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8

2000.04.06

김정일 中대사관 방문 “뭔가 있다”

中에 차관요청 관련 뒤늦게 예의 갖추기…한-중 관계 흠집내기 의도도

  • 입력2006-04-19 1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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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 中대사관 방문 “뭔가 있다”
    일요일이었던 지난 3월5일 저녁 7시 김정일 북한노동당총비서가 군부 실력자 6명과 당 실세 5명을 대동하고 ‘이례적으로’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을 방문한 것은 지난해 6월2일 ‘국가수반’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했던 김영남 북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중국 정부에 3억달러 상당의 차관 지원을 요청했던 것과 관련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3억달러 차관 요청은 매우 중요한 의제인데, 중국측은 김영남이 이러한 제의를 해올 줄 전혀 몰랐었다고 한다. 이렇게 중요한 제의는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이 북한 당국과 사전에 조율했어야 하는데, 어떤 연유에선지 그 과정이 누락됐다는 것. 때문에 중국 지도부는 매우 당황해 답변을 주지 못했고, 그 바람에 차관 지원요청도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게 됐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뒤 중국 외교부는 완융상(萬永祥) 평양주재 중국대사에게 책임을 물어 4월 그를 브라질 대사로 내보내고, 후임으로 왕궈장(王國章)대사를 임명해 놓고 있는 상태다. 중국 처지에서 북한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 할 정도로 비중이 큰 나라. 하지만 브라질은 무게를 두는 국가가 아니다. 따라서 북한 대사를 브라질 대사로 내보내는 것은 전례없는 ‘좌천’이다. 하지만 중국은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그 즉시 책임을 묻는 ‘냄비’ 기질의 한국과 달리, 관련자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일정 기간을 기다려준다. 한 소식통은 중국이 지난해 문제를 일으킨 완대사를 지금 교체하는 것은 이러한 전통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지난해 10월 북한을 방문했던 탕자쉬안(唐家璇) 중국외교부장은 김정일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지난 2월 북한을 방문한 러시아외무장관도 마찬가지였다. 김정일은 ‘주체’를 강조하기 때문에 중-러 외무장관조차도 쉽게 만나주지 않는데, 유독 북한문제 때문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완대사에게만은 매우 미안해 했다고 한다.

    그래서 완대사의 초청 형식을 빌려 휴일 군-당의 실세를 이끌고 중국대사관을 전격 방문하는 이벤트를 만들었다는 것. 이같은 행동을 통해 김정일은 장차 중국 외교부에서 실력자가 될지도 모를 완대사를 ‘포용’하고, 중국 지도부에도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이벤트는 지난 1월 츠하오텐(遲浩田) 중국국방장관이 한국전 이후 최초로 한국을 방문함으로써 고조된 한-중 밀월 분위기를 깨뜨리는 데도 한몫할 것으로 보인다.



    3월5일은 주룽지(朱鎔基) 중국총리가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중국과 북한관계를 ‘전통적 우호관계’ 라고 표현한 날이다. 전인대의 보고는 매우 중요한데, 지난 3년간 보고에서는 북-중 관계에 대해 언급이 없거나 단순한 우호협력관계로만 표현됐다. 주총리가 ‘전통적 우호관계’란 표현을 되살린 것은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천수이볜(陳水扁)후보의 대만 총통 당선이 유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후보의 당선은 곧 중국의 대외 영향력 축소로 비치므로, 중국은 동지를 하나라도 더 늘려야 한다. 소식통은 “김정일은 중국이 아쉬운 것이 많은 시기를 택해 이벤트를 연출해 중국측을 감동시켰다. 이제 중국은 북한에 뭔가를 줘야 할 처지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전쟁은 ‘모 아니면 도’(zero sum)이지만, 외교는 ‘주고받기’(give and take)다. 김정일은 절묘한 이벤트를 벌임으로써 중국에서 꼭 받아내야 할 것을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은 ‘국가 원수’가 주재대사관을 방문하는 것이 ‘사대’(事大)로 비친다는 것을 우려해 공식 업무시간이 아닌 휴일 저녁시간을 선택했다. 하지만 미래의 한반도 전문가인 완대사를 포용하기 위해 군과 당의 실세를 대동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천수이볜 후보의 대만 총통 당선이 유력한 만큼 김정일의 이벤트를 받아들여 극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었다(실제로 중국측은 이를 적극 홍보했다). 결국 김정일은 이벤트 하나로 차관을 끌어들일 기회를 만든 셈이다.

    90년대 초반 핵개발을 무기로 ‘벼랑끝 전술’을 펼쳐 원전 두 기를 얻어냈던 김정일의 외교술은 계속되고 있다. 당시 한국은 북한에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김정일의 외교술을 우습게 보고 과소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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