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7

2000.08.17

영어 학습서 홍수 … 어떤 책 고를까

매달 수십종 출간, 내용도 제각각…목적에 걸맞은 책 찾아 차근차근 꾸준히

  • 입력2005-09-14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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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학습서 홍수 … 어떤 책 고를까
    뉴욕주립대학의 하광호 교수는 이민 1세대지만 미국 대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유일한 한국 출신 교수로 유명하다. 그가 95년 출간한 ‘영어의 바다’ 시리즈는 한국에 ‘총체적 영어학습법’(Whole Language)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하교수의 오랜 독자들은 지금도 매주 이메일과 편지로 영어학습에 대해 문의해온다. 최근 들어 “한국에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는 책이 나왔는데 따라해도 좋은가”라는 질문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이에 놀란 하교수는 “아직 그 책을 보지 못했지만 6개월에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만들어준다면 신의 능력 아닌가”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93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일명 꼬꼬영 시리즈)로 단행본 영어학습서 시장을 개척한 한호림씨(시각디자이너·캐나다 거주)는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출간된 영어학습서의 제목이 너무 선정적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철옹성 같은 영어가 그렇게 간단히 정복되지 않는다는 것은 저자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 언어나 마찬가지지만 영어는 정말 거대한 철옹성이다. 그것을 짧은 시간에 열 수 있는 요술열쇠란 없다. 영어 쓰는 나라 학생들에게도 영어가 얼마나 어려운 과목인데 그러나?”(한호림)

    누구는 공부하지 말라 하고, 누구는 아무리 해도 정복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영어. 또 어떤 이는 발음이 중요하다고 하고, 다른 이는 듣기가 우선이라고 말하는 백인백색(百人百色) 영어학습법. 93년 ‘꼬꼬영’의 성공 이후 저마다 터득한 학습법을 쏟아놓기 시작해 요즘은 매달 10여종의 새로운 영어학습서가 출간되고 있다. 그러나 학습서가 많으면 많을수록 초보자들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다.



    “영어학습은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순으로 배워야 한다. 우리가 제대로 영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이 순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듣기란 무엇인가. 듣는 그 내용은 발음과 그 발음이 지니고 있는 음악이다. 그래서 영어는 발음부터 배워야 한다. 그런데 발음과 리듬을 공부하지 않고 말을 하려 하니까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처럼 무너질 수밖에 없다.”(헨리 홍)

    90년대 후반 영어학습시장을 강타한 게 발음 중심의 학습법이다. 미국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한국인 목사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다 새로운 교수법을 터득한 헨리 홍 목사는, 정확한 발음의 원리를 터득하고 완벽한 발음을 할 수 있어야 상대방의 말도 쉬 알아듣는다고 주장한다. 정확한 발음, 완벽한 말씨를 익힌 뒤 일상생활에 꼭 필요하고 사용 빈도수가 높은 회화표현을 외워 필요할 때 자동으로 나오게 하자는 것이 헨리 홍식 영어학습법이다.

    홍목사에 이어 정인석씨가 ‘발성훈련법’을 들고 나왔다. 그의 ‘영어 한(恨)풀이’(동아일보사)는 기본적으로 단음인 한국어와 굴절음인 영어는 발성 자체부터 다르다는 데 착안해 영어식 발성법만 익히면 단어, 문법을 외지 않아도 저절로 기억되고, 모음을 잡으면 영화 속 영어도 잘 들린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아랫배를 끌어올리고 가슴을 활짝 열어 소리내는 발성훈련법부터 실시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발성훈련 영어도 곧 99년 출간된 ‘영어공부 하지 마라’(사회평론) 열풍에 밀렸다. 일명 ‘영절하’로 알려지면서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게 된 이 책의 핵심은 ‘영어듣기 훈련’ 이다. 아무거라도 수준에 맞는 영어 테이프를 하나 골라서 무조건 그 테이프에 담긴 소리가 다 들릴 때까지 반복해서 들어보라는 것. 이렇게 귀가 뚫리면 그 다음에는 들리는 대로 받아쓰고, 큰 소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하고, 모르는 단어는 반드시 영영사전으로 찾아보라는 게 ‘영절하’식 학습법이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한반도 영어굿판’(영어21)의 저자 조지 윤은 “공부하지 말라니까 초보자들은 정말 공부하지 않고도 저절로 영어가 되는 묘법이 있는 줄 안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초보자가 따라하기 매우 어렵다. 이 밖에도 영어회화 3개월 완성, 미인회화 6개월, 합숙훈련 3개월 하는 식의 말들이 마치 금방 영어가 완성되는 것처럼 영어 초보자들을 현혹한다”고 했다. 또 생활영어 중심의 영어학습도 착각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생활영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발음이 정확하지 않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미국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고, 또 상대방이 본토발음으로 말을 걸어오면 알아들을 수 없으니 아무리 단어를 많이 알고 읽고 쓰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생활영어 패턴을 암기하고 발음연습과 연음, 발성훈련을 해도 성인수준의 논리적 대화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독해력을 바탕으로 미국인 아나운서나 배우가 말하는 그대로 꾸준히 모방훈련을 하는 것이 옳은 학습법이다.”(조지 윤)

