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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네티즌인가 재판관인가

‘법복 없는 판관’이 그대를 단죄한다

N세대, ‘사이버 법정’서 집단적 의사 표현…말의 폭력 어른들 ‘권력 게임’ 닮아가기도

‘법복 없는 판관’이 그대를 단죄한다

‘법복 없는 판관’이 그대를 단죄한다
한 여중생이 동료들로부터 학교 주변에서 집단 구타를 당한 뒤 보름만에 숨졌다. 사건이 발생하자 네티즌들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학교폭력의 직접적 희생자라며 강력한 온라인 시위를 전개했다. 교육청 등 유관기관들은 느리게 움직였다. 사인을 둘러싼 의혹이 증폭됐고 가해자측과 관련한 루머가 나돌았다. 가해자측의 부모 중에는 청와대 고위인사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었다. 네티즌들은 흥분했고 감정적 공방이 오갔다. 그러나 이 학생의 직접적 사인과 관련해 밝혀진 사실은 아직까지 아무 것도 없다. 성동경찰서 수사 관계자는 “12월 중순경 부검 결과가 나와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0월15일 동료들에게 집단 폭행당한 뒤 30일 숨진 O중학교 서지혜양 사건의 전말은 대략 이렇다. 서양 시신에 대한 부검은 11월2일 이뤄졌으나 부검 결과 발표는 통상적 부검 절차보다 보름 가까이 늦어지고 있다.

지난 7월 인터넷 상에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성수여중 학생 집단 폭행 사건 역시 N세대 네티즌들의 공방으로 시작해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경우였다. 서양 사건은 성수여중 사건과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가장 큰 공통점은 인터넷을 통해 이 사건이 처음 알려지고 결국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오기까지 했다는 것.

법정 공방 이상 치열한 인터넷 입씨름

이 밖에도 최근 들어 인천 모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성폭행 및 낙태 사건(주간동아 259호 42쪽 참조), 이보다 앞서 충남 모고등학교에서 벌어졌던 학교내 ‘왕따’ 사건 등은 인터넷 상에서 법정 공방 이상의 치열한 싸움 양상을 보여줬다. 일련의 사건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은 네티즌들이 가해자와 피해자 집단으로 나뉘어 격렬한 공방을 벌이면서 상대방 홈페이지를 자신들의 의견으로 도배질하거나 심지어는 해킹까지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최근 서양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네티즌들의 공방은 과거 일련의 사건들과 비교하면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 홈페이지 운영자들이 나서서 욕설이나 근거 없는 비방을 올리는 회원들을 경고하고 나서는가 하면 부검 결과 등에 대해서도 최종 결론을 유보해놓고 있다. 특징이 있다면 서양의 사인을 둘러싸고 의학적 논쟁까지 가세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양은 동료들로부터 집단 폭행당한 뒤 사망하기 전까지 ‘전격성 간염’으로 병원 진료를 받았었다. 이를 두고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질환의 원인과 이로 인한 사망 여부 등을 둘러싸고 전문가에 가까운 의견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일부 네티즌들은 간염의 종류와 발병 원인에 관한 광범위한 조사를 통해 나름의 추론을 올려놓기도 했다. 간염에 의한 사망이라고 하더라도 간의 해독작용 능력 저하로 인한 뇌손상일 가능성이 높은데 뇌 손상에 대한 언급이 없어 의혹이 제기된다든가, 오한이나 경련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뇌에 손상을 입었다는 증거가 아니냐는 식이다.

이 밖에도 서양을 잘 아는 동료라고 밝힌 한 네티즌이 ‘서양이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이미 간이 부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면 다른 학생은 ‘담배를 피우면 폐가 부어야지 어떻게 간이 붓느냐’는 논쟁이 이어지기도 했다. 한마디로 인터넷이라는 공간 안에서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조그마한 ‘사이버 법정’이 열리고 있는 셈이다.

네티즌들은 이 법정 안에서 검사측과 변호사측으로 나뉘어 치열한 공방을 벌이기도 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거를 수집해 제시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대규모 시위도 감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이버 공방이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공론의 장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인터넷이 갖고 있는 개방성 때문이다. 누구나 들어와서 검증되지 않은 말을 쏟아놓더라도 이를 규제할 실질적 수단이 없다는 것.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 한가지. 인터넷 상의 토론과 공방은 익명의 전제 아래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N세대들이 자신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현상을 두고 치열한 온라인 공방을 주고받는 것은 사회적 파장을 동반한 폭력 사건뿐만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스타급 연예인들을 둘러싼 비방과 저주 논란이다. 인터넷에는 이미 가수, 탤런트, 개그맨을 가리지 않고 100여명의 스타급 연예인들에 대한 안티사이트가 만들어져 이들 연예인을 상대로 무차별 공격이 진행되고 있다. 이들 연예인에 대한 안티사이트에는 ‘의견’이라고 할 수 없는 욕설과 막말, 저주 등이 어지럽게 도배질되어 있다. 연예인들을 피고로 올린 법정에는 검사와 변호사보다는 싸움꾼과 관객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서울시립 청소년직업체험센터 전효관 박사는 “팬클럽을 통해 상호 비방에만 열중하는 학생들의 경우 어른들이 벌여놓은 권력게임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싫어하는 연예인에 대한 비난도 가창력이나 연기력과는 전혀 관계없이 ‘성형수술을 했다’거나 ‘누드사진을 찍었다’ 또는 ‘술집에 나갔다’는 등의 확인되지 않은 비방이 대부분. 심지어는 조작에 가까운 사진을 실어놓고 노골적으로 비방하는 경우도 있다. ‘증거 불충분’의 대표적 유형이다. 이러다 보니 방청객들 사이에서는 사이버 법정에서 벌어지는 공방 자체에 대한 불신도 나타나고 있다. 고교생 박지윤양(18·광남고)은 “최근 인터넷 상에서 벌어진 여고생 낙태사건도 가해자측 주장과 피해자측 주장이 너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설명되어 있어 믿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N세대 청소년들은 왜 사이버 법정을 열어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필요이상으로 몰두하는가. 그것도 유독 폭력이나 성폭행 등이 왜 이들 법정의 주요 피고로 떠오르는가. 한국청소년개발원 황진구 책임연구원은 “청소년들이 그동안 학교와 집 이외에는 선택 가능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규제받던’ 청소년들이 ‘무한자유’의 공간을 만나다 보니 그동안 사회적 논의가 취약했던 성이나 학교폭력 같은 분야에서부터 집단적 의견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N세대들이 유독 폭력, 성폭행 등을 둘러싼 공방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

