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편식이다. 그러나 신화는 문학의 대상이기 이전에 종교학, 민속학, 인류학적 관점에서 깊이 연구돼야 할 학문이다. 미르체아 엘리아데, 조르주 뒤메질, 레비스트로스 등이 신화에 대한 훌륭한 저술들을 남겼으나 국내에서 이런 책은 완전히 외면당했다. 이제 이야기 수준의 신화에서 벗어날 때가 아닌가.”(도정일)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현대는 신화를 배척하거나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신화전통과 신화적 사고구조는 현대 사회 깊숙이 각인돼 있다”고 했다. 그래서 현대인은 끊임없이 인간 삶에서 신화적 의미를 찾아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신화 읽기가 ‘원초적 본능’이라면 이제 신화의 깊은 맛을 보기 위한 폭넓은 독서가 병행돼야 할 것이다.



주간동아 2000.11.30 261호 (p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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