    이처럼 말하기 듣기 독해 중 어느 하나를 강조한 영어훈련법이 아니더라도 영어학습에서 발상의 전환을 강조한 책들이 꾸준히 팔리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정철의 ‘영어공부혁명’(해냄). 그는 “영어는 배우기 그리 어려운 언어가 아니다”며 독자들을 달랜 뒤 한국형 영어 수련법을 제시했다. 이 수련법은 눈 귀 입의 집중적인 훈련을 통해 모든 ‘영어감각’을 머리에 입력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에 몇 시간씩 영어를 듣고 받아쓰고 “입이 아파서 못하겠다”고 할 정도로 큰 소리로 읽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철식 학습법은 원동연 박사의 ‘5차원 영어학습법’(김영사)과 일맥상통한다. 원박사는 12주 학습으로 영어식 사고구조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방법에는 영어 속해독서법, 글 분석법, 개념심화 학습법, 영어의 주관화 객관화 학습법 등이 있다.

    물론 새로운 학습법이 나왔다고 해서 기존 방식이 폐기처분되는 것은 아니다. 97년 베스트셀러인 배진용씨의 ‘두 번만 읽으면 끝나는 영문법’(도솔)의 성공으로도 알 수 있듯이 “문법을 알고 나면 영어를 효과적으로 습득할 수 있다”는 개념은 여전히 독자들에게 설득력이 있다. 배진용씨의 ‘두 번만’ 시리즈는 문법의 성공 이후 영어회화 영어단어 영어독해 영어글짓기로 이어지며 아예 패키지 상품으로 만들어졌다.

    단행본 영어학습서 시장에는 이제 ‘맹주’가 없다. ‘영절하’의 저자 정찬용씨처럼 저자의 직업이나 학력에 관계없이 자신이 터득한 영어학습법이 보편성을 가질 수만 있다면 누구나 ‘책’을 내고 스타 필자가 될 수 있다. 최근 명상출판사에서 펴낸 ‘영어공부 제대로 하자’의 저자 이정훈씨도 좋은 예다. 85년 고려대 삼민투 위원장을 지냈고 그해 5월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으로 3년간 복역한 이정훈씨는 영어 전문가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호주국립대학과 런던대학에 7년간 유학하면서 그는 ‘소리영어’라는 한국형 영어학습법을 터득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처음부터 AFKN을 들으려 애쓰지 말고 쉬운 듣기 테이프를 가지고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들으라는 부분은 정찬용씨의 ‘영절하’와 유사하고, 원어민 발음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성인이 되어 영어를 배우는 만큼 수준에 맞는 교재를 골라 회화연습을 하는 게 좋다는 부분은 조지윤씨의 제안과 통하는 데가 있다.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는 말처럼 영어학습법도 더 이상 획기적인 것이 나오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실제 정찬용씨의 ‘영절하’도 알고 보면 새로울 게 없는, 영어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또 출판사들이 시장규모가 큰 초보자용 학습 안내서에만 관심을 기울여 정작 학습에 필요한 교재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꼬꼬영’ 시리즈 이후 영어전문 출판사로 떠오른 디자인하우스가 최근 ‘어라? 나도 영어회화가 되네?’를 펴내면서 재미있는 카피를 내보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영어공부’는 하지 않고 ‘영어학습법’을 공부하려고 작정한 것 같습니다…. 펼쳐보면 정작 ‘영어’는 한마디도 없는 영어책들.” 이제 ‘영어를 이렇게 공부하라’는 식의 학습서나 체험기보다 실전에 도움이 되는 교재가 필요하다는 암시를 한 것이다.

    매달 약 7종의 영어책을 선보이고 있는 넥서스의 김민기 주간은 “영어책이 너무 많지 않으냐고 하는데 막상 필요해서 찾아보면 쓸 만한 게 별로 없다”면서 “이제는 독자의 욕구를 더 잘게 쪼개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출판전략이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백선엽씨의 ‘영어회화 365단어로 코쟁이 기죽이기’(넥서스)가 스프링 제본에 세련된 디자인으로 눈길을 끈 영어회화 중심의 책이라면, 역시 넥서스가 펴낸 ‘프리토킹에 강해지는 토론영어’(김학용)는 생활영어에 매달리다 정작 대학에서나 비즈니스에서 필수인 토론영어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어차피 영어학습법이라는 게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면 비법을 찾아다니는 데 급급하지 말고 자신이 왜 영어를 배우려 하는지부터 점검하고 목적에 걸맞은 책을 고르는 것이 순서다. ‘꼬꼬영’의 한호림씨는 한국의 영어학습 과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충고를 남겼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것은 공자 삼락(三樂)에 들어간다. 영어를 배우는 것도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는 즐거움 정도로 생각하기를 바란다.” 즐겁게 배우는데 과열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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