물론 인터넷이 갖고 있는 완벽한 익명성과 공간적 무한성이 이러한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사회학자인 민경배 사이버문화연구실장의 분석.

“PC통신에서 이뤄지던 논쟁에서는 최소한 자신의 ID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완전한 익명성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완전한 익명성을 바탕으로 한다. 또 지정된 토론방에서만 논의가 이뤄지던 PC통신과는 달리 인터넷에서는 아무데서나 토론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논의가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온라인 상의 오피니언 리더들도 덩달아 분산될 수밖에 없고 생산적 논의가 이뤄지기 어렵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심리학)는 인터넷 상에서 청소년들이 벌이는 공방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성 언론들이 보도하는 사건은 사실이라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지만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청소년들 자신이 만들어내는 ‘또하나의 상상’인 경우가 많다. 여기에 신문과 방송이 가져야 하는 신뢰성과 공정성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과 반대의 해석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인터넷의 영향력과 파괴력에 대해 우려하는 기성 세대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청소년들의 의식을 보여주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지난 6월 수도권지역의 중고등학생과 학부모 등 1331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 이용 실태 설문조사에서는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됐다. 이 설문조사에서 학부모 응답자의 약 59%가 자녀들이 채팅을 통해 ‘신나고 재미있어 할 것’이라고 예측한 데 반해 정작 실제 청소년 응답자들 중 채팅을 ‘재미있다’고 생각한 응답자는 중학생 39%, 고교생 약 23%에 불과했다. 오히려 ‘지루하고 짜증난다’ 혹은 ‘아무 느낌이 없다고 대답한 응답자가 이보다 훨씬 많아 중학생 54%, 고교생 71%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른들의 예상과는 달리 청소년들은 채팅을 통해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인터넷은 청소년들에게 재미나 유익함이라는 ‘효과’와는 무관한 막연한 ‘일상’ 또는 ‘문화’라는 해석을 낳게 한다. 어찌 보면 N세대들에게 인터넷은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일 수도 있다.

‘학교 차원서 올바른 인터넷 미디어 교육’ 필요

그런 의미에서 사이버문화연구실 최은정 선임연구원은 “청소년들에게 인터넷 상의 언어는 ‘글’이라기보다는 ‘말’에 가깝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말하자면 논리적 완결성을 갖춘 의견이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누가 이랬대”하면 “그래?”하면서 당장 이를 다른 사이트에 퍼나르는 것이 N세대들의 인터넷 이용 방식이라는 것이다. 서울고 옥성일 교사도 “일부 학교 홈페이지의 경우 학생들의 무책임한 주장이 난무해 폐쇄되는 경우도 있다”며 “학교 차원에서 올바른 인터넷 미디어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론 사이버 공간을 통한 이들 N세대의 주장 가운데 헌법재판소가 군 가산점 제도에 대해 위헌판정을 내렸을 때 벌어졌던 군가산점 위헌 반대운동이나 현재까지 벌어지고 있는 두발제한 철폐운동 같은 것들도 있다. 국회 차원에서나 논의될 만한 정책적 이슈들과 관련해 정책 소외집단이었던 N세대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의사 표현의 주체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N세대들은 사이버 법정에서 무질서한 ‘난투극’을 벌이기도 하지만 질서정연한 ‘매스 게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폭로와 수사, 증거와 반증, 구형과 단죄를 인터넷이라는 이유만으로 깡그리 무시할 것인가. 아니면 이 법정에 의사봉을 들고 일일이 쳐들어가 사실을 밝혀내고 잡아내고 처벌할 것인가. 이를 판단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인터넷 문화가 너무 일천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N세대들이 열어놓은 사이버 법정이 분명 두려움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PC방 키보드 앞에 앉은 N세대들은 어른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다.

“사이버 법정을 두려워하세요! 안 그러면 큰코 다치니까요!!”







주간동아 2000.11.30 261호 (p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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