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9

2000.11.16

용인은 지금 ‘송전탑과의 전쟁중’

학일리 주민 건설 반대 투쟁…“국정원·천주교 압력에 밀려 우리 마을로 노선 변경”

  • 입력2005-05-27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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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은 지금 ‘송전탑과의 전쟁중’
    “무책임한 한국전력의 고압 송전탑 건설 결사 반대!” “원칙 없는 졸속행정, 한전을 규탄한다!”

    11월2일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학일리. 전형적인 농촌지역인 이 마을 곳곳엔 늦가을 오후의 고즈넉함을 깨뜨리는 수상쩍은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었다.

    80여가구 230여명 주민들의 요구사항은 간단하다. 마을 뒤편 쌍령산을 통과하도록 예정된 높이 80m의 고압 송전탑(34만5000볼트) 건설계획을 철회하라는 것. 특히 마을 내에 있는 장경사(주지 정휴) 대웅전에서 불과 300m 인접 산비탈까지 송전탑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사찰 수행환경 저해와 환경파괴를 우려한 장경사 스님과 신도, 쌍령산 지주인 해주 오씨 종중까지 이런 주민들의 의견에 힘을 보태고 있다.

    ‘송전탑 마찰’은 사실 송전선로가 여러 지역을 거치게 돼 수많은 토지 소유주와 해당 주민들의 반대를 피하기 어렵다는 특성상 요즘 수도권 일대에서 곧잘 찾아볼 수 있는 민원이다. 그러나 학일리는 조금 다른 일면이 있다.

    “주민 무시한 무원칙 행정” 비난



    “어차피 어딘가 세워져야 할 송전탑인데 무작정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갑자기 노선을 변경하면서 한번도 설명회 등을 통해 해당 주민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것은 원칙 없는 행정의 표본이다. 묵묵히 농사만 짓는 주민을 무시하는 독단적 처사가 아닌가.” 학일1리 공인식 이장(42)의 말이다. 이곳 주민들은 한결같이 “애당초 계획된 송전선로가 ‘힘의 논리’에 밀려 두 차례나 일방적으로 설계가 변경돼 엉뚱하게 학일리 주민들이 피해를 보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학일리 주민들의 이같은 ‘상대적 박탈감’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사연은 이렇다. 문제의 구간은 신안성변전소(안성)와 신용인변전소(용인)를 잇는 송전선로 24km 중 일부. 급증하는 수도권 전력수요 충당을 위해 충남 일대 발전소로부터 전력을 끌어오는 공사로 지난 96년 산업자원부(당시 통상산업부)의 승인을 얻어 이듬해 착공됐다. 현재 19km는 완공됐지만 학일리를 거치는 나머지 5km 구간은 잇따른 민원으로 노선변경을 거듭, 착공조차 못한 상태다.

    공사 주체인 한전 전력계통건설처 중부건설소가 처음 ‘최적 노선’으로 설정한 구간은 용인시 이동면∼원삼면 학일리∼안성시 쌍령산 구간 (‘노선도’ 참조). 그러나 한전은 용인-안성시 경계인 이 구간에 송전선로를 건설할 경우 구간에 인접한 기상연구소(국가정보원 시설물)에 전파방해를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올해초 갑작스레 인근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로 노선을 변경했다.

    변경노선도 곧 ‘퇴출’됐다. 옮긴 노선이 국내 천주교의 대표적 성지로 꼽히는 미리내 성지(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있다)에서 불과 500m 가량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안 천주교측과 미산리 주민들이 “성지 훼손 우려가 있다”며 언론 등을 통해 강력히 반발했던 것.

    결국 여론에 밀린 한전은 지난 7월 또다시 노선을 변경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새 노선은 장경사 뒤를 지나게 됐다. 장경사는 규모는 작지만 고려말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인 직지심경을 만든 경한선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절. 5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정진하고 있다.

    자연히 학일리 주민들과 불교계의 반대에 부딪혀 현재 송전선로 건설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 “국정원과 천주교의 ‘파워’에 밀려 두 차례나 노선을 변경한 결과 ‘최적 노선’보다 마을 쪽으로 3km 정도나 더 근접하게 됐다”는 게 학일리 주민들의 지적이다.

    주민들은 첫번째 노선변경과정에서 국정원의 ‘압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전측은 “국가안보활동에 지장을 줄 수 없어 우리가 ‘알아서’ 변경했다”고 답했다. 국정원이 지난 9월 초 학일리 주민 오일근씨(56)에게 보낸 민원 회신에서도 “국정원은 송전탑 건설이 업무에 지장을 준다는 전문가 의견을 한전에 전달한 적은 있으나 송전선로가 (특정지역으로) 지나가도록 ‘요구’한 일은 없다”고 적고 있다.

    미산리 노선 철회와 관련해서도 학일리 주민들은 “한전이 특정 종교단체와의 마찰을 우려해 변경했다”며 “미산리 노선 백지화가 안성이 지역구인 민주당 심규섭 의원의 선거공약이었던 만큼 어떤 식으로든 ‘힘’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로선 주민들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명백한 증거는 없다. 문제는 노선변경과정에서 한전측이 이같이 ‘불필요한 오해’를 살 정도로 학일리 주민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갖지 않은 데 있다.

    이 점에 대해 한전 관계자는 “환경영향평가법을 준수한 이상 절차상 하자는 없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사태가 순조롭게 해결될 것 같진 않다. 지난 8월 철탑설치반대위원회를 조직한 학일리 주민들과 장경사측은 지난 10월30일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인 데 이어 변경노선 백지화를 주장하며 불교계와 연대해 노선 철회운동을 벌이고 있다.

    더욱이 지난 10월 중순 한전이 조계종 총무원장에게 보낸 ‘송전선로 변경요청에 관한 회신문’에서 한전측이 ‘님비현상’ 운운한 대목에 발끈한 대한불교 조계종까지 종단 차원에서 강력히 노선 철회운동을 벌일 태세다. 정휴스님은 “어쨌든 사찰 및 주민생활권 피해가 최소화하는 쪽으로 구간이 재조정돼야 한다”며 “만일 변경노선에 송전탑 건설공사가 강행될 경우 한국 불교계를 무시한 처사로 간주할 것이며 특정 종교에 편파적이란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라고 못박았다.

    한전이 지난 7월 내놓은 변경승인신청을 검토중인 산자부는 곤혹스런 눈치다. 전력산업과 정기훈 사무관은 “고압 송전선로는 수도권 전력공급에 필수적인데 잇따른 노선변경으로 3년 가량 공사가 늦어져 내년 6월 예정된 이 노선의 전력공급에 차질이 막대하다”며 “이르면 금년 말이나 내년 초쯤 승인이 날 것 같다”고 밝혔다.

    학일리의 ‘투쟁’은 성공할까. 곳곳에서 불거지고 있는 송전탑 반대 민원 중 상당수가 보상금을 노려 ‘걸면 이기는 전기줄 소송’을 부추기는 브로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투명하지 않은 행정’에 제동을 건 학일리 주민들의 태도는 일면 돋보이는 구석이 있다. 송전탑의 ‘방황’을 잠재워야 하는 한전의 고민도